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기획] 유관순 열사, 그 꺼지지 않는 ‘민족혼’

유관순 열사 추모각.

'한국의 잔다르크' 또는 '3·1운동의 꽃'으로 불리우는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은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매봉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올해로 86주년을 맞이하는 ‘삼일절’이지만 가까울 수록 더 소홀해지는 것이 일반인지라 천안에서 15년째 살고 있으면서 단 한번도 찾은적이 없었다.
유관순 열사의 영정.

출발한지 20여분만에 도착한 기념관에는 주말을 맞아 가족단위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고 마지막 추위를 느끼게 하는 칼바람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시실을 들러 유관순 열사에 대한 자료들을 살피고 영정이 모셔져 있는 추모각으로 향했다.

추모각은 1972년 15평 규모로 신축, 1985년 3월 1일 26평으로 증축했고 매년 10월 12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제작한 것으로, 장화백은 친일 미술인 50인으로 분류되는 등, 친일행각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열사의 모습이 서대문 형무소 수용 당시의 모습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라 얼굴이 부어있는 등 열사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는 비난도 일고 있다.

추모각, 초혼묘, 그리고 매봉산 봉화지

추모각에서 내려와 솔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돌계단 길을 걸어 오르면서 계단 좌우에 있는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는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약 10여분 후, 열사의 시신이 안장되지 못한 허묘(墟墓)인 초혼묘가 보였다. 그리고 다시 몇 분 후, 매봉산 정상의 봉화지에 도착했다.
왼쪽부터 봉화지까지 올라가는 돌계단과 유관순 열사의 빈 무덤인 초혼묘, 그리고 봉화지

유관순 열사 봉화지는(사적 제 230호) 유 열사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1일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3월 31일 밤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이 봉화를 신호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연기, 청주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올려졌다.
봉화지에서 내려다 본 아우내 장터. 멀리 보이는 흑성산 자락 왼쪽편에는 독립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높이 약 100여미터에 불과한 매봉산 주위로는 천안, 안성, 진천, 청주 등 각지의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능선을 이루고 있었고 멀리 북쪽방향으로 보이는 흑성산 자락 왼쪽 편에는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일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특히 아우내장터가 한눈에 볼 수 있어 그야말로 봉화를 올리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발길을 돌려 유관순 기념관에서 왼쪽으로 약 1.2Km 떨어진 유열사의 생가와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를 방문했다. 매봉산 자락의 양지 바른곳에 위치한 유열사의 생가는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사적지로 지정, 신축했고 전두환 대통령이 재건축 했지만 화재로 인해 소실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유관순 열사의 생가.

매봉교회는 유관순 열사의 작은아버지 유중모씨가 전도사로 생활했던 교회로서 1908년에 설립됐고 아우내 만세운동의 주모자들이 대부분 매봉교회 성도들이라는 것에 분노한 일제는 1923년 교회의 문을 닫게 했다. 그 후 1967년 11월에서야 재건립을 했고 최근에는 교회를 신축하여 ‘유관순 열사 기념교회’로서 관람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가 됐다.
매봉교회.

매봉교회 옆골목 한쪽에는 열사의 사촌동생 유정석(고 유중모씨의 세 아들 중 둘째)씨 내외가 생존해 있다. 90세의 연세에 11년전부터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유정석씨는 1919년 당시 4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열사에 대한 기억은 분명히 남아있었고, 사실상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였기에 유정석씨의 증언 한마디 한마디가 무척 귀중하게 느껴졌다.

“어르신, 몸이 불편하신데 죄송합니다. 몇가지 여쭐것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내가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말을 다 해줄지 모르겠네...”

유씨 할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인터뷰에 응했고 사촌누나벌 되는 유관순 열사에 대해 ‘유 열사’라 표현하며 그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운 심정을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유정석씨 “유 열사의 시신 못찾은 것이 아직까지 한으로 남아...”

“유 열사는 내가 조르면 항상 업어주는, 나에게는 어머니같은 분이셨지. 유 열사가 아버지와 함께 낮에는 청주, 병천, 진천 등을 다니면서 ‘우리가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를테니 그날 모여달라’고 부탁했고 밤에는 오래되도록 태극기를 혼자 만들었어. 거사 당일날 어린 마음에 따라 가려고 했는데 아버님과 유 열사는 ‘애들은 위험하다’면서 집에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지”

말을 이어나가는 유씨 할아버지는 때로는 가쁜 한숨을 내뿜어가며 힘든 모습이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에게 들었던 유 열사에 대한 기억들을 증언해 주었다.
유관순 열사의 사촌동생 유정석씨.

“음력 3월 1일, 수천명이 아우내 장터에 모여서 만세를 불렀는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천안 헌병대 대원들이 트럭 두 세대에 나눠타고 현장에 도착한거야. (그때 전화선을 잘랐어야 하는건데...) 그래서 총을 맞고 잡혀 가고 난리가 났던거지. 잡혀갔던 사람들은 공주로 이송됐고 유 열사는 죄가 중하다고 해서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갔지”

“어르신. 만세운동 때문에 가족들의 고통도 많으셨겠어요”

“글쎄. 하도 당한게 많아서... 해방되기 전에 이 동네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못쉬고 살았으니... 한순경이란 사람은 긴 칼을 옆에 차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우리 집에 어떤 일들이 있는지 늘 감시했었지. 삼형제중 둘째인 나는 철이 들만한 나이에 일본 탄광으로 강제 징용을 당했고 그곳을 탈출해서 부산항에 도착했더니 조국이 광복됐다고 하더군”

유씨 할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할아버지의 부친 유중모씨도 죽을 뻔 했지만 일본인 선교사들이 “유중모는 애국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교회 전도사이니 석방하라”고 주장했기에 목숨은 건질수 있었다고 한다.

“볼게 없다구요? 열사의 뜻을 생각하세요...”

유씨 할아버지가 어렵게 자신의 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아내 강경순(79) 할머니도 자신의 시아버님으로부터 들은 그당시의 상황에 대해 증언해 주기도 했다.

강씨 할머니의 고향은 충남 공주로서 서울에 있는 경성방적에 다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 고향으로 내려왔고 ‘너라도 입에 풀칠이라도 해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다 쓰러져가는 독립운동가의 집안에 들어와 기울어진 살림살이를 이끌어 왔다.

“세상에! 시집을 와 보니 바가지 하나도 제대로 없었어요.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저희 아버님이 관순형님과 만세운동에 대해 자주 말씀 해 주셨죠. 관순형님은 재판장에서 ‘나는 한국사람인데 왜 너희들에게 재판을 받느냐... 내가 죄인이 아니라 너희들이 죄인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강씨 할머니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관람객들이 ‘볼 것 하나도 없내, 괜히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여보시오 여기까지 오셨으면 열사의 뜻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돼요’하면 그사람들은 또 ‘할머니가 무슨 상관이세요?’하며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지요. 그런 사람들을 볼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강씨 할머니의 말에 마음이 드끔해진 기자는 다시 유씨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 해마다 삼일절이 돌아오면 감회가 남다르실텐데 어떻세요?”

“몸이 괜찮을 때는 여러 행사에 참여했지만 지금은 이모양이라 그것도 못하고 있어. 아직까지 한으로 남은 것은 유 열사의 시신을 못찾았다는 거야. 일본 경찰들이 유 열사의 시신을 마포 이태원 골목 어딘가에 가매장했다고 들었는데 도로를 낸다고 시신을 이장해 가라고 연락이 왔었지만, 당시 아버님은 헌병들의 감시 때문에 30리 밖을 나갈 수가 없었고, 동네 사람들도 ‘관순이 때문에 동네가 이모양인데 시신을 찾아오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반대가 심했지. 그래서 끝내 시신을 못찾았던거고 매봉산에 있는 빈무덤을 볼 때마다 가슴에 한이 맺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유정석씨의 모습을 뒤로 하고 자리에 일어났다. 강씨 할머니는 “추운데 여기까지 온 손님에게 물 한잔도 못줘서 미안하다”며 일어나지 마시라는 기자의 만류에도 마루까지 나와 배웅해주었다.

매봉산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여전히 매서웠고, 그 바람 소리 어딘가에 그날 울려퍼졌던 아우내 장터의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뭍어 있는 듯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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