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조상님들은 지금과 같이 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러한 질 그릇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인데 옛날과 현재의 구분을 설명하면서 학습에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박물관 이정복 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 대사동 딸 성은이와 아빠-’

대전시 서구 도마동 조달청 4거리 부근 덕진의원 2층 동산도기박물관.
도시화에 밀린 주변의 번잡한 풍광과는 사뭇 다른 공간이었다. 그곳은 삶과 죽음의 순간을 가르는 1층 병원과는 아주 달랐다. 바로 시간이 멈춰져 있었다. 각종 질그릇과 화로, 도기 등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그릇들이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고 있었다.
병원장보다 박물관장이 더 듣기좋다는 이정복 관장.

2층과 3층을 통틀어 만들어 낸 역사의 공간은 황폐해진 도시민에게 청량제가 되고 있었다. 성은이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자녀들의 학습을 위해서...’ 또는 ‘예전에 보고 자랐던 향수를 생각나게 해서...’ 등등의 이유로 찌든 도심에 ‘문화의 산소’를 제공해주었다.
 
대전 중구 옥계동에 사는 정호순씨는 “사재를 털어서 만드셨다 들었습니다. 맘 또한 따스한 분 같으셔서 더욱 맘에 듭니다”라는 감사의 메모로 주인장이 보람을 느끼게 했다.

그곳에 주인장인 ‘박물관장’은 의사였다. 그것도 필자가 잘 아는...소아과 전문의 이정복(53), 바로 그였다.

의사와 박물관장(?).
꼭 안 될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썩 잘 어울리는 조합(調合)은 아니다. 역사 선생이나 문과대 교수, 또는 도예가 등속은 쉽게 상관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의사와 박물관장은 쉽지 않았다. 그는 있을 법 하지 않는 조합을 절묘한 ‘하모니’로 연출해냈다. 그 둘 간에는 ‘열정’과 ‘보람’이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소아과를 떼어내고 ‘수정의원’ 원장이 된 이관장과 약속을 정하고 만난 건 지난 주말 오후였다. 대담을 위해 하루 전인 금요일 한번 왔다간 곳이라 약속시간보다 10분정도 빨리 도착했다.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는 데 이관장이 들어왔다. 두 팔을 벌리면서 반갑다고 껴안은 모습은 정이 넘쳤다. 물론 덕담이지만 얼굴이 팽팽한데 자기만 늙었다며 필자의 손등을 엄지와 검지로 주욱 당기는 모습을 보고 ‘천상 직업은 못 속이는 구나’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김사장이 어디 대전근교에 널찍한 곳을 좀 구해줘요. 박물관 옮기고 시민들이 많이 관람할 수 있는 장소로요. 하하하.”

현안이 그것인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휴식을 취하면서 질그릇의 요모조묘를 여유있게 감상할 수 있는 공간, 그게 이 관장에게 꿈이었다. 그리고 손을 맞잡고 2층에 마련된 간이 응접세트로 향했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바로 인터뷰에 들어갔다. 선수끼리 워밍업은 필요치 않았다.

- 왜 ‘동산’(東山)이라고 지었나요.

“아버님 호(號)가 ‘동산’이죠. 동녘 ‘동’에 뫼 ‘산’자요.”

- 아버님 때문에 이걸 하셨다면서요.

“네, 초등학교 교편을 오랫동안 잡고 계시다가 나중에 한의학 시험에 합격해 한약방도 했는데 그 한약방 이름이 동산이었죠.”
이 관장이 동산도기박물관을 지키는 박수희학예사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 어디서 했죠.

“부여 읍내동이요, 부양초등학교 계실 때 토기 5점을 학교에 기증하셨는데 그 게 학생들 교육용으로 쓰이는 걸 보고 민속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죠. 하하하.”

오늘 날 원장에다 박물관장 명함을 하나 더 쓰게 해준 아버님은 공교롭게도 동산도기박물관 오픈 나흘 전에 돌아가셨다. 아들이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긴 했었다. 그래서 예정되었던 개관식을 보름이나 연기했다. 그게 1997년 3월 15일이었다. 올해로 꼭 10년째가 되는 셈이다.

- 아버님이 박물관 하는 것을 보고 뭐라고 하던가요.

“그냥 교육적으로 도움이 되니 니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자식 교육을 했어요. 공부도 그랬고 특별히 공부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었죠. 늘 알아서 하게끔 했죠. 정식 개관은 못보셨지만 약간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좋아는 하셨죠”

- 고향이 부여라고 했던가요.

“맞아요. 거기는 산을 파고 땅을 넓히는 일을 하다보면 토기가 잘 나와요. 그러면 사람들이 아버님께 갖다드려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으니까. 그걸 보고 옛날부터 수집하는 걸 좋아했죠.”

- 취미 생활로 이걸 한 건 아니쟎습니까.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죠. 대학 다닐 때 수석에 빠졌었죠. 의사가 되고 개업을 하고 나서 일요일에는 시간이, 의사라는 직업이 경제적 여유를 가져다주면서 남한강 주변에 돌을 주우러 다니곤 했지요. 그 때 시골에 남아있는 토기를 접하게 되었고 옛날 아버님 생각이 나서 수집을 골동품 쪽으로 바꾼거죠.”

수집을 하다보니 양도 많아지게 되고 이걸 한 군데 모아서 전시를 하는 게 후학들을 위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처음부터 박물관을 열겠다는 각오로 수집한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어째든 이관장의 수집벽은 필자와의 인연을 맺게 만든 고리였다.

이 관장과는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처럼 꼭 세 번 만났다. 금아(琴兒)선생이 자신의 글 속 주인공 아사꼬와는 만난 것과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 번째 인연의 성격이었다. 저쪽은 ‘아니 만났어야 할 만남’이었고 필자는 ‘잘 만난 일’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는 대학시절이었다. 이관장은 의대 본과에 다녔고 필자는 사학과 초년생이었다. 그 때 수석(壽石) 찾아다니는 모임이 있었는데 둘 다 거기에 적(籍)을 두었다. 이원, 지탄 등 금강 상류를 훑고 다니면서 돌을 주었던 아련함이 그를 볼 때마다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정말 열정을 가지고 일에 몰두하는 선배’라는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 만남은 1987년 금산에서 이뤄졌다. 당시 전두환 정권 말기로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의 목소리가 막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언론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필자는 주동자는 아니었지만 거기에 서명을 했다. 되돌아온 것은 인사 보복이었다. 주재기자로 쫓아내는 것이 보복이였는데 대전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으니 강경파로 분류는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기서 이관장은 소아과 개업의였다. ‘주사를 잘 놓아주지 않는 의사’로 기억되었다.
이관장과 필자는 꼭 세번 만났다. 수필 '인연'에 나오는 또다른 주인공처럼 묘한 '연'(緣)을 유지해왔다.  

세 번째 무대는 대전이었다. 천안개방교도소 의무과장을 있을 때였다. 동산도기 박물관을 열어놓고 그 일에 몰두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한가로운 공직을 택했던 것 같았다. 개인박물관을 개관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직접 가보지는 못했던 터였다. 당시 도규계(刀圭界) 야인(野人)처럼 떠돌던 그의 머릿속에는 전국 어느 의사도 가지 못했던 길을 가고 있었던 것 이었다. 아무리 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사재를 털고 단위당 최고가의 노동력을 쏟아야 하는 것은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리라.

수집벽(癖)은 첫 번째 만날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얘기다. 도기박물관의 진열품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종류도 다양하고 수 적으로도 상당했다.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자그맣고 아기자기한 개인박물관 수준은 아니었다.

“2층에는 석간주(민간에서 널리 사용되던 생활용 막 도자기의 일종)가 있고 3층에는 옹기와 토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체 소장품은 4-5천점 되는데 여기에 진열된 건 아마 7-8백점 정도 될 거예요. 내년에는 소장하고 있는 고서 1천 여점을 정리해서 전시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수집은 의지만 갖고 되는 건 분명 아니다. 경제적인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안에서 보면 굉장한 고생도 밖에서 볼 때는 웰빙이 가능한 상류층의 호사스런 얘기로 들릴 수있다. 말하자면 ‘당신이 의사이고 돈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 아니냐’는 시각이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수집한 물품 중에 고가품은 거의 없고 옛날 서민들이 주로 쓰던 물건이라는 점이 그렇죠. 호사스럽게 하려면 이런 건 수집 대상이 아니죠. 그냥...뭐...남들이 술마시고 담배 피울 때 저는 돈과 시간을 내서 돌아다닌거죠. 5천원짜리 부터 비싼 것은30만원짜리 까지 있어요. 상당수는 시골에서 얻어온 것도 많죠.”

순수한 취미로 하다 보니 양이 많아졌고 그걸 혼자 보기가 아까워서 박물관을 차렸다. 초등학교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공간을 마련했지 거창한 꿈을 갖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사실 과시를 목적으로 했다면 질그릇보다는 지금도 한방안 가득한 수석을 전시해야했었다.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웰빙과 상류층을 대변해줄 수 있는 상징물이 아닌가. 질그릇을 선택한 것은 이관장 심경의 일단을 읽게 했다. 시작은 작았지만 중간은 장대한 게 그의 박물관이다. 여기에는 정신적인 무장이 필요할 것 같았다.
진열된 도기를 돌아보고 있는 박수희 학예사.

“그냥 난 자긍심을 갖고 있죠. 1978년에 의사가 되었는데 의사해 가지고 어디 신문에 날수 있나요. 힘들죠. 의사는 우리나라에 엄청 많아요. 그런데 박물관은 얼마되지 않아요. 더구나 박물관장은 정말 얼마 안되요. 더더욱 의사출신 박물관장은 저를 포함해 전국에 둘 밖에 없어요. 지금 병원에서 원장님 소리 듣는 것보다 관장님 소리가 훨씬 듣기 좋죠.”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가까웠다. 아침을 간단히 먹을 터라 배가 출출해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계속하면 어떨까하고 제의를 했다.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이관장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점심하나 먹는 데 뭐 큰 의미를 두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는 그랬다. 합리적이고 상대방 의견을 존중해주는 스타일이었다.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한남대 출신 박수희 학예사(24)가 영양탕 제의에 ‘즐긴다’고 의외의 답을 했다. 대전일보 사진부장 출신인 이중식씨 아내가 경영하는 ‘가마솥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 박물관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교차로나 대전일보 등 매스콤을 타면 며칠간은 반짝해요. 문의도 오고 관람객도 늘죠.”

- 매번 수집하러 가면 집에 계시는 사모님은 뭐라고 합니까.

“지금은 뭐라고 안하죠. 포기한 셈이죠. 처음에는 싫어했죠. 주말에는 꼭 나가서 가져오는 건 쾌쾌한 냄새가 나는 물건이고 이걸 또 닦아야 하니까 싫어했죠.”

- 수집할 때 에피소드도 많을텐데요.

“결국 속은 얘기인데... 능화판이라고 고서 표지 장식용 기구였는데 마누라한테 미안해서 10분의 1가격으로 구입한 걸로 자랑했는데 얼마가지 않아 가짜라는 게 드러났지요. 약연이라고 약을 가는 기구인데 그것도 최근에 박달나무로 만든 다듬이 돌로 만든 것이었죠. 속았죠. 지금은 안 속죠.”

- 수집 물품 중 특히 기억나는 것은.

“월악산 주변에 수석을 채집하려 간적이 있습니다. 그 때 어느 시골집 헛간에 보니 질화로가 보여요. 하루 종일 주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서 그냥 돌아왔는데 그날 돌아와서 잠을 자는데 그게 계속 어른거려요. 다음 날 진료를 끝내고 또다시 올라갔죠. 미리 준비한 담배하고 소고기를 드리고 화로를 달라고 했죠. 절대 사겠다고 하면 좋은 건 줄 알고 안팔거나 비싸게 돈을 달라하죠. 그러니까 정으로, 후학들을 위한다는 설득이 필요하죠.”

이관장은 계속해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골동품 중간 수집상의 집을 들렀는데 아이가 울어 장이 꼬인 것 같다고 하면서 큰 병원에 가보라 했더니 화를 내며 고집을 부렸던 주인이 다음 번에 만나니 고마워하면서 좋은 물건을 건네주더라는 얘기에서부터 고생한 얘기까지 무궁무진했다. 좀 유치한 질문같지만 그래도 넘어갈 수 없어서 ‘돈은 되느냐’고 물었다.

“절대로 돈은 안 되죠. 나중에 자식놈이 잘 관리해주면 대를 이어서 하는 거고 아니면 공공기관이나 대학박물관에 기증하는 수 밖에 없죠. 아들이 잘 관리해주면 고마운데 지금봐서는 못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제가 70까지는 관리하겠죠.”

- 이건 정말 대전의 큰 문화유산이 될 것입니다.

“장롱에 있을 때는 소용없지만 전시를 하게 되면 굉장한 거죠. 학생들이 큰 곳만 찾아가는데 그건 잘 못입니다. 와서 편히 놀다가는 장소만 되면 족해요.”

- 올해 전시계획은.

“8월 쯤 질 그릇 전시회를 하고 10월에는 분청사기와 조선백자 특별전을 준비중에 있습니다.”

- 문화관광부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는지요.

“10월 전시는 지원을 요청해놓았습니다. 지원금은 대부분 도록(圖錄) 작성에 쓰입니다.”

약 2시간 30분 동안 대담은 이뤄졌다. 이제 일어설 시각이었다. 이관장의 박물관 운영은 이기적이라는 의사에 대한 사회적인 시각을 바꾸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덕담도 곁들었다. 사실 사회는 여론의 경우 소위 ‘오피니언 리더’중심으로 형성되고 소비문화는 어쩔 수 없이 ‘가진 자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나온 것도 어쩌면 있는 자와 가진 자, 아는 자의 전횡을 통제하고 베풀면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일 수 도 있다.

그걸 마다하고 내 것만 채우려는 욕심이 사회를 어렵게 만든다. 지탄받고 주변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일이 허다한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 각박하다. 그러다보니 내가 가진 것 중에 정말 조금만 떼어주어도 칭송을 받고 존경을 받는다.

그런데 이정복 관장은 많은 것을 사회에다 주었다.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한 곳에 모아 정리한 '순수한 마음'을 사회에 내 놓았다. 법적으로는 개인 소유물이지만 이 정도면 공적인 자산이 된다. 이 관장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이 많은 것을 사회에다 내놓았다는 표현의 근거가 되었다.

언제 한번 점심이라도 먹자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지난 주 토요일 오후는 내내 마음이 즐거웠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언론인으로서 축복이었다. (연락처) 019-443-9432,042-534-3453(박물관), 홈 페이지 //dongsan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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