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살 진상규명”... 고 최덕수 열사 25주기 추모식

고 최덕수 열사의 어머니 고순임씨가 아들의 추모비에 헌화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덕수야! 엄마가 여기에 왔다. 여기에 몇 번 와도 쉴수가 없구나. 학우들하고 잘 거시기 하고 있냐? 엄마는 이제 늙어서 잘 찾아다니지도 못한다. 덕수야! 한 세상 살다 갈 것이지 왜 벌써 갔니... 엄마는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엄마 죽으면 따라갈게. 잘 거시기 하고 있어라...”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을 맞이하는 18일 정오, 천안 단국대 캠퍼스 한쪽에서는 한 노인의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가 행사에 참석한 200여 명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광주항쟁 비리주범 노태우를 처단하자!” “오월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 국정조사권 발동하라”...

1968년 전북 정주시(현 정읍시)에서 농민 최종철씨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고 최덕수 열사는 1987년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법학과에 입학했다. 서도회 동아리 가입, 호남향우회 회장 역임, 독학운동사 연구회 등에서 활동했던 최 열사는 1988년 5월 18일 단국대 시계탑 앞에서 광주민중항쟁 성명서를 발표했다.

최 열사가 분신한 자리에 마련된 추모비.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겪은 지 8년여가 지난 현시점에서 아직도 진상은 규명되지 않은 채 허구적인 ‘말의 잔치’만이 넘쳐나는 현실이다.

5.18을 극소수 폭도들에 의한 난동이라고 선전하면서 진상을 소호하던 정부 측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실시하겠다고 말하면서 오월 광주민중항쟁을 시민, 학생들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시인하고 있다....

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를 내세운 전두환은 역사의 순리를 폭력과 학살로 대변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피의 현장을 ‘빛 고을’ 광주로 잡았던 것이다. 광주가 하루아침에 ‘핏 고을’로 변해버렸으며,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라고 가르친 미 제국주의는 만행을 묵인, 방조하는 단계를 넘어 동조를 한 것이다...

일제의 압제로 인하여 자주적인 발전의 터전을 철저히 유린당한 이 땅에서 80년 광주민중항쟁들이 보여주었던, 한반도에 존재하는 반동세력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깨달음과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반역사적인 집단과 가차 없이 싸워서만이 이길 수 있다는 투쟁의 정신이 우리가 광주민중항쟁에서 얻은 값진 교훈인 것이다. 이제 80년 이후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먼저 가신 이들에게 크나큰 빚을 진 우리는 뜨거운 투쟁의 마음으로 반동세력과의 계속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최 열사는 자신이 작성한 성명서를 낭독하고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분신을 시도했고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어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된 후 5월 26일 오후 1시 30분, 짧은 생애를 마감해야 했다.
최 열사의 추모비에 헌화를 마치고 묵념중인 학생 대표들.

이어 5월 30일에는 단국대 서울캠퍼스 노천마당에서 각계인사 1백여 명과 학생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중해방열사 고 최덕수 민주국민장’을 거행했고 최 열사는 같은 날 밤 11시 59분, 광주 5.18 희생자 제 3묘역에 안장됐다.

최 열사의 분신 25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추모제에는 후배 학생들과 지역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 약 200여명이 참석해 최 열사가 남기고 간 큰 뜻을 기렸다. 참가자들은 최 열사에 대한 추모시를 낭독하고 학생대표,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헌화 순서도 가졌다.

최 열사와 같은 학번인 천안KYC 장기수 대표(경영학과 87)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수도권과는 다르게 지역 캠퍼스 내에서는 ‘의식 있는 문화’와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 놓은 ‘향락문화’로 양분돼 있었다”며 “최 열사는 휴학 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다시 복학한 상황이어서 캠퍼스의 이와 같은 분위기에 대해 문제의식이 더 깊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전했다,

아울러 장 대표는 또 “최 열사의 분신으로 광주학살과 신군부에 대한 문제의식이 지역에서도 확산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 자리에 참석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며 동료를 먼저 보낸 무거운 심경을 내비치기도 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라도 정읍에서 아들의 추모제에 참석한 아버지 최종철씨(79)와 어머니 고순임씨(71)는 먼저 간 아들에 대한 뼈아픈 기억들로 눈물을 글썽였다.

“5월만 되면 자꾸 눈에 거시기 혀... 요즘도 해마다 이때가 되면 경찰에서 ‘몇 명이나 다녀갔냐’고 전화가 와...(추모제를 마련해준) 학생들에게 참 고맙고...” 어머니 고씨의 말이다.
최 열사의 아버지 최종철씨(79)와 어머니 고순임씨(71)

고씨는 “아드님이 이 땅의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많이 민주화가 됐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아직 멀었어.. 멀었구 말구”라며 의미심장한 답변을 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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