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로 끝 낸 어느 한 어두운 인생


최근 관심 밖의 한 죽음이 있었다. 기사화 여부를 두고 내부적인 논란을 일으킬 만큼 떳떳하지 못한 죽음이었다. 하긴 어느 죽음이든 떳떳한 게 있겠냐만은 통상에서 너무 벗어난 일이었기에 그랬다. 자살이었다. 그리고 생전 그의 행보도 나이트 클럽, 룸살롱 대표, 주먹세계와의 관계 등 음지쪽이었다. 하지만 음지 속에서도 좋은 원칙을 가지고 살아왔다. 남자세계에서 화석이 되다시피한 의리를 지켰고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그는 살았다. 양지에서 이익만 쫓는 우리를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 언론인의 도움을 받아 그의 생을 가감없이 싣기로 결정했다. 미화와 호들갑을 최대한 자제했음을 아울러 밝힌다.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웃음으로 흘린 정보, 눈물 되어 돌아온다’
16자로 짜여진 분명한 표어지만 뜻을 모르면 어리둥절할 이 문구가 최근 대전의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 문구를 만든 주인공은 2일 낮 12시 반경 대전 서구 흑석동 호남선 철교에서 지나던 무궁화호 열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모씨(39·건설업).

그는 20대 중반이던 90년대 초반 대전 중구 은행동 B나이트클럽, 유성구 봉명동 C나이트클럽 등 대전에서 꽤 유명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면서 유흥업계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 한때 수도권에서 신문 기자를 하기도 했던 그는 정치권에 발을 담근 것은 물론 최근에는 건설업에 뛰어들면서 비록 안정되지는 않았지만 왕성한 사회활동을 해 왔다. 따라서 돌발적인 자살은 충격과 함께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는 지역 유흥업계에서는‘보기 드문 의리의 사나이’로 불려 왔다.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주먹 세계와의 연결도 무리 없이 잘 이끌어 그 쪽에서도 같은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그가 이 같은 표어를 만든 것도 바로 의리의 발로였다는 게 지인들의 설명이다. 유씨는 2000년대 초반 유성에서 A룸살롱을 운영하면서 이 같은 문구를 직원들에게 각인시켰다. 매일 오후 여 종업원들이 출근할 경우 이 구호를 서너차례 외치도록 한 뒤 손님을 접대하도록 한 것.

주변사람들에게도 “유흥업소(술집)의 생명은 고객들에 대한 비밀보장이다. 룸 안에서 손님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여 종업원들이 밖에서 흘려버릴 경우 그것은 곧 (술집이)망하는 길이다”라는 지론을 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여 종업원들이 손님들의 이야기를 밖에서 우스개 소리로 흘릴 경우, 곧 그에 대한 부메랑은 눈물이 되어 업소로 되돌아온다는 게 그가 지론이었다.

유씨의 이 문구는 소문으로 퍼져 애주가들 사이에서는“유 사장의 집에서 술을 마실 경우 아무 걱정이 없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신뢰하게 되었다. 유씨를 잘 아는 김모씨(39)는 “그만큼 고객과의 신의를 지키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보기 드문 의리의 사나이' 죽음 애도

2일 자정 유씨의 빈소가 마련된 대전 중구 목동 을지병원 영안실.
20, 30대 청년들 100여명이 빈소 앞에서 일렬로 선 채 숙연한 표정으로 조문객들이 맞이하고 있었다.

“쟤들 거의가 유 사장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업종은 달리하지만 '베품의 삶'을 실천한 유씨의 생전 행적을 잘 말해주는 광경이었다.

유씨의 의리는 ‘남자세계’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충남 예산출신인 그는 대전에 정착한 뒤 90년대 중반에는 은행동 유락백화점에서 나이트클럽에 몸을 담으며 일찍이 주먹세계와도 가까이 지내왔다. 당시‘꼬마’들로 불리는 후배들이 골목길 포장마차 등에서 외상값 등으로 말썽을 부릴 때 이를 갚아주는 건 그의 몫이었다 한 후배는 전했다. 실수로 교도소에 가게 된 후배들의 면회는 물론 석방 때 두부를 갖고 교도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유씨였다는 것.

유씨의 한 후배는 “출소 후 찾아온 후배들에게 호주머니를 털어 재활의 길을 열어 준 선배들은 몇 안됐지만 유선배는 그 중의 한 명이었다”고 술회했다.

유씨는 나이에 못지 않게 다양한 인맥도 가꾸어 나갔다. 이름만대면 금방 알 만한 개그맨 E씨, H씨 등은 유씨와 끈끈한 인맥관계를 맺어왔다. H씨의 경우 야간업소 출연 차 간 전주에서 현지인들로 부터 봉변을 당하고 있을 때 이를 구출한 게 바로 유사장이라는 사실이 후일담으로 전해진다. 2일 밤 유씨의 빈소에는 몇몇 연예인이 눈에 띄기도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였을까.
분야야 어찌됐든 빠르게 성장해 온 유씨에게 그림자도 깔리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 나이트클럽의 적자에다 개인적으로 도박에 손을 대면서 짧은 영화(?)가 하향길에 접어들었다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 좋지 않는 곳에 손을 댔다가 수억원의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는 몸조차 추스르기 어려운 심약한 상황에서 태국행을 선택했다.

새 출발 위한 태국행도 실패로 끝나 '주변에선 아쉬움'

당시 그를 태국으로 보내는데 도와주었다는 한 지인은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보석세공을 배워 오겠다”며 태국으로 향했다는 것. 1년 반 동안 태국생활에서 대전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건설업에 손을 댔으나 마땅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방황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존심이 굉장히 강해서 자신의 어려움을 남에게 얘기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초라해보이기 싫어하는 모습은 애처로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과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로부터의 자발적 도움이 없는 것에 대해 상당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주변은 추정하고 있다. 그가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자살을 선택한 직접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유서에는 ‘추하게 살고 싶지 않다. 주변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선배들에게 그리고 후배들에게’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가족들이 있는 태국에 간 뒤 자살하기 사흘 전에 대전에 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태국에서 도박의 도시 마카오를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던 날에는 태국에 있던 부인과 두딸이 귀국한 당일.
따라서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족부양에 대한 부담감, 주변에 대한 배반감과 함께 심약해진 정신적인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주변은 보고 있다.

그를 잘 아는 이모씨(42)는 “아무리 어렵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가족에게나 주변에게나…”라며 안타까워했다.
유씨가 말했듯 되돌아오는 눈물은 누구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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