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걸어온 길 복합영상관 등장으로 접어

◈대전 마지막 극장화공 최응신씨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세월은 변하기 마련이다. 비록 우리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급속한 속도는 아닐지라도 지금 서 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변화를 거듭한다. 이런 변화들 속에서 자신의 45년 외길 인생을 접어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과거를 돌이키는 일은 어쩌면 회한으로 남을 일일지도 모른다.

45년간 극장 간판을 그렸던 화공 최응신(62·대전시 중구 가오동)씨는 정확히 1년 전 붓을 놓았다.
2년전부터 예닐곱개의 영화를 골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쇼핑과 즐길 거리가 다양한 멀티플렉스라 불리는 아파트형(?) 극장들이 속속 생겨나며 대전역 부근 극장들은 손님을 모두 빼앗겨 버렸다. 최씨 역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44년 지켜온 자리를 1년만에 빼앗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그는 아직도 극장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대대적인 보수공사까지 하며 재기의 움직임을 보였지만 경영난으로 또 다시 문을 닫고 만 중앙극장 앞에서 노점 시계점을 운영하고 있다. 중앙 극장은 서울에서 내려 온 뒤 20여년 간 그림을 그려온 곳이기도 하다.

극장을 대표하는 ′간판′자리에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앙상한 철골조만 남아 있고 대신 대형 포스터와 간판 크기에 버금가는 빛 바랜 실사 염색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그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자리하고 있다.
또 맞은편 성인 전용 극장에는 반쯤 등을 드러낸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빛 바랜 간판이 파랗게 질린 채 걸려 있었다.

″저것도 1년 전에는 총천연색이었을 텐데...″

최씨는 시계 수리를 멈추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기자의 방문이 내심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실컷 그림 그리고 싶어 극장 찾아

″뭐 특별한 게 있어 취재를 한다고 그러나... 그냥 내가 좋아 시작한 일인데 이제 할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지″

괜히 예전의 기억을 돌리기 싫다는 투였다. ′특별할 것이 없다. 오래된 얘기라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말로 과거의 기억을 상기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최씨는 스스로 ′왕년의 스타′로 부를 정도로 유명세를 탔던 인물이기도 하다. 3년전까지만 해도 40여년간 극장 간판 화공의 외길을 걸어온 이력은 신문과 방송의 매력적인 소재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조폭 마누라′간판을 신도극장에 마지막으로 걸고 붓을 내려놓았지만 극장 앞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끈이 그를 극장 간판 앞으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최씨 손가락의 굳은살은 훈장이나 마찬가지다.
″매일 그림 그릴 수 있는 직업을 찾으려고 고등학교도 그만두며 17살에 극장에 출퇴근을 했지. 학교 다닐 때 그림 잘 그린다고 유명했었거든. 대회 나가서 상도 많이 타고... 돈도 벌고 그림도 실컷 그릴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지금은 그림이 징그럽게 싫지만″

최씨가 처음 붓을 잡은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였다. 서울지역 그림대회를 휩쓸 정도로 그림을 잘 그리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지금은 더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도 그릴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고, 영화까지 볼 수 있는 일석삼조의 극장 화공이 된 것을 만족해했었다. 자신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친구들의 표정이 아직까지 선하다.

유일한 문화 향유 수단으로 극장가가 한창 호황을 누릴 때는 10여명이 함께 근무하기도 했고, 극장 화공이 되기 위해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일을 배우겠다는 사람들도 줄을 섰었다. 밤을 세워 일을 해도 극장 앞에 자신의 그림이 걸리는 것을 보면 가슴이 뿌듯했다. 주인공과 똑같이 그렸다는 칭찬은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응원이었다.

하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 되 버리고 말았다. 극장이라는 단어가 왠지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멀티플렉스라는 단어가 극장을 대신하는 신조어로 등장한 것과 어쩌면 같은 뉘앙스인지도 모른다.

영화관 앞 노점 시계점으로 생활 이어

◈빛 바랜 극장 간판이 걸려있다.
다른 기술을 배울 새도 없이 시간은 흘렀고 최근에 잠시 유행했던 극장 포스터를 본 딴 복고풍 선술집 간판을 그리며 소일하다가 이 일마저 끊겨 한달 전부터는 미국으로 이민간 친구의 뒤를 이어 중앙극장 앞 시장에서 간판도 없는 노점 시계점을 운영하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뒤로 금장 시계 줄을 고치고 있지만 아직 손에 익지 않아서 인지 30여분간 나사를 풀었다 조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달 간 시계를 판 개수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아직은 일이 능숙치 않다.

″그림만 그려오던 손을 가지고 다른 일은 뭘 할 수 있겠나.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니 무슨 일이든 찾아야 하지″

시계를 고치는 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지만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에 두껍게 앉은 굳은살은 45년 외길 인생을 증명하는 훈장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바람이 강하게 불면 극장 간판이 떨어질 까 걱정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문 밖을 수도 없이 내다본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이렇게 천직으로 생각하며 젊음과 인생을 다 바쳐 외길 인생을 걸어온 최응신씨의 일은 멀티플렉스라는 대형 극장의 등장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그저 최씨가 피우는 담배 연기 속에 어렴풋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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