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염 전염 이유 친구 살해 뒤 자신도 투신

지난 7일 밤 11시50분 경 대전시 서구 가장동 모 아파트 209동 20층 옥상에서 주민 이모씨(44)가 칼에 20여 차례 찔린 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씨를 살해한 최씨는 이 아파트 아래 바닥에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대청댐 수몰지역인 대전시 동구 직동 초등학교 동창생인 두 친구사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으로 언론은 간염 전염 경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어이없는 사건이라고 다뤘다. 시민들도 간염 때문에 친구를 살해한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 사건개요

7일 오후 7시경.
서울 철도공무원으로 격일제 근무를 하고 있는 최씨가 6일 근무를 마친 뒤 귀가를 하지 않고 7일 하루동안 서울 인근에 머무른 뒤 열차를 이용, 7일 오후 대전에 도착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최씨는 오후 7시 이후 이씨가 살고 있는 대전시 중구 가장동 모 아파트 209동 20층에 몇 차례 서성거렸고, 이씨가 귀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이씨와 두세 차례 전화통화를 했다. 이씨와의 통화를 통해 오후 11시경 귀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아파트 주위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후 11시 10분경. 이씨를 만난 최씨는 아파트 옥상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 도중, 11시 30분경 최씨는 준비해 온 흉기로 이씨의 복부 및 전신을 20여 회 찌른 뒤 자신도 아파트 20층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인근 초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아파트 사설 경비업체 직원이 최씨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경찰에 신고했고, 11시 48분경 인근 내동 파출소에서 출동했지만 이씨는 장기 파열과 과다 출혈로, 최씨는 아파트 20층에서 추락한 충격으로 현장에서 사망했다.

경찰은 숨진 최씨의 몸에 있던 수첩에 적혀 있던 10여년 전 술자리를 통해 친구 이씨은 간염이 전염된 것을 비관하고 간염에 대한 심적 불안감을 묘사한 내용과 간염으로 ′너도 죽고 나도 죽게 됐다′는 내용의 유서를 근거로 최씨가 신병을 비관해 이씨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중에 있다.

▲ 이씨의 부인은 살인을 알지 못했나

이씨의 부인 정모씨(34)는 당시 집안에 있었다. 이씨의 집에서 옥상까지 거리는 5m 내외의 짧은 거리. 사건 당시 이씨의 비명 소리가 집안에까지 충분히 들렸을 것이고 빠른 조치를 취했더라면 이씨의 목숨을 건졌을 것이라는 의문이 남는다.

정씨는 ″당시 옥상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고, 남편의 비명소리를 듣고 문을 열려 했지만 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집 현관문에 달려 있는 경비업체 호출 버튼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즉, 남편의 비명소리를 듣고 인터폰을 통해 아파트 경비업체에 알렸지만 경비 업체가 빠른 시간 내에 초동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정씨는 이 아파트 S 경비업체를 대상으로 대전지방 검찰청에 고소를 한 상태다.

▲ 계획된 범행이었나

경찰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사전에 계획된 범행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결정적인 증거는 사건 수 일전 또는 대전으로의 이동 중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최씨의 수첩에 적힌 유서이다.

이 수첩에는 ′10여년 전 술 한잔 한 것이 이렇게 될 줄이야... 소주 2병 마시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간염이 이렇게 무서운 줄이야...′와 같이 간염 걸린 신병 비관과 간염 전염을 친구 이씨와의 술자리 때문으로 단정짓는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간염으로 죽게 됐으니 너도 죽고 나도 죽겠다′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오랜 동안 계속된 간염 전염에 대한 스트레스로 살인을 계획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경기도 파주에 살고 있으며 서울에 직장을 두고 있는 최씨가 7일 오후 7시경 대전 이씨의 아파트 근처에 도착해 4시간 여 동안 인근을 배회하며 이씨가 귀가하기를 기다린 것도 증거로 들고 있다.

이 외에도 수첩에 적힌 내용 중, 이전에도 이씨의 아파트를 방문했었던 점과 이씨와의 전화통화 후 이씨가 귀가할 때까지 기다린 점, 범행에 사용한 칼을 미리 구입한 점 등을 들어 계획된 범행으로 보고 있다.

▲ 살인은 왜 일어났나

경찰은 최씨가 간염 전염을 비관한 것이 살해의 결정적인 이유로 보고 있다.

철도 공무원인 최씨는 지난 90년경 직장 정기검진을 통해 자신이 B형 간염에 전염된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최씨는 간염에 대한 각종 서적을 구입하고 자녀들의 간 보험을 10여 개 가입하는 등 간염에 대한 강박관념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씨 주위의 증언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는 간염 증상으로 병원을 자주 찾았고 타인과의 대화를 피하는 등 간염 전염에 대한 피해의식이 증폭됐다.

또, 직장 생활에서도 매일 아침 운동을 하고 회식자리와 술자리를 일체 피하는 등 건강에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지난 6월 공무원 연금 수혜 여부가 가려지는 장기근속대상자 건강 정기검진이 있어 당시 정신적 압박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에는 최씨의 부인이 경기도 파주 H병원에 ′남편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신경이 날카롭다. 내가 친구에게 술상을 차려 줘 간염에 전염돼 죽게 됐다는 말을 한다. 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고 타인에게 감염 전염을 걱정해 회사에서 식사조차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상담 의뢰를 한 기록도 확인됐다.

▲ 이씨로부터 간염 전염을 단정지은 이유는

직장동료와 친구 등 최씨가 접촉하는 주변 인물 중에 간염 감염자는 이씨 한 명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의중을 잘 드러내지 않는 최씨가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나 직장 모임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임은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위의 증언에 따르면 최씨의 생활 범위에서 이씨 이외의 간염 감염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최씨가 이씨의 간염 감염 여부를 알게 된 시점도 중요하다.
최씨가 자신의 감염 여부를 알게 된 것은 88년 철도공무원 입문 이후인 90년 전후. 당시 미혼 상태로 대전에 살고 있던 이씨와 최씨의 첫 근무지인 회덕에서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

잦은 만남을 통해 이씨가 간염 때문에 사우디에 산업기술자로 나가지 못했던 사실을 최씨에게 이야기했고, 이씨의 간염 전염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최씨는 이씨가 자신에게 전염시킨 것으로 믿게 됐다.

즉, 자신의 간염 전염 여부를 확인한 시점과 이씨가 간염 감염 사실을 밝힌 시점이 1년 내외의 간격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최씨는 자신을 속이고 술자리를 함께 한 이씨에 대한 원망이 깊어진 것이다.

이씨에 대한 원망의 증거는 최씨의 수첩 유서에서 이씨가 결혼 8년이 지나도록 자녀를 낳지 않은 것을 자녀들에게 간염이 전염될까 우려한 행동으로 단정짓고 있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씨와 같이 술자리를 함께 하며 술잔을 돌려 간염이 전염됐다는 것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겠지만 당시 상황을 비춰 볼 때 최씨의 오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

▲ 이씨는 자신을 살해할 것을 알지 못했나

이씨는 최씨의 살해 의도를 파악하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친구들에 따르면 그 동안 고향 친구들과의 계모임에도 두 사람 모두 정기적으로 참여를 했고, 사이가 나빠 보이지 않았다는 증언이다.

또, 사건 당일 최씨가 이씨에게 전화를 걸어 귀가 시간을 물었지만 이씨는 아무 의심 없이 최씨의 전화를 받은 점과 아내에게 ′친구와 함께 옥상에서 술을 마시겠다′고 말한 점을 볼 때 사건의 징후를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옥상으로 나갈 때 옥상 문 자물쇠를 잠갔지만 별다른 의심 없이 20여분간 이야기를 지속한 것을 볼 때 이씨는 최씨의 살해 의도를 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 주위의 반응

이씨의 주변에서는 갑작스런 이씨의 죽음뿐만 아니라 최씨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고향 친구인 김모씨(44)는 ″둘 다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다. 최씨가 친구를 살해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술 마시기를 꺼려했지만 두 사람 모두 간염 전염에 대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의 사촌 형제 이모씨(48)도 ″과거 같은 동네에서 살았고 지금도 모임을 같이 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특별히 사이가 나쁘다는 인상은 보이지 않았다. 살해의 결정적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씨의 주변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최씨의 처남 박모씨(41)는 ″친구를 살해할 만큼 대담한 성격이 아니다. 의중을 잘 드러내 놓지 않는 성격이어서 간염에 대한 고민이 깊은 줄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친구 김모씨(44) 역시 ″친구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두 친구가 간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두 사람은 말수가 적었다. 정기 모임에서도 서로 원만한 관계를 보였다. 우리로서는 이번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살인 사건만 비춰 본다면 이씨를 살해한 최씨가 가해자가 된다. 하지만 최씨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씨에 의해 간염이 전염된 것이 이씨를 살해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이씨의 가족은 졸지에 가족을 잃었고, 최씨의 가족들은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받아야 하는 등 양측 가족들도 모두 피해자가 됐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사망한 이번 사건을 두고 고인의 유족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라며 갖은 추측들을 하고 있다. 질병에 대한 오해와 강박관념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빚어진 이번 사건을 접한 시민들은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은 죽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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