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 아카데미, 조감독 역할에 큰 도움

1971년 8월 23일. 서울시 대방동 유한양행 빌딩 앞에 인천시내버스를 타고 나타난 군인들이 군경합동진압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국은 이들을 '무장공비'라고 했다가 다음날은 '군 특수범들의 난동사건'으로 정정한다.
정부는 왜 그들을 거듭 부정했을까. 또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탈출해야만 했을까.

" 영화는 역사적 사실의 전달입니다. 우리 어릴 적에,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이 나라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점, 기교나 꾸밈없이 정직하게 사실을 보여주고 전달하자. 대신 영화적으로 약간의 포장만 하자라고 뜻을 모았습니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영화에서 표현하지 않은 더 놀랄만한 일도 많이 있었지만 그런 개개의 사건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체의 사실이 중요한 거니까요"

영화 (감독 강우석)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심혁 씨(32)의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역사적 사실의 전달'을 바탕으로 '실미도 부대'라는 뜨거운 감자를 영화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이슈로 이끌어내며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숨겨진 진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한국영화사상 최단기간에 전국 5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새로운 한국영화의 역사를 썼다는 평을 받았다.

대전서 학창생활, 한남대 법학도 출신

소위 '흥행대박'을 터뜨린 영화 저편에는 수백 명의 스텝들이 있었고 심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영화 와 , 연출부를 거친 그는 대전시 도시건설주택국장을 지낸 심영창씨(58.현 대전도시개발공사 개발이사)의 장남이기도 하다.
◈심혁 조감독.

"인터넷에 연출부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올랐더군요. 그 때 서류심사하고 면접 봤는데 100대 1의 경쟁률을 뚫었죠. 그것이 인연이 돼 이번 작품도 하게 됐고, 올 여름 촬영할 에도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서산에서 태어난 심 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심영창씨가 당시 대전시 대덕군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대전으로 이사, 유천초등학교와 북중학교, 서대전 고등학교를 거쳐 한남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어릴 적 반장,부반장에 1,2등을 다퉜으니 지금도 옛 친구들을 만나면 심씨가 영화인이 된 것은 '굉장한 사건'으로 통한다.

심씨는 스스로도 어렸을 적부터 약간은 '끼'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오락부장 수준은 아니었지만 학교행사 때면 단골출연했고 고등학생 시절에는 당시 잘 나가는 청소년 프로그램 '비바청춘'에, 대학 땐 부모님 몰래 강변가요제에 나가는 등 은근한 충청도식 '끼'는 여기저기서 통통 튀었다.

"제대 후 법학을 제대로 하자고 3년 결심으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3년 뒤, 대전에 박철수필름영화아카데미가 생긴 거예요. 정말 우연한 계기로 그 곳에 다니게 됐죠. 관심이 있는 분야니까 어떤 건지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그러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하는 단편영화시나리오에 공모를 했는데 덜컥 당선이 된 겁니다. 600만원의 촬영 지원금이 나오고... 슬슬 재미가 있더라구요"

단편영화 시나리오 공모 당선 계기 영화판 뛰어들어

어릴 적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탓에 TV와 책은 그의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다. 극장이나 공연도 단체관람 외에는 자주 갈 수도 없었고 TV도 '밤에는 시청금지'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유일하게 허락했던 것이 TV 와 이었고 그 시절 마카로니 웨스턴이나 홍콩 무협물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아버지가 미래를 예견하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고.
◈영화 의 한 장면.

하지만 으례 그렇듯 '영화판에 뛰어드는' 것에 대한 부모님의 반대가 있을 법 했다. 더구나 그는 영화와는 그닥 상관없어 보이는 법학을 전공한데다 오랜 공직생활을 지낸 50대 아버지의 장남이라는 '방해'요소들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반대는 안 하셨어요. 전공도 다르고 아버님이 공직에 계셨으니 반대가 심하셨을 법도 한데 저를 믿어주셨죠. 장남이고 별 말썽없이 자라서 그런지 크게 간섭을 하지 않고 지원을 많이 해주셨죠. 고등학생 시절 통기타 동아리 공연에 꼭 와서 보실 정도였어요. 영화일 시작할 때도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는 거니까 열심히 한 번 해봐라' 그러시데요. 멋지지 않습니까? (웃음)"

대개 우리나라의 아버지들이 그렇듯 아랫목의 뜨끈한 숭늉같은 은근한 부정(父情)은 아들의 진로선택에 있어 소리없는 응원이 돼 주었고 결국 영화인을 갈망하던 심씨의 꿈을 이루게 해줬다.

"혁아, 실미도 500만 넘었다더라"

"사실 어렸을 적에는 아버님와 대화가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원래 좀 무뚝뚝하셔서 말씀도 길게 안하시고요. 또 술을 못하시니 여느 아버지들처럼 취기에 자녀들 집합시켜놓고 한참동안 훈계하시는 일도 없구요.(웃음) 그런데, 마음으로 전해지는 거 있잖아요. 말씀을 안하셔도 느껴지는.. 그냥 한마디 툭 던지시는 말, "실미도 500만 넘었다더라..." 친근하고 살갑지는 않지만 뭐 어떻습니까. 믿음이 있고 우리 아버님인데...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영화. 박철수 아카데미에서의 1년은 그에게 잊지 못할 시간이다.

"박철수 감독님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분의 열정과 노력은 정말 20대 젊은이들 못지 않았어요. 영화를 처음 시작하는 저에게는 많은 자극이 되었죠. 자주 찾아뵙진 못하지만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다. 한국영화의 '마이더스의 손'이라 불리는 강우석 감독과 작업을 한다는 것은 병아리 조감독에게는 큰 자부심과 함께 목표의식을 갖게 하는 구심점이다. 처음 강 감독을 만나게 된 것은 지난해 개봉해 역시 흥행대박을 터뜨렸던 촬영. 강 감독이 영화 이후 3년 만에 메가폰을 잡을 때였다.

소리없이 믿어준 아버지 "존경하지요"

실미도에서 그의 역할은 말 그대로 감독을 돕는 일들이었다. 촬영 시작전 감독과 촬영할 장면들을 정리하고 장비세팅 및 배우 리허설을 도맡는다. 또 촬영이 완료되면 편집실에서 순서편집 및 가편집을 하고 녹음을 한다. 현상이 완성되면 영화가 프린트로 나오게 되는데 이런 전 과정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진행하는 게 그의 몫이었다.

"지난해 3월부터 촬영장소 헌팅과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해 그 뒤 6개월 동안은 좋은 장소를 찾느라 서해와 남해에 있는 무인도를 60여 곳 이상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시나리오 작가와 아예 합숙을 하며 20개가 넘는 의 시나리오를 만들기도 했고요. 보다 박진감 넘치는 화면과 스펙터클한 영상을 위해 1000명이 넘는 배우들의 프로필을 검토하고 400명 배우들과 미팅을 했죠"

영화가 이미 개봉된 지 보름이 넘었지만 아직도 지난해를 떠올리면 언제 시간이 갔나 싶을만큼 생생하게 다가온다.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열정과 고집이 그보다는 한 수 위였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작품을 끝내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법. 그 역시 마찬가지지다. 그래도 '아쉬움의 정도가 가장 적은 영화인 것은 틀림없다'는 말로 를 평가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신경썼으면,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지요. 역시 마찬가지지만 아쉬움의 정도가 가장 적은 영화인 건 틀림없겠죠. 돈이나 시간, 인력, 장비‥모든 게 여타 작품보다 두 배 이상 투자된 영화입니다. 그만큼 저도 두 배 이상의 노력을 했구요. 100%만족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해야겠죠"

"따뜻하고 푸근한 이야기 스크린에 담는 것이 꿈"
◈"따뜻하고 푸근한 얘기를 담는 감독이 되고싶다"는 심 조감독

이제 그의 인생에서 '영화'를 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영화와의 사랑에 푹 빠져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일인만큼 그는 일을 즐기기 위한 노력에 힘을 쏟는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제는 영화인의 입장이 된 만큼 무언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어느 순간 영화를 보면 단순히 감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을 하고 해석을 하게 되더군요. 그러다보니 영화 보는게 재미가 없어져요. 하지만 보는게 재미없으면 만드는 것도 재미없어지거든요. 그래서 늘 '즐기면서 일하자'는 것이 제 생활 신조가 됐어요"

그는 조감독의 위치에서 한 두 편 정도 영화작업을 더 하고 싶다고 말한다. 물론 좋은 영화를 찍는 감독이 되는 것은 가장 큰 꿈이다. 심씨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드라마 장르를 엮어 따뜻하고 푸근한 우리네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아보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다.

그러한 그의 그림 안에서 '대전'은 하얀 도화지로 새겨져있다. 신도시와 구도시의 모습을 동시에 갖고 있고, 엑스포공원과 카이스트 등 특수촬영에 응용할 장소들도 풍부하고 서울에서 거리가 가깝다는 많은 장점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전 영상원의 역할에 대한 기대도 빼놓지 않았다.

"사람 사는 이야기, 진솔한 삶의 이야기.. 무슨 영화를 찍든 제가 가지고 가고 싶은 화두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즐겁게 도전할 겁니다. 물론 감독이 되면 대전으로 촬영하러 올 거구요, 거리를 지나시다가 영화촬영현장을 보시면 반갑게 맞아주세요"

새해, 그의 도전이 아름답다.

심혁 조감독 손전화 011-451-6870
심영창 이사 손전화 011-458-1767

[실미도 사건]

1968년 북한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북한군 124군부대를 남파한 ‘1·21 사태’가 발생하자 정부는 똑같은 방식으로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기 위해 31명으로 북파공작대를 구성, 인천 앞 바다 실미도에서 훈련시켰다. 하지만 북파 계획이 취소되고 대우마저 열악해지자 훈련 과정에서 숨진 7명을 제외한 24명이 1971년 8월 23일 실미도를 탈출했다. 이들은 버스를 탈취해 서울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했으나 수류탄 폭파로 19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4명이 체포돼 모두 사형됐다.

[실미도 사건 일지]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정각 - 24명의 훈련병 탈출 행동 개시
6시 15분 실미도공군부대간 통신두절. 24명의 기간병 중 6명만이 생존. 교육대장 김순응 준위 외 12명 사살, 6명 익사. 총 18명 기간병 희생.
낮 12시 20분 탈출 훈련병 24인 인천 독배부리 해안 상륙
12시 53분 첫번째 버스탈취, 서울로 향하다 인천 송도역 삼거리, 대기중이던 육군 24명과 총격전 2명 중상
13시 10분 1차교전 - 인천 옥련고개
13시 20분 두번째 버스탈취, 인천 주안사거리 - 간석동고개
13시 30분 인천 소사 삼거리 경찰관 사살
13시 38분 인천 신양촌 검문소 경찰관 사살
14시 15분 서울 진입,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버스운전사 탈출
14시 25분 마지막 교전,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
"확실히 안에서 먼저 쏘진 않았다. 밖에서 먼저 쐈다" -사건당시 버스승객 증언 일부 수류탄 자폭, 4명 생존
8월 25일 정래혁 국방장관 경질
1972년 3월 10일 오전 10시경, 4명의 생존자 사형 집행
1972년 7월 4일 남북 7.4 공동성명 합의, 평화통일 협약, 남북 무장도발 금지 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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