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문화행사장 등 돌며 작품 나눠줘

◈20년째 전통서화를 그리고 있는 김만석씨.

도심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로는 대개 토정비결 노인, 엿 뽑기 좌판, 솜사탕 장수 등이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공원을 찾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곤 한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오색 무지개 빛이 알록달록 한 전통 서화(그림글씨)다.

가화만사성, 인자무적, 유비무환 등 고사성어나 가훈, 이름 등을 꽃이나 새, 나무 등을 이용해 한 폭의 그림으로 새로이 창조해 내는 서화작업에는 행인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숨어있다. 이러한 서화를 20년째 그리는 김만석(52·대전시 서구 도마동)씨를 우연히 만난 곳은 어느 장애인협회의 연말송년회 행사장이었다.

"어머어머, 어쩜..." "우와, 예쁘다" "햐∼거참 신기허네"
복도에 모인 사람들은 행사가 이미 시작됐는데도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무언가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몇 겹 둘러싼 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하얀 종이 위에 무지개 빛이 선명한 글씨들이 하나하나 수놓아지고 있다.

빨강, 노랑, 초록, 검정 특수 물감이 고루 묻은 붓끝이 쓱쓱 움직일 때마다 나비가 날고 종달새가 노래하고 용이 꿈틀거린다. 여기에 김씨의 호인 '巨木' 낙관을 찍으면 작품완성. 제대로 놓고 보니 그림 속에 '유비무환'이란 글씨가 숨어있다.
◈서화를 그리는 내내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약간 오도방정을 떨어줘야 작품이 예술적으로 나오거든요. 껄껄" "와하하하"
붓을 잡은 김만석씨의 지휘자같은 손놀림을 숨죽이고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김씨의 너스레에 한바탕 폭소를 터뜨린다. 걸쭉하고 구수한 입담 역시 김씨만의 팬 서비스다.

"가화만사성 하나 쓰는데 얼마예요?" "오늘은 돈 받지 않습니다. 좋은 일 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제 마음의 선물이에요"
그림값을 묻는 어느 자원봉사 주부에게 환한 얼굴로 답하고는 금세 난초와 매화가 화사한 서화 한 폭을 내어주니 그림을 받아든 그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핀다.
"선생님, 제 이름으로 하나 써주세요" "저는 타산지석으로 할래요, 선생님"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주문에 행사장은 금세 왁자지껄해지고 김만석씨는 어느새 '선생님'이 되어버린다.

"서화를 배우려는 발길 줄어 아쉬움"

김씨가 그리는 서화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다. 대개 김(金)씨 성을 가진 사람에는 금강산을, 용(龍)자가 들어가는 이름에는 용을 그려 넣는 식이지만 어느 것 하나 똑같은 작품이 없다. 또한 나름대로 한자를 풀이해 보다 좋은 의미를 둘 수 있는 그림들로 서화를 꾸며준다고. 그러면 그림을 받아들고 가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서화를 배우려는 발길이 줄어 아쉽다는 김만석씨.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언젠가 터미널 앞에서 우연히 서화 작업을 보고는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전남 장성이 고향인 김씨는 결혼을 하면서 대전으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서화공부를 시작했다. 서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신혼집에까지 '스승'을 데려와 함께 살 정도로 서화에 열정이 남달랐다. 과거에 비해 서화를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다소 아쉽지만 그래서 더욱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열심이다.

"저는 전국구라서 안 가는데 없어요. 각 지역 문화행사에도 가고 관광지나 바자회 등에도 쫓아다니고요. 그저 철따라 행사따라 다니는 팔도 떠돌이 풍운아죠 뭐. 허허허"
자연스러운 백발에 주홍빛 생활한복 차림이 썩 어울리는 김만석씨는 평상시에는 갓을 쓴 도포차림으로 전국 행사장을 누빈다. 종이서화는 5천원, 실크 천은 1만원, 서화 액자는 3만원을 받지만 장애인이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하는 행사장을 찾게 될 때면 무료로 그려 선물한다.

"비록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작은 것이지만 그림을 받고서 기뻐하는 얼굴을 보면 그만큼 흐뭇한 것도 없죠. 아마 앞으로도 계속 할 것 같아요"
대학 새내기 딸(20)과 고등학생 아들(18) 남매를 두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김만석씨. 연말 연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해 주는 이 시대 마지막 '풍운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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