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돌뱅이 인생, 책으로 엮어낸 안효숙씨

신탄진 닷새장이 선 지난 28일.
대전 시내에서 50분을 내달려 도착한 신탄진 역 앞에 서서 건너편 농협 앞 보도를 유심히 살핀다. 아니나 다를까. 책 속에 등장하는 옷 할머니와 떡볶이 아줌마의 수레가 보이고, 농협 계단 맨 가장자리에는 그녀의 작은 일터가 보일 듯 말 듯 눈에 들어온다.
◈대전충남 인근 시골 닷새장을 돌며 화장품을 파는 안효숙씨의 일터에는 늘 단골손님들의 반가운 발길이 이어진다.

"아유, 어떻게 오셨어요, 추운데 얼른 들어가요"

따뜻한 커피 한잔하자며 익숙하게 이끄는 곳은 다름 아닌 농협 안쪽 구석의 소파다. 벽 하나 차이지만 한겨울 거리에서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는 그녀만의 쉼터인 듯 했다.

"책 낸 이후로 신문이랑 방송에 몇 번 나가니까 멀리서 찾아오고 많이들 알아 보세요. 너무 잘해주시고.. 정말 저는 복이 많은가봐요. 호호"

마흔 중반에 접어드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풋풋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는 안효숙씨(43)는 유성, 옥천, 금산, 영동 등 대전충남 인근의 시골 5일장을 떠돌며 화장품을 파는 난전장수인 동시에 두 권의 책을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수식어지만 그녀에게서는 시골 장수의 푸근함과 글쓰는 이의 섬세함이 동시에 배어져 나오는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6년 전 IMF때 제가 하던 의류대리점이 파산을 했어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무작정 떠돌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살아야겠다, 어떻게든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을 안 놓게 되더라구요. 그런 마음 하나로 시골 장까지 떠돌게 됐어요"

IMF타격으로 파산..'살아야겠다'일념에 시장 나서

파산보다도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삶의 끈을 놓아버린 남편. 알콜과 폭력으로 얼룩진 그의 삶은 그녀와 두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기거할 곳이 없어지게 되자 아이들은 시골 할머니댁으로, 그녀는 대전으로 나와 여인숙에서 생활하며 포장마차부터 면도기 장사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니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어려서부터 힘들 때 마다 장터에 가면 이상하게 힘이 솟았어요. 어느날인가 우연히 장에 갔다가 '아, 내가 앉아 있을 곳은 여기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차피 떠돌아다닐 바에는 시골장을 다니자, 그리고 여기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야겠다 결심했어요"
◈안효숙씨가 장터거리의 이야기를 담아 펴 낸 두 권의 책. ,/마고북스

도종환 시인의 문하생으로도 있었을 만큼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지라 안 씨는 손님 기다리는 시간에 메모해 두었던 장 풍경을 컴퓨터에 차곡차곡 정리해놓았다가 인터넷을 통해 올리기 시작했다. 누구나 갖고 있을 시골장에 대한 추억을 중년층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처음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천하고 초라한 이야기를 과연 사람들이 귀 기울여 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티즌들이 '손풍금'이라는 그녀의 아이디를 점차 기억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글을 기다리는 팬들까지 생겨났다. 생각지 못했던 답글과 편지들은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고 결국 그녀의 글들은 책이 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지난해 3월 책이 나오자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됐죠. 길에서 알아보고 싸인해 달라는 분도 있고 화장품 장사 해보고 싶다는 분들도 찾아왔어요. 장꾼들은 신문에 난 기사를 오려와서는 TV 나온 사람이니까 이후로 저를 못 볼 거라고들 하셨어요. 두번째 책이 나오니까 이제는 '복도 많다'고 하시데요. 가슴에 담아놓고 쏟아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표현할 수 있고 또 그걸 이길 힘이라도 있지 않느냐는 거였지요. 장터에 나오는 분들은 대개 어려운 환경에 처한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 떠올리면서 '그래, 나는 복두 많다' 하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언론의 관심에 장꾼들 "이제는 저 사람 못 보겠지"
◈푸근한 시골장은 그녀의 삶의 터전이 되어준다.

하지만 장돌뱅이 일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게없이 하는 난전인지라 목 좋은 곳을 차지하려는 장꾼들의 신경전은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고 초보 장수들은 으레 눈치만 보다 맨 끝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말수가 적고 유순한 외모 덕분(?)인지 장사 시작한지 2년 간을 이곳 저곳 떠돌다만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장 끝으로 무조건 갔죠. 말주변이 없고 손님을 끄는 재주가 없어 1년 관찰하니 농협 옆이 가장 손님을 끌 만 하더라고요. 손님을 끌려면 소리도 치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해요.그냥 눈 마주치면 이야기하고‥그래도 그런 걸 오히려 좋아하는 분들도 계시데요(웃음)"

장돌뱅이 3년 차. 이제는 제법 손님도 생겼고 장꾼들이 인정해주는 그녀만의 고정석도 생겼다. 1평 남짓한 공간에 돗자리를 깐 소박한 일터에는 각종 스킨과 로션에서부터 매니큐어와 립스틱, 스프레이 등등 각종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그새 먼지가 날아와 앉을까 늘상 닦고 또 닦는다.

지난 설에는 엄동설한 추위에 화장품들이 깨져버려 그녀를 속상하게 했다. 도매로 가져오는 만큼 반품을 할 수가 없어 병이 상하거나 손님들이 환불해가는 화장품들은 고스란히 손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소중하게 조심조심 다룬다.

고마운 단골손님들 "고생 모를 수 밖에요"

길 한쪽에 물건을 펴놓고 파는 난전 장수들에게 가장 반가운 것은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단골손님. 그녀에게도 잊지 못할 고마운 손님들이 있다.

"금산 장날마다 용인에서 찾아오시는 노부부 두 분이 계셔요. 이분들은 물건을 사고 꼭 천원짜리로만 계산해주시거든요. 어느날 여쭤보니 '많이 주고 싶어서' 그러신다고, 그래서 돈도 일부러 은행에서 바꿔오신다는 거였어요. 옥천장에도 화장품을 사가는 노부부가 계신데 알고 보니 그분 아드님이 대전에서 대형 화장품 가게를 하시더라고요. 그런 분들이 계시니 고생스럽고 힘든 걸 모를 수 밖에요. 호호"

그러고보니 그녀가 입고 있는 오리털 파카와 조그만 손난로도 그녀를 찾아온 이들이 가져온 선물이란다. 영하의 날씨에도 뜨거운 가슴으로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
◈손님들이 선물해 준 점퍼와 손난로가 영하의 날씨도 이길 수 있게 해준다.

여전히 "화장품 사라"고 큰 소리로 떠들지는 못해도 예전보다 매상이 많이 올랐다며 은근한 자랑을 늘어놓는 그녀. 하지만 경기불황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침체된 장터 이야기를 하면서는 금세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장사가 안되면 서로 걱정해요. 나만 장사 잘돼도 민망한 거니까요. 요즘에는 경기가 워낙 안 좋아 다들 비슷하지요. 사실 밥 먹을 때도 눈치 보여요. 혹시 점심값도 못 번 거 아닌가 해서 걱정되죠. 남자분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고요"

아침에 장에 나와 한 차례 물건을 내려놓은 장꾼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장작불을 피우고 몸을 녹인다. 풍경만 바뀔 뿐이지 장이 서는 곳을 따라 함께 떠도는 이들은 늘 같은 자리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보며 서로의 삶을 달래고 또 위로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대전 송촌동 집에서 고등학생, 중학생 아들딸을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안씨는 대전충남북 일대 5일장을 따라 도는데 대개 1일과 6일은 공주장, 3,8일은 신탄진장, 4,9 일은 영동장 이런 식이다. 5일마다 한번씩 만나는 이들이지만 비가오면 오는대로 눈이 날리면 날리는 대로 언제나 반갑고 궁금한 사람들이다.

"요즘 어려움을 극복 못하고 귀한 목숨 내놓는 분들이 많지요. 그런데 아무리 대책없고 막막한 상황이라도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길이 보이데요.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 사람들 틈으로 기어서라도 가라고 하고 싶어요. 사람사는 세상인데 반드시 길이 있어요. 나도 처음엔 피했었지만 내 인생은 내가 헤쳐나가야 하잖아요. 최선을 다하면 아마 무언가가 보일거예요"

안씨는 최근 난장을 그만 두고 화장품 가게를 내보라는 권유를 종종 받는다. 춥고 더운 거리를 묵묵히 지키는 그녀의 삶이 안타까운 이들의 목소리다. 하지만 안씨에게 있어 그 말은 더 이상의 희망사항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장터거리의 삶이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삶의 이유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좀 더 형편이 나아진다면 좀 더 깊은 시골로 찾아다니는 계속 장꾼으로 남고 싶어요. 어머니 세대에 아직까지 남은 인정 같은 것을 더 느끼고 싶고요. 몸 불편해 읍내까지 못 나오는 분들을 위해 방물장수처럼 찾아다니고 싶네요. 저는 이게 좋아요. 행복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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