[차세대인물]김경희 대전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 대전여민회 공동대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강조하는 김경희 대전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 대전여민회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거대 담론이 아닌 생활정치부터 눈 떠 가는 것이 필요

지난 해 이던가 올 봄이던가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뜻밖에도 지하철 안에서 김경희, 짐보따리를 든 그녀를 만났다. 공식적인 자리와 이러저러한 모임에서도 수없이 보아 온 그녀였지만 이른 시간 지하철 안에서의 만남은 좀 뜻밖이었다. 서울 가는 길이라고 했다.

딸아이가 무용 콩쿠르를 치르는데 ‘엄마로서’ 들여다 보러간다고 했다. 단체 일 등으로 바빠 혼자 보냈는데 막상 콩쿠르 날이 다가오니 마음이 영 걸려 뒤늦게 먹을 것 싸들고 상경을 결심했단다. 그러고 보니 가끔 무용 공연장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쌍둥이인 딸들이 발레와 한국무용을 한다고 해 조금은 뜨악해 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선입견에서 출발한 것이다.

레슨비, 콩쿠르 출전 등 천문학적 비용으로 준재벌 정도로도 힘겹다는 예능 교육을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한 아이도 아닌 두 아이 씩이나 시킬 수 있는 것일까. 또 보통 예능 교육시키는 엄마는 자기 생활을 온통 희생시키고 아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해야 하는데 그토록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는 그녀가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러한 속물적(?) 우려는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경제적 부분은 경연대회에서 독무를 추는 딸에게 다른 아이가 군무를 출 때 입었던 의상을 빌려 입히는 식으로 해결 했다.또 일일이 아이들을 따라 다니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이니 즐기면서 하도록 할 뿐이다. 언제든 그만 두고 다른 길을 택하겠다면 그렇게 할 작정이다.

대전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이자 대전여민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른바 ‘김경희식 상황 돌파법’인 셈이다.

경연대회서 독무 추는 아이에게 군무 의상 빌려 입혀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운동을 해오다 보니 그러나 세상은 막연히 또는 그냥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바뀌어야 결국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문제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이냐 하는 것이다.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정치-여성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보다 가장 큰 버팀목이 되주는 남편 이학준씨와 두 딸 예나 지나와 함께

대전여성정치네트워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여성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여성의 힘으로 지금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얼마 전의 일화를 들려준다. 여성의 정치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의에 참석했던 한 주부가 강의가 끝난 후 정치는 자신과 먼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하더란다.

"당신이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었더니 건강, 돈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월급 받은 다음날이면 돈은 이리저리 다 없어지고 아이들 사교육비, 병원비 등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불편함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법 제도 조례를 바꿔야 한다. 이러한 법 제도를 바꾸는 것이 누구냐. 정치다.”고 설명했단다.

자신의 불편함이 정확히 뭔가 정확히 알고 내 고민을 해결해 줄 올바른 대표자를 찾는 것, 그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거대담론이 아닌 생활정치부터 눈을 떠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정치는 여성이 보다 더 잘 할 수 있고 여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믿음이 여성운동을 하면서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는 ‘홍반장’처럼, 대전지역 시민사회, 여성 운동 현장에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 활력과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녀가 처음부터 시민운동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본격적으로 세상으로 불러낸 것이 지금까지 샴쌍둥이처럼 붙어있는 대전여민회다.

건강한 지역사회 위해서 세상-정치-여성이 함께 가야

쌍둥이 딸을 키우며 아파트 부녀회 일을 하던 그녀에게 하루는 여민회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는 여민회의 상근조직이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던 때였다. 87년 창립된 여민회에서 활동하던 활동가를 비롯해 열성 회원들이 결혼 적령기가 되면서 하나 둘 떠나다 보니 조직 자체를 지속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지금은 성공회대학 겸임교수로 있는 허성우 당시 이사가 사무국장직을 맡아줄 것을 제의를 했다. 그러나 제안을 들으며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조직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것도 아니고, 잘 알지고 못하는 사람에게 사무국장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제의하는 조직은 건강하지 못한 조직으로 없어져야 한다고 했어요.”
말은 그렇게 모질게 했지만 1주일 고민 끝에 사무국장직을 맡게 됐다. 1997년의 일이다.

“학보사 기자로 있으며 학생운동에 직접 뛰어들지는 않았으나 운동에 대한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기존 운동권에 대해서는 가는 방향에 불편함을 갖고 있었는데 내 나름의 방식으로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여성정치 실현을 위해 조직한 여성정치네트워크 사무실에서.

‘내 나름의 방식’

“운동은 거대 담론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 내 문제와 일치감을 갖는 일을 주변과 더불어 하는 것을 선호한다.

생활 속에서 신뢰할 수 없는데 변화를 이끌 수 있는가. 또 80년대와 90년대는 시대적 상황도 달랐다.”

무슨 운동이 됐든 삶에서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파트 같은 라인의 사람들과 주변의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하는 부녀회 활동을 했던 것이다.

여성문제라면 태생부터 관심을 가졌을법하지만 놀랍게도 여민회 활동을 하기 전까지 특별히 여성문제를 고민한 적이 없었단다.

여민회 초기만 해도 사실 회비나 겨우 내는 별로 성실하지 못한 회원이었다.

여민회 사무국장 맡으며 여성. 시민사회 운동에 뛰어들다

“단지 나 개인이나 가족 틀 안에만 갇혀있지 않고 어울리며 즐겁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지요. 운동도 기존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무실 전화 받는 일부터 했다. 활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스스로 하고 강의를 통해 자극을 받았지만 집에 가서 어떻게 꾸려 갈 것인가 잠을 못 이루는 나날의 계속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녀는 “무엇 무엇 때문에 못한다”는 이런 생각은 안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어려서 활동을 못한다면 아이가 커서도 마찬가지다. 학교 가면 가는대로 못할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눈앞에 문제가 닥치면 그 문제가 있는 지점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그것이 김경희, 그녀의 특성이고 장점이다.

집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지만 쌍둥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사무실로 함께 출근해 6개월 쯤 지나니까 아이들이 “엄마, 오늘 회의야 세미나야”라고 구별해 물어볼 정도가 됐다.

이렇듯 아이들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니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시도하게 되고, IMF가 닥쳐 고개 숙인 아버지, 여성가장 문제가 심각해졌을 때는 실직여성가장 겨울나기 등 생활과 밀착된 문제점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는데 운동의 역량을 집중했다. 거대담론을 넘어 개개인의 삶에 주목한 것이다.

이렇게 사무국장에서 시작해 부회장 회장직을 맡아 여민회와 13년을 보냈다.
“운동이 살아있으려면 논쟁, 토론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함께 비전을 만들어 갈수 있고 함께 실천할 수 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김대표는 ‘생활 속의 작은 것과 과정의 중요성’을 운동의 중요한 지점으로 삼는다.

생활과 밀착된 개개인의 삶에 주목한 김경희식 운동방법

시민운동 진영에서 그녀의 활동 역량과 이름이 알려지자 선거 때만 되면 출마를 거론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문제로 다른 때보다 지난 2006년 지방선거 때는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찍어서 전면에 세우는 픽업방식의 개인적 차원의 결단만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판단에 접었다.

   
대전여고 시절 친구들과.

이제까지 보아온 바로는 개인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식의 정치 입문으로는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기 쉽지 않고 오히려 갖고 있던 운동의 역량과 자산마저도 제도권에 매몰되기 십상이라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다.

“아마 여민회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고 몰랐다면 그냥 투신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는 개인 차원이 아닌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의 정당들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무소속은 한계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내년도 지방선거에 나가느냐고 물었다. 이대로는 아니지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룹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해 함께 움직인다면 운동차원에서 총대를 멜 생각도 있다고 답했다.

“선거라는 것이 깃발만 꽂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주변사람들이 소통하는 구조를 갖지 않으면 어렵다. 소통하는 구조를 가졌다 해도 함께 조직적으로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지속적으로 후보군과 같이 움직이고 함께 할 수 있는 정치 운동체를 생각했고 이것이 대전여성정치네트워크라는 또 하나의 단체로 발족하게 된 것이다. 혼자서는 정치영역을 변화시킬 자신도 없고 함께 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변화와 지금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김대표의 학창시절 꿈은 뜻밖에도 기자나 PD가 되는 것이었다. 졸업 후 서울에서 첫 취업했던 회사도 교육 잡지사였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했던 기자와는 달랐다.

원고 청탁하고 편집하는 틀에 박힌 일이 싫어 그만두고 대학원 진학을 하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짧은 시험준비를 해서 치른 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더구나 그 시기 가장인 큰 오빠가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났다.

기자가 되고 싶었던 그녀, 더불어 사는 세상 꿈꾸다

그러나 이 무렵 무엇보다 소중한 인생의 반려이자 가장 든든한 지지자인 남편과의 만남이 다시 이뤄졌다. 대학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군대 갔다가 와 복학한 장래의 남편에게 대학원 진학에 필요한 졸업증명서 등의 서류를 보내달라고 한 것이다.

   
충남대 사학과 재학 중 학보사 기자들과.

외조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알려진 남편 이학준씨와는 대학 1학년 때 만났다. 충남대 사학과 81학번 동기인 이들은 과대표와 부대표로 호흡을 맞췄고 학보사 기자도 잠간이지만 함께 했다.

활달하고 명랑한 김경희를 마음에 두고 있던 이학준씨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김대표를 따라 원서도 안내고 학보사 시험을 치렀단다. 졸업 후에도 소식은 간혹 주고받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당시 김대표의 집은 산내였고 남편은 석교동에 살아 서류를 받으러 옥계동 다리 근처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그간 서울에서의 고달팠던 생활사들을 정신없이 털어놓았다.

조용히 듣고 있던 남편은 ‘말하고 싶어서 어떻게 살았느냐’며 말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다. 보통 그렇게 쏟아놓듯 말하고 나면 허전함과 허탈함이 남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막내였지만 늘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한 김경희대표의 망중한.

대전에 오면 걸어 다니면서 데이트를 했다. 하루는 비가 왔는데 자기 우산을 접고 김대표의 우산을 함께 썼다. 일종의 프로포즈였던 셈이다.

그러나 가난한 집 장남인데다 노동운동에 듯을 두고 있던 그는 결혼하자는 말을 차마 못했다.
결혼을 하자는 말도 그녀가 먼저 했다.

집에 결혼하겠다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가니 아버지는 딱 한 말씀 하셨다.

 “자네는 모르지만 내 딸은 믿는다. 내 딸이 선택한 사람이니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김경희는 집 안에서 그랬다. 여섯 형제의 막내였지만 어리광 대신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하는 딸이었다.

결혼 통보한 딸에게 “자네는 모르지만 내 딸은 믿는다”

김대표는 1962년 충북 보은군 탄부면 대양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릴 때 대전으로 이사를 와 대전에서 성장하고 학교를 다녔다. 유천초등학교, 대전여중, 대전여고를 거쳐 충남대 사학과에 진학했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김대표는 ‘무엇 무엇’ 때문에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상황을 맞춰 해결하려고 한다.

   
여섯 남매 중 막내였던 김경희.

결혼 당시 김대표는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비교적 운영이 잘 됐다. 그런데 남편은 대전에서 살고 싶어 했다.

김대표는 주저 없이 잘되고 있는 학원을 정리하고 대전에서 신접살림을 꾸렸다. 둘 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미래가 두렵지는 않았다.

결혼 당시 지금만큼 하루 세끼 잘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단다. 심지어는 공중화장실이 있는 달동네에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단다.

잘되는 학원을 그만 두고 서울 생활을 망설임 없이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과 더불어 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가치를 공유하고 바른 사고를 가진 남편과 삶에 대한 신뢰였다.

그렇게 해서 대전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아이가 생겼다. 지금 예고 1학년인 예나, 지나(15세)쌍둥이 딸이다. 김대표의 전자메일 아이디는 두 딸 이름의 영문표기다.

그녀가 그리는 세상이 비록 당장은 아닐지라도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언젠가는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김대표는 올 1년은 아직 정리를 하지 못한 여민회 활동을 병행할 계획이다.

이후에는 여성정치네트워크에 주력할 생각이다. 변화한 세상을 세상의 모든 예나와 지나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여성의 힘으로 정치를 바꾸는 그날까지 그녀의 에너지 넘치는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임원정규 대전여성정치네트워크 사무국장
[내가 본 김경희]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어느덧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가을, 따뜻한 밥 한 끼를 같이 하자며 연락이 왔다. 밥을 먹으며 나는 그녀에게 나의 진로에 대해, 그녀는 여성운동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난 그녀와 함께 여성운동가로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한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제안 받으면서 <내가 본 김경희>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은 “밥 한 끼 먹자”라는 말이었다. 그 밥 한 끼가 내 삶의 목표와 방향 그리고 삶 자체를 되돌아보고 내다볼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본 그녀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많은 사람들의 삶에 비전을 제시해준다. 나아가 여성과 남성이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사회에 대해 코디네이터로서 디자인을 제안하고 만들어간다.

내가 본 그녀는 항상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향한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이 이뤄질 수 있도록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또 생각을 모아낸다. 조금씩, 천천히, 지속적으로 걸어가는 길이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

내가 본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능력이 많다. 과연 어디에서부터 그런 능력이 나오는 것이지? 내가 본 그녀의 능력은 그녀의 눈빛에서, 그녀의 웃음에서, 그녀의 마음에서…그녀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 모든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뿜어 나온다. 누구보다도 한결같이, 누구보다도 실천적으로,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몸소 실천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가기에 가능한 것이다.

요즘 그녀는 어느 때 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도 지치지 않는 열정을 뿜어내며 지역의 여성운동 선배로서, 든든한 큰언니로서, 앞선 한걸음을 걷는 시민운동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절정이다. 그래서 더 건강이 염려되는 요즘이지만 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녀를 믿는다.

왜냐하면?

내가 본 그녀의 눈빛은 비전을 밝히는 등대와 같기 때문이다.
내가 본 그녀의 웃음은 행복을 전하는 긍정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그녀의 걸음걸이는 미래를 향한 앞선 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그녀의 생각은 건강한 삶을 나누는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그녀의 밥그릇은 따뜻한 마음을 담기 때문이다.
내가 본 그녀의 땀방울은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고 흐르기 때문이다.
내가 본 그녀의 마음은 사회변화를 위한 식지 않는 열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본 그녀의 꿈은 조금씩 천천히 지속적으로 현실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나도 그녀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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