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간 대전지법서 근무 ′자칭 향판′

◈대전 지방법원 윤병구 부장판사.
법조인을 만나면 먼저 생각나는 건 춘추전국시대 한비자(韓非子)이다. 한비자는 서양의 권모술수 원조인 마키아벨리와 대비되는 동양인으로 인간관리학의 창도자로 불리우고 있다. 전통적인 인의(仁義)와 도덕, 즉 유가사상을 멀리하면서 그가 내세운 것은 법치(法治)였다. 인간은 본성이 악(惡)해서 이욕(利慾)에 따라서 움직이다보니 상(賞)을 좋아하고 벌(罰)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법으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동문수학하던 이사(李斯)의 농간에 생을 마쳤지만 그는 어쨌든 동양사상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법조인이라는 직업도 엄밀히 따지면 한비자의 이론을 실행하면서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분야다. 대전지법 공주지원장으로 있는 신동윤 판사를 한차례 인터뷰를 하면서 어렴풋이 나마 '아! 법관이라는 직업이 이렇구나.'하는 걸 느꼈다. 좀 더 그들만의 세계를 알고 싶었고 또 이들이 앞으로 대전지역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윤병구 판사를 취재 인물로 선정했다. 사회 정의를 확립하고 판단에 원칙을 세우는 게 결국 그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선정에 크게 작용했다.

대전지법 윤병구 부장판사(44) 얘기는 여러 지인(知人)으로부터 들었다. 충청도 사람으로서 대전지법에만 오랫동안 근무한 이른바 향판(鄕判)이며 배울 점이 많다는 게 주변의 얘기였다. '훌륭하다'는 표현은 조금은 거북하게 들리지만 어째든 40대 중반나이에 배울 점이 많다는 평가는 50대 이후의 훌륭하다는 걸 전제하는 말과 같다. 두 차례 인터뷰 신청을 한 끝에 겨우 승낙을 얻어낼 수 있었다. 약간명의 동문(同門)을 동원, 압력(?)을 행사한 건 거래의 성사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어렵게 살아온 과거도 있고 다시 또 저를 취재해야겠다는 말에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조직에서 성공여부보다 한 인간으로서 나름대로 옳다고 여긴 것에 맞게 인생을 살아왔다는 게 인터뷰에 응한 이유입니다.″

대전시 서구 둔산동 법원 청사 8층 사무실에서 만난 윤부장은 취재를 처음에 허락하지 않았던 걸 조금은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대전언론문화연구원 김귀덕 이사장 얘기라던가 고등학교 1년 선배인 국민일보 정재학부장 근황도 첫 대면에 어색함을 깨기 위한 애들립이 되었다. 법조계 선배인 신동윤 공주지원장에게도 조언을 구했다는 말끝에 "그러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며 마음을 정했다고 말했다. '참으로 신중한 분이구나'하는 게 첫 인상이었다. '판사가 신중하지 않으면 그것도 문제죠' 라는 농담과 함께 취재는 시작되었다.

″성공보다 인생 역정 취재해달라″

″대전에는 친구들도 많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업무를 떠나 친구들과 교류를 하지 않으면 답답합니다. 친하기 때문에 저녁에 만나도 부담이 전혀 없지요.″

산림청에 근무하는 남성현, 대전시립미술관장 박일호, 영화회계법인 문봉국, 김영호씨 등의 이름을 대면서 대전과의 연고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직인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성공한 인물로 다뤄달라는 말을 재차 당부했다.
윤부장은 1983년 대전지법 판사로 부임한 이래 줄곧 대전에서만 근무했다. 85년에 강경지원에 약 2년 동안 잠시 적을 두긴 했으나 크게 보면 대전지법에서 직장생활을 한 셈이다. 그래서 향판(鄕判)이라는 말이 낯설지가 않았다.

″향판이라고 보아야지요. 여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오래 살다보니 친구들 또한 많아 고향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24년을 살았으니 한곳에서 가장 많이 살아온 곳이라고 보면 되지요.″

말끝에 필자가 금산에 잠시 살았던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대전은 서울에 비해 정이 있는 곳이라며 도시사람이 시골보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말을 더했다. 미리 말하지만 윤부장에 대한 느낌은 찬찬하면서 굉장히 신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말을 정말 아끼면서 방금 전에 한 말이라도 의미 전달이 미흡했다는 판단이 들면 즉시 고쳐나갔다. 그것은 인터뷰 틈틈이 계속되었다.

″중예리가 고향입니다. 삽교천 제방 너머에 마을이 있었지요. 어렸을 적에는 장마철이 되면 제방에 물이 넘어 침수되면서 피농한 적도 있었답니다. 지금도 비가 많이 오면 괜히 걱정이 됩니다. 아마 어릴 적 기억 때문일 겁니다.″

'피농'(被農)이란 말이 정겹다. 삽교천 제방 뒤편, 지리용어로 말하면 배후습지에 형성된 마을에 살았던 모양이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중예리가 태어난 곳이다. 그가 공부에 인생을 건 이유는 신체적인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너무 어렸을 적 일이라 기억은 불가능했다. 다만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이 내력의 전부다. 3살 때였다. 고열이 나고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나서 아픔은 가셨지만 더 큰 흔적이 남았다. 왼쪽 다리에 소아마비가 걸려 불구가 된 것이다.

세 살 때 소아마비로 장애

◈아내 정정심과 함께.
″그 때부터 부모님의 마음 고생이 심했습니다. 시골에서 중요한 건 노동력인데 여러 가지로 부모님이 신경을 많이 쓰셨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몸이 불편하니까 공부를 해서 제자리를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조림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역시 근동에 있는 신암중에 입학했다. 중예리에서 중학교까지는 약 4Km. 다른 학생들은 40분이면 도착하지만 윤부장은 50분 이상이 걸렸다. 일요일에도 학교에 가서 공부를 했다. 집중력때문이었다. 시골이라 일손이 달리는 농번기에 공부한답시고 방에 있는 것도 보기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집안은 그렇게 넉넉지 않은 중농(中農)정도였다.

″할아버지께서 지금으로 말하면 하천부지 점용허가를 얻어 농사를 지을 만큼 부지런했습니다. 그 덕에 끼니는 굶지 않고 살았지만 장마 때면 걱정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금만 비가 많이 오면 강물이 하천부지로 넘쳐 한해농사를 망치기 십상이었지요.″

신암중에서 성적은 대전고를 입학하면서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당시 집안이 넉넉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아들의 유학을 적극 권했다. 자식 교육을 위해 빚까지 질 정도였으니 시골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어머니였다.

고교 3학년 생활은 그저 공부만 하면서 평범하게 지냈다. 몸도 불편한 탓도 있었으나 공부이외는 달리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성적도 좋았다. 10등 내외로 할 정도였다. 서울대를 지원했으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운명이란 건 큰 일을 두고 징크스 같은 게 작용하는 가봅니다. 3학년 말 11월 총정리에 들어갈 즈음 하숙집에서 연탄가스를 마셨습니다. 친구와 함께였는데 성모병원에 입원해서 산소통에 들어갈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그것 때문에 1차에 실패한 건 아니지만...″

재수를 할 형편도 못 되었다. 그리고 할 생각도 없었다. 내 인생을 '나'를 중심으로 보면 1년은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게 그의 계산이었고 전공분야에 1년 더 투입하는 게 의미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선택이었다. 한양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고3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고비 넘겨


여기서 윤부장은 '둔마(鈍馬), 명마(名馬)론'을 얘기했다. 사람이 하는 일에 노력하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울대에 들어가면 세상은 기본적으로 역량이 있는 것으로 인정해준다. 하지만 자신은 열심히 공부해서 따라갔을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장거리 레이스입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 둔마가 명마로 될 수 있고 반대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꾸준히 노력하면 그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공부도 그렇습니다. 반짝 공부는 반짝하는 순간에 잊어버리지요. 둔한 말이라도 갈고 닦고 연습시키면 명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둔마 쪽에 속하지요.″

대학은 1학년 때는 조금 쉬었고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법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3학년에 1차, 4학년에 2차를 단숨에 합격해버렸다. 스스로 '둔마'라는 표현이 맞지 않는 듯했다. 서울대 합격하지 못한 울분을 재학 중 사법시험 합격으로 풀어버린 듯하다. 그러니 그 흔했던 학생운동 한번 해보지 못하고 졸업을 했다.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제 몸으로 거기에 뛰어든다는 건 다른 분들에게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요. 실제로 그런 의식도 학생 때는 그렇게 절박하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어요. 또, 어려운 가정 형편에 대학을 보내준 부모님의 기대도 있었고요. 그걸 외면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사법연수원은 4학년 재학 중이었던 9월부터 예정되었으나 윤부장은 졸업한 이듬해에 연수에 들어갔다. 그 때가 가장 여유 있었던 시절이었다는 게 그의 회고였다. 이것저것 하고싶은 일을 그 공백동안 많이 해보았다.

윤부장은 체념과 포기를 자신의 신체적인 핸디캡과 대비시켜 설명을 했다. 이를테면 체념은 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포기는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라는 말이었다. 그가 말한 장거리 레이스인 인생을 가면서 체념은 앞으로 계속 나가는 것이고 포기는 그 자리에 서버리는 것으로 요약해서 정리했다. 자신은 체념을 하고 현실로 인정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체념과 포기는 내용에서 판이한 것″

◈가족과 함께.
″그것 때문에 좌절이나 비관을 한 적은 없어요.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 불편을 느끼고 일찌감치 체념을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고유한 운명이 있는 것입니다. 환경이 좋은 곳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는 집안에서 날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그걸 비관하면 살수는 없는 일이지요. 빨리 현실로 받아들이는 게 좋죠. 하지만 건강한 사람을 보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결혼은 동료였던 정정심씨(44)와 했다. 사법연수를 받던 해인 1982년이었다. 학교에서 연애를 했고 그것이 백년가약으로 이어졌다. 결혼 이유야 '사랑'이었겠지만 행여 애절한 러브스토리가 있을까해서 좀 더 물었더니 '그 정도로 써달라'며 화제를 돌려버렸다. 둘 사이에는 대학에 재학 중인 지헌군(19)과 정헌군(16)이 있다.

83년에 대전지법 판사로 부임한 이래 19년 동안 대전 주변에서만 법관생활을 했다. 법조인으로서 6.29 선언이후 실정법을 위반하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하려는 학생들과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재판이 상당히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큰 사건보다 85년 강경지원에서 소액 재판을 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소액재판은 70대 할아버지와 젊은 사람 사이에 소송으로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할아버지 쪽 승소를 결정했더니 확정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명판결을 받았다'고 입소문을 내어 흐뭇했다는 기억을 갖고 있었다.

″법이 추구하는 기본은 법적인 안정성과 구체적인 타당성입니다. 전자는 법 이론에 얼마나 충실하느냐 하는 문제이고 후자는 법 이론에 다소간 덜 맞더라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가는 게 좋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적인 해석과 현실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는 얘기로 들렸다. 윤부장은 언론과도 상당한 인연을 맺고 있다. 2000년 9월부터 대전지역 언론중재위원회 중재부장을 맡아 언론보도를 인해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누구보다도 언론사를 많이 이해하고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대전지방법원 직원들과 함께한 산행.


″기사 작성시 반드시 상대방 의견 들어야″

″과거에 비해 기자들이 확인을 한 후에 기사를 작성하는 예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이지요. 개인적으로 자신이 없을 때는 저에게 전화로 법적인 문제 여부를 물어오는 기자들도 있고요. 하지만 여전히 일부 군 단위 신문에서는 취재과정에서 확인을 하지 않아 중재가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반론보도도 결국 기사로 피해를 보았다고 하는 측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인 만큼 취재 시 반드시 반대측 입장도 확인해주었으면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할말이 많은 듯했다.

″기사에 관계된 이해 당사자에게 취재한 사실을 반드시 확인하고 그 사람의 주장도 실어줘야 합니다. 반론보도 청구권도 결국 그것 때문에 있는 게 아닙니까. 기사를 쓰다보면 취재에 응하지 않아 감정이 앞 설 수도 있는 데 얘기하기 싫은 사람을 끌어내는 것도 기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신문이 독자적인 역할을 많이 해주어야 하고 독특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그는 디트뉴스24도 그런 쪽을 강화하기 위해 생긴 걸로 알고있다며 인터넷 신문과 오프라인 신문의 차이점을 나름대로 정리, 설명했다.

인터뷰를 마무리 할 즈음 생활신조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모든 일에 성심 성의껏 임하는 것입니다. 가끔 짜증나고 피곤할 때도 있지만 일반적인 생각이 그렇습니다. 또 남한테 관대하고 자신에게 철저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계획도 물었다.

″세상일이란 의지대로 되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할 성질의 답변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법관생활을 충실히 하고 싶습니다.″

윤부장은 친구들과 술자리는 잘 어울리지만 주량은 변변치 못했다. 소주 반병정도면 취한다. 시간이 나면 독서로 보낸다. 요즘 읽은 책 중 기억나는 건 시인 유용주가 쓴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는 산문집이다. 한잔 마신 후 얼큰해지면 노래방에 들러 '뽕짝'으로 스트레스를 털어 내어버린다. 대담을 마친 후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나서 승강기 입구까지 마중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모레는 출장을 가야하니 필요한 사진은 여직원에게 맡겨 놓겠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성탄절인 다음날 윤부장은 사진을 사무실에 두고 왔으니 찾아서 쓰고 기사 작성 도중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문의하라며 휴대전화 번호를 남겼다.

연락처 : (042)470-1533, 016-382-3173


″원칙·소신 지닌 법조계 의인″

 내가 본 윤병구 - 박일호 대전시립미술관장


◈박일호 대전시립미술관장.
윤부장(술자리를 빼곤 서로 '박관장, 윤부장'이라 부른다)과는 고등학교 3년을 같이 다녔지만 함께 만든 에피소드에 관한 기억은 없다. 아마도 윤부장은 착실하고 내성적이었던데 반해, 나는 바쁘고 시끄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노는 물(?)이 서로 달랐기에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97년 충남대학교에 왔을 때만 해도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시립미술관장 일을 맡으면서 가까워졌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자주 만날 수 있었고, 마음이 통했다.
윤부장은 더도 덜도 아닌 '판사' 그 자체다. 원칙과 소신이 뚜렷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뜻을 굽히지 않는 의인의 기질을 갖고 있다. 그런 그가 나는 좋고, 배짱이 맞아서 오래 전부터 사귀어온 친구처럼 가슴속에 묻어 둔 이야기까지도 서로 말하는 사이가 되었다.
다만 일상사에서도 그런 것이 융통성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간혹 한다. 그러면 오히려 내가 그렇다고 말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윤부장이 더 그런 것 같다. 요즘처럼 소신없이 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세태가 만연한 때에 보기 드문 청량제와 같은 사람이다.
가끔 우리 사회에서 바르게 지탱되고 모든 이들이 신뢰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면 법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바로 법원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진정 건강한 사회'를 가꿔나가는데 많은 이들의 생각이 일치한다면, 아마도 윤부장과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회에 그는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 곁눈을 주지 않고 자기가 해야할 일, 자기가 가야할 길을 묵묵히 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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