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청소년-교사 가정꾸며 가족애 나눠
 후원 턱없이 부족…정책적인 관심 절실

 그룹홈 ′다윗가정′천안 최초 문열어



올해 여덟살이 된 영주(가명·충남 천안시 백석동)는 얼마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직 엄마의 따스한 품이 마냥 그리울 때. 그러나 영주는 두명의 오빠와 살았다. 엄마는 작년 6월 집을 나갔다. 아빠는 엄마의 가출 이후 부쩍 술을 가까이했다. 아버지는 간혹 종이나 빈병같은 폐품을 모아 팔며 생활비를 벌충했다. 엄마가 집을 나간 뒤로는 그마저 그만 두었다. 간경화를 앓고 있던 영주양의 아버지는 결국 작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충남 사직동 남산 옆 재래식 가옥에는 삼남매만 남았다. 정부에서 생계비가 보조됐지만 생활비로도 빠듯했다. 또래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학원을 다녔지만 남매에게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더 큰 문제는 외로움. 초등학교 5학년과 중학교 3학년 오빠들이 학교에 간 시간, 영주 혼자 집에 남았다. 깊은 외로움은 영주의 정신적 성장을 더디게 했다. 영주에게서 정서불안증세가 엿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새로운 가정에 안착한 영주

최근 삼남매에게는 새 보금자리가 생겼다. 새 보금자리뿐만 아니라 새 가족도 생겼다. 영주는 더 이상 외로움으로 고통받지 않게 됐다.
지난달 23일 천안지역 최초로 문을 연 청소년 그룹홈 ‘다윗가정’.
청소년 그룹홈이란 부모의 이혼과 학대, 가난 등으로 엄마·아빠와 함께 살 수 없는 아이들, 피는 섞여 있지 않지만 아이들의 부모처럼, 아니 부모보다 더 이들의 아픈 상처를 안아주고 어루만져주는 어른들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딘 청소년그룹홈 ‘다윗가정’. 백석동에 15평 남짓한 두 채의 빌라를 마련해 시작됐다. 현재 영주 남매를 비롯해 6명의 청소년이 세 명의 생활교사와 함께 머무르고 있다.

아이들은 교사들과 한 가정을 이루면서 부모와 자식처럼 생활한다. 아침에 일어나 함께 식사를 하고, 일과나 공부를 마치고 나서 저녁에는 모두 한 지붕 아래 모여 재잘거리다 잠이 든다. 매주 화요일에는 가족회의도 갖는다. 토·일요일에는 가족 모두가 역할을 나눠 청소나 빨래도 한다. 따뜻함이 흐르는 여느 가정집과 똑같은 모습이다. 집단적으로 입주해 생활하는 복지시설과는 분위기부터 다르다.

영주의 큰오빠인 영민(16·천안시 백석동)이는 “이제는 마음을 놓게 됐다”고 말한다.
“남매가 살 때는 아침도 못 먹고 학교에 갔죠. 이곳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매일 아침을 먹어요. 학교에 가서도 혼자 남은 영주 때문에 늘 마음이 아팠는데 이제는 걱정 없어요”
영주도 새로 생긴 언니·오빠들이 “너무 좋다”며 밝은 모습이다.

"고아원이 아니에요"

삼남매와 달리 ‘다윗가정’에서 생활하는 다른 세명은 남녀 중학생들로 모두 한 부모 가정의 자녀들이다. 부모가 알코올 중독이거나 경제적인 곤란을 겪으며 정상적인 양육이 어렵게 됐다.
영주 남매는 가족들이 없어 그룹홈 생활을 시작하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한 부모 가정의 자녀들은 순탄치가 않았다.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라는 것이냐?”며 화를 내는 부모들도 있었다.
막무가내로 화부터 내는 이들에게 이경희(43·여·천안시 신방동)씨는 인내를 갖고 그룹홈의 장점과 운영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몇번의 만남이 반복되며 부모들의 닫힌 마음은 점차 열렸고 마침내 동의를 이끌어냈다.

이씨가 청소년 그룹홈 운영을 떠올린 것은 작년 가을. 천안중앙감리교회(담임목사 유영완)에서 운영하는 방과후교실에 참여한 한 청소년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다. 이경희씨는 방과후교실의 운영을 맡고 있었다.
“어머니는 중풍으로 사망하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인 가정의 청소년이었어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가정에서는 사실상 아이에게 관심을 쏟는 사람이 없었죠. 학교도 마찬가지였고요. 아이는 자연스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몇번의 비행도 저질렀지요. 가만있으면 안되겠다 싶었죠. ‘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고민 끝에 청소년 그룹홈에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다른 지역의 청소년그룹홈을 방문해 자료를 수집하는 등 작년 12월부터 그룹홈 운영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공간 확보. 마침 백석동에 제2성전을 짓고 있던 중앙감리교회가 교회 부속건물 두 채를 그룹홈 공간으로 선뜻 내놓았다. 교회 부설 방과후교실에서 활동하던 선생님 두분도 그룹홈의 생활교사로 자청했다.
새로 벽지를 바르고 생활에 필요한 집기와 물품 등을 마련하며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지난달 23일 오후 2시. 청소년그룹홈 ‘다윗가정’은 정식으로 문을 열고 개원식 겸 조촐한 잔치를 가졌다.

내 아이에서 우리 아이로

시작이 반이라지만 ‘다윗가정’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현재는 생활교사가 방과후교실과 그룹홈 모두에 참여, 업무부담이 상당하다. 언제까지 박봉에 높은 책임감만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 장기적으로는 전담생활교사의 확보가 시급하다.
일단 개원은 했지만 물품도 많이 부족하다. 아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컴퓨터도 아직 마련 못했다. 기존 방과후교실 후원자들과 중앙감리교회 내 뜻있는 신자들로 그룹홈 후원회를 결성했지만 보금자리를 지켜가기는 버겁다.

“그룹홈의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공공근로 지원을 통한 인건비나 운영비 보조 등 자치단체의 정책적인 지원과 관심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또한 자원봉사자들의 참여 등 지역자원과 청소년 그룹홈을 연계하는 방안도 적극 찾아볼 생각입니다.”

지역에서 처음으로 청소년 그룹홈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이경희씨는 정작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이씨의 자녀는 초등학교 5학년과 중학교 2학년 자매. “남의 아이들 돌보다가 자기 아이 탈나겠다”는 주위의 걱정도 있다. 그러나 이씨의 생각은 달랐다.

“제 아이에만 관심 쏟는다고 아이가 잘 자랄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먼저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실제 이씨의 아이들은 엄마의 일에 적극 찬성하며 후원한다는 귀띔. 봄꽃이 만개하는 이 계절. 그룹홈 식구들의 마음속에는 저마다 큰 봄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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