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근로자들 저임금·산업재해 고통

″다행히 저의 경우는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큰 사고 없이 일해왔습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차곡차곡 돈도 모을 수 있었고요. 하지만 힘들게 일한 것에 비해 턱없이 적은 임금, 차별적인 시선 등 장밋빛 꿈을 펼치기에는 한국이 아직 먼 나라처럼 느껴집니다.″

지난 23일 오후 2시30분 대전시 서구 관저동 소재 충남방적에서 열린 ′외국인 산업연수생 안전교육′에 참석한 베트남 웬헨년(42)씨의 한숨 섞인 말이다.

한국산업안전공단 대전지도원(원장 이은영)이 충남방적에 근무하고 있는 80여명의 베트남 산업연수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날 안전교육은 한마디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교육장이라 해야 근로자들이 묵는 기숙사 방 한켠이고, 교육은 좁은 방에 근로자 30여명을 옹기종기 앉혀놓고 이론강의와 비디오시청으로 40여분만에 싱겁게 끝났다.
더욱이 12시간 밤샘근무 뒤 한참 달콤한 잠으로 지친 몸을 달래야 하는 근로자들을 끌어내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어로 진행된 강의는 이들에게 얼마나 전달됐을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그나마 안전교육용 비디오테이프는 베트남어로 제작돼서인지 근로자들이 다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외국인 근로자 매년 1,000여명 이상 산업재해 입어

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98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산업재해를 입은 외국인 근로자는 모두 3,585명으로, 이 가운데 130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연도별로는 98년 755명, 99년 715명에서 2000년에는 1,197명으로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으며, 지난해에도 1,000여명이 넘는 외국인근로자들이 크고 작은 산업재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2,200여명의 외국인 산업연수생이 활동하고 있는 대전·충남지역에서도 매년 40-50여건씩의 산업재해가 끊임없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중 제자리를 지킨 산업연수생들은 산재보험을 적용 받아 치료와 함께 약간의 보상금을 손에 쥐지만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이탈한 외국인근로자들의 경우에는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 때문에 전신화상을 입거나 손이 잘리는 중상을 입어도 산재보험 신청 등은 생각도 못한다.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보상은 고사하고 강제추방 당하기 때문이다.

대전외국인노동자와함께하는모임 이기철 실장은 "대다수의 불법 체류 노동자들이 짧은 시간에 좀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장시간 일을 하다 보니 산업재해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며 "불법 체류노동자라는 신분 때문에 치료 및 보상에 미온적이거나 회피하는 사업주에게 제대로 대응조차 못하고 있는 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 78.9% 가 불법 체류자

낯선 한국 땅에서 외국인 산업연수생들이 겪는 어려움은 비단 산업재해 문제만은 아니다.
사업주나 한국 근로자들의 폭행과 체불, 임금 착취를 피해 현장을 이탈하는 등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3월 말 현재 국내에 취업 중인 외국인은 총337,000여명으로 이중 78.9%인 266,000여명이 불법체류자들이다. 특히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입국한 사람은 89,000여명이지만 현재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는 37,000여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52,000여명 정도는 이런저런 이유로 불법체류자 대열로 이탈했다는 얘기다.
13,000여명의 외국인근로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대전·충남지역에서도 실제 산업연수생은 2,000여명밖에 되지 않으며, 대부분이 불법 체류자들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지난 7월 불법체류중인 외국인 노동자를 내년 3월까지 모두 추방하고 현재 80,000명인 외국인 산업연수생 한도를 130,000명으로 늘려 부족한 인력을 채운다는 내용의 외국인력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후진국 외국인들에게 고용의 기회와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해주되, 불법체류자에 대해서는 단속과 강제추방 등 채찍을 강화해 송출비리, 장기체류, 외국인범죄 증가 등 이들로 인한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산업연수생 확대 방안 시민단체, 산업계 강력 반발

◈대전외국인노동자와함께하는모임 대표 김규복 목사.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개선방안에 대해 외국인 노동자 관련 시민단체들과 산업계 모두는 비합리적 방안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외국인력제도 개선방안은 기존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외국인노동자 산업연수생제도를 계속 유지·확대한 것이어서 이 제도가 계속되는 한 인권 침해와 노동자 탄압,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과 정당한 노동권리를 보장하고 국제사회에서의 국가 위상 추락을 막기 위해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고용허가제를 도입하고 산업연수생제도를 즉각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전외국인노동자와함께하는모임 김규복 목사는 "정부의 이번 방침은 불법체류자 문제를 외형적으로만 치료하려는 단편적인 처방"이라며 "산업연수생 제도 및 불법체류자 문제가 야기하는 사회적인 손실과 비용을 감안한다면 이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고용허가제 도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산업계에서도 연수생 한도 확대가 단순한 숫자놀음일 뿐 인력난 해소에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다수 중소기업 경영자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저임금은 현장이탈과 불법 체류를 조장하고 있어 정부 보조 등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없는 비효율적인 산업연수생 확대는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시민단체들의 외국인 근로자 고용허가제 도입주장에 대해서도 경제논리를 무시한 채 인권문제에서만 접근하는 단견적인 시각이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대전제1·2공단 한 업체 관계자는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해 산업연수생을 고용하지만 이들이 현장에 투입돼 일정 수준의 숙련도를 확보하기까지 몇 개월이 걸려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 뒤 "게다가 지난 3월 불법 체류자 자진신고 이후 한푼이라도 더 벌어 가겠다는 심산으로 월급인상을 요구하고 더 많은 월급을 주는 직장으로 옮겨 버리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며 탄식했다.



고령화 대비 정부차원 해결책 내놓아야

이 같은 반발에 부딪히자 정부는 뚜렷한 개선안을 내놓지 못한 채 시민단체와 산업체들의 눈치만 보고 있어 산업연수생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92년 산업연수생 제도가 도입된 후 외국인근로자들은 3D업종 현장에서 열악한 근무환경과 저임금 속에서 우리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인권시비, 불법체류자 양산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시민단체나 산업체에서는 이에 대한 개선안을 내놓고 있지만 인권과 경제논리에 부딪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외국인력 문제를 국내 산업구조의 변화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고령화에 대비한 장기적 노동인력 확보방안과 병행해 검토하는 정부의 진지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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