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참여 통해 불교 대중화 이뤄

◈장곡 스님은 백제불교 중흥을 목표로 포교활동을 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에도 적극 참여하는 종교인이다.
산사(山寺)에서 스님을 만나는 건 생각만 해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일이다. 초겨울 차가운 바람이 계룡산 계곡을 넘나드는 11월 마지막 주 수요일. 갑사(甲寺)를 책임지고 있는 장곡(長谷)스님과 약속을 했다. 가을 갑사(秋甲寺)로 유명한 산중을 찾아 행여 아직도 남아있을 가을의 끝물도 맛보고 법문을 들으면서 취재도 겸하겠다는 계산이 있었다. 도회를 훌쩍 떠나 고즈넉한 산사를, 그것도 평일에 찾을 수 있는 건 어쩌면 기자들만의 특권일 수도 있다.

갑사에 가을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르는 길은 가을 길 그대로였다. 초겨울은 그 나름대로 멋이 있었다. 다소 황량하긴 했으나 병렬식으로 쭉쭉 뻗은 나무와 괴목처럼 자란 고목은 자연 수목원이었다. 산에 자주가면 기(氣)를 받는다고 했던가. 이렇게 좋은 것을 보고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걸 두고 한 말로 보인다.

계룡 갑사에 도착한 건 27일 오후 3시쯤이었다. 종무소에 들러 인사를 나누고 장곡스님(47) 방을 찾았다. 단아했다. 미색 벽지와 고풍스런 찻잔, 자그마한 불상, 습도 조절과 멋을 위한 돌로 된 물구덕, 그리고 전화 등이 장식품의 전부였다. 스님은 합장으로 인사를 하는 필자에게 덥석 손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악수로 대신했다. 가벼운 수인사와 함께 앞자리에 앉자 팽팽한 피부와 혈색이 확 다가온다. 그런 마음을 읽은 듯 그는 "어제 초상집에서 밤을 새웠더니 얼굴이 부었다"는 말로 화답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대전일보 출신으로 독실한 불교 신자인 신모선배의 얘기를 꺼내기도 하고 건강해 보인다는 말도 건넸다. 그러면서 슬쩍 불교의 문제가 뭐냐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 불교가 불교다워져야 합니다. 사회 변화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좋지 않는 걸 따라가는 예가 종종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이미 버린 걸 불교계에서 뒤늦게 도입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만의 장점은 바로 스님다운 것과 사찰다운 것입니다. 머리가 아플 때 쉬고 싶은 곳이 되고 향기가 나는 장소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앉자마자 던진 질문의 성격이 조금은 어색했다. 반전을 위해 또다시 물었다.

-. 스님은 출가를 후회한 적이 없습니까.

"중노릇하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아주 만족합니다. 나는 100% 적성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어요. 중노릇을 하면서 회의(懷疑)를 가져본 적도 없었습니다. 밖에 나갔으면 못 살았을 겁니다."

장곡스님은 승려로서의 생활을 줄곧 '중노릇'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불가에서는 '중'이라는 말은 사실상 비속어(卑俗語)로 사용을 꺼린다. 문법에서 어의전성(語義轉成)이라고 하던가. 요컨대 어릴 때 즐겨 쓰던 '동무'라는 말이 북한 용어로 인식되면서 '친구'가 통용어로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중노릇이 나쁜 말은 아니지요. 우리가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시대적으로 중이 비하하는 말이 되었지만.... 본인 스스로 높이는 말은 좋지 않지요."

″중노릇이 자랑스러워″

얘기 도중 연신 다기(茶器)를 기울인다. 몇 가지를 섞어서 우려 나오는 맛이 은은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향(茶香)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마치 짙은 안개가 깔린 것처럼 낮은 쪽에 많이 몰린 느낌을 주었다. 춘원(春園) 선생은 다(茶)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달고 향기로움 있는 듯도 없는 듯도/ 두입 세입 넘길수록 마음은 더욱 맑아...차 물고 오직 마음 없었으라/ 맛 알리라 하노라.'라고 묘사했다. 장곡스님과 나누는 대화 속에 끼어 든 차맛이 바로 그것이었다.
중노릇이라는 말이 그랬듯 이번에는 스님 쪽에서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스님들은 승복을 입고 절간 속에 앉아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또 그럴 때 스님으로서 가치가 드높여지는 것이지요."

장곡스님은 현실 참여를 적극적으로 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그래서 주지를 맡은 곳마다 굵직굵직한 일을 만들어 냈다. 관촉사 주지 때는 논산에다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고 부여 고란사 때는 백제불교중흥회 창립을 주도했다. 지금은 일반화되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이었고 튀는 행동이었다. 불교계에서 그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불교는 파격(破格)에서 나왔다. 가지런한 연꽃 끝에 구부러진 잎을 두는 파격의 아름다움을 실천하고 있었다. 산사의 고요함을 깨부수는 락(Rock) 사운드 공연이라던가 100년 만에 빛을 본 국보298호 괘불이라던가 각종 음악회, 템플 스테이(Temple stay)행사 등은 불교계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대중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와 함께 백제불교회관 조직과 직능별 불자회 결성 등도 역시 포교문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본은 자신감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당당해야 오픈(Open)을 하게 됩니다. 갑사는 1600년 역사를 가진 사찰입니다. 정신적·물질적으로 엄청난 자산입니다.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 훌륭한 역사가 없고 그것이 불교의 특색인데 제대로 활용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장곡스님은 부여군 남면 마정리 천석군 황영근 옹(80)과 나정표 여사(80)사이에 태어났다. 부모님은 서울에 생존해 계시지만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버지 때문에 많은 일화를 기억하고 있다. 일제 때 단 하나뿐인 큰아버지가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자유당 정권 대 보사국장과 방첩대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보인상고, 어머니는 군산여고를 졸업했으니 천석마지기를 기반으로 한 지주계급이었다. 6남1녀 중 여섯째다.

물정 모르는 아버지, 그리고 도산

황부잣집 여섯째 아들이 마정초등학교를 나와 부여중에 들어갈 때만해도 '중노릇'을 하고 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유당 정권이 들어서고 농지 개혁이 되면서 빼앗긴 땅도 많았고 정치에 발을 디딘 아버지 탓에 가세는 급속도로 기울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의 번뇌를 메우기 위해 결코 서둘지 않았다. 30리 길을 걸어서 다녔던 부여중학 시절의 기억은 배고픔과 백마강 도강이었다.

"집은 부자였지만 중학교 때 기억은 행복한 게 없습니다. 백마강을 배타고 건넌 것과 걸어서 왔던 30리 길 옆 마을 아이들과 싸움질 한 것이 오래도록 남습니다. 특히 백마강은 아버지가 쌀장사를 할 때 홍산다리가 끊어지면서 몽땅 재산을 날렸던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지요."

◈봉축법회에 참여하여 설법에 앞서 반야심경을 봉축하고 있다.
자유당 때 세단 승용차를 몰고 다녔던 황부잣집도 세월의 변화를 이기지 못했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봉건토호(封建土豪)라는 좋지 않는 관념을 던져준 토지개혁과 아버지의 잇단 사업실패, 그리고 정치 입문이 더 이상 부자(富者)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향을 등지고 상경한 건 고등학교 때였다.

"한마디로 집안이 거덜났지만 교육열은 매우 강했습니다. 고향에서 더 이상 살기가 부끄러워서 서울로 갔지요.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을 그 때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선산도 팔고 가끔은 엉뚱한 곳에서 땅이 발견되기도 해서 그럭저럭 살 수 있었습니다. 생활력 없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매우 강한 여자였습니다. 얘기를 나누다보면 옛날 노인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걸 못 느낄 만큼 세상 물정에 밝아요. 지금도 유일하게 저에게 충고를 하시는 분입니다."

염세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던 그에게 낯선 대도시 서울 어디에도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즐겨 찾았던 곳이 청계천이었다. 원효대사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알았던 것처럼 청계천에서 발견의 기쁨을 맛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교편 잡는 형들이 책을 많이 사 집에 책이 많았습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만화책도 읽고 고전, 위인 전기 등 독서를 많이 했지요. 그런데 알게 모르게 제 성격이 염세주의적으로 바뀐 거예요. 서울에서 즐거움이 없었어요. 하루는 청계천을 갔는데 가게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어요. 그리고 중국집에서 배달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정말 부러웠어요. 별명이 '고독파'일 정도였으니까요. 지금도 혼자 있는 것 좋아합니다."

천석꾼 아들서 17세때 승려로 변신

이즈음 절에 가는 걸 좋아한 친구가 있었다. 거의 강요에 의해 끌려가다 시피 한 절에서 그는 신비함과 끌리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절에서 당기는 힘은 거절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그 길로 부여 무량사를 찾아 삭발을 했다. 무량사는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간 곳이었다. 그게 인연이 되었던 모양이다. 서울 고명상고 1학년 때였으니 장곡 나이 17세의 일이었다.

"부여 구룡에 선산이 있습니다. 산 모양이 스님이 걸망을 메고 가는 형상이었어요. 어른들이 이 집안에 머지않아 큰 고승이 나올 것이라는 말을 예언 삼아 했어요. 지금도 당숙 분들을 만나면 그런 말씀을 합니다. 풍수지리를 믿는 건 아니지만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이 때 휴대폰이 울렸다. 자리에서 전화를 받던 장곡스님은 '예', '예'하고 나서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옮겼다. 연거푸 마신 차로 인해 속이 꽉 찼다. 차가 이뇨제(利尿劑) 역할을 한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다. 잠시 막간을 이용하여 급한 볼일을 해결하고 마주 앉았다.

-. 스님을 절로 데리고 다녔다던 그 친구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때부터 그의 절제하는 승려로서의 생활은 시작된다. 1973년 입산한 장곡은 고등학교는 마치는 게 좋겠다는 스승인 진경스님의 권유로 승려 신분으로 다니던 고명상고를 졸업하게 된다. 이 때 머물렀던 곳은 조계사와 자그마한 암자였다. 동국대 불교대에서 교리에 대한 정진을 끝내던 1981년 논산 관촉사 주지로 신도들과 직접 만나게 되었다. 3년 동안 재직하면서 그는 백제불교중흥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8년간 유행가 가사 속에 나오는 고란사를 책임지게 되었다.
백제 불교 중흥과 관련, 장곡스님은 중도일보 김형중 기자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각자 자기의 길에서 본분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충청인들은 백제 불교 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 신라 불교 문화 연구가 많은 것에 비해 백제 불교 문화는 사장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당시 백제불교문화가 신라 불교의 근간이 되었음을 연구하고 알리는 것만으로도 불교 중흥과 연관이 있습니다...」

충청도는 내 불교의 본거지

◈부처님의 참뜻인 ″나의 존재, 마음은 하나″라는 주제로 설법을 하고 있는 장곡스님.
이후 불교, 특히 백제 불교 재건을 위한 그의 노력은 집념에 가까울 만큼 계속되었다. 백제 불교 사상연구회를 설립한 일이라던가 부여에 불교문화원을 만든 일등은 모두 그의 일관된 백제불교 사랑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1991년 월간지 '백제 불교'의 창간으로 현재화되었다. 1999년 계룡산 갑사 주지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의 활동은 불교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계종 개혁회의 의원으로 들어가 불교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한편 계룡산 보전 시민모임 대표, 민주언론 중앙위원 등 사회운동에 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중도일보에서 선정한 대전·충남을 이끌 지도자로 뽑힌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지금도 성격이 그래요. 누가 건드리면 자존심이 강해서 맞상대 해버립니다. 그러면 피곤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성격이 그래서 할 수 없어요. 고등학교 때 밴드부 학생과 싸움이 붙어 7번이나 싸우고 항복 받은 적도 있었어요. 좋게 말해서 경쟁의식이 남달랐다고나 할까요. 그게 결국 추진력이 된다고 봅니다. 독한 성격은 아닌데 한번 생각하면 5년 10년 걸려도 그만두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1992년 말 토굴에 살면서 선방을 다녔다. 한해 정도만 하면 물리가 트이겠지 하면서 시작한 게 무려 8년간 생식을 하면서 공부하게 되었다. 불교 수업에 대한 끈질긴 집념이 긴 세월을 한 단위로 묶어 놓아 버렸다. 장곡스님의 말을 빌리면 지금도 '중노릇에 가장 기억에 남고 정신적인 재산이 된 부분'이다.

충청도와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승려로서의 생활은 이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추구하는 목표 또한 백제 불교 중흥이어서 이래저래 충청도와는 보이지 않는 연(緣)이 있을 듯하다. 장곡스님의 충청에 대한 생각은 무엇일까.

"나는 충청도를 본거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충청도가 인연입니다. 태어나고 학교를 다녔고 심지어 만나는 사람도 충청도 사람이 아닙니까. 평생 책임져야 할 부분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면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사찰에는 문이 없어야

불교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얘기했다. 특히 개선해야 할 것과 계승해야 하는 문제 등과 관련해서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답했다.

"사찰에는 문이 없어야 합니다.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이 올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지요. 하지만 스스로 문을 만들고 턱을 높이는 게 오늘날 현실입니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보호보다는 당당하게 개방을 해야 합니다. 과거로부터 맺어진 인연이 우리까지 이어지고 주변사람들에게 발로(發露)시켜 부처님 뜻을 널리 전달해야 합니다."

인터뷰에 단골 질문이지만 왠지 하지 않으면 서운한 게 있다. 바로 '꼭 하고 싶은 일'이다.

"갑사에는 격에 맞지 않는 강당을 산문 쪽으로 이전하는 일과 종각, 유물전시관을 만들어 대중들이 정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싶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대전에 백제불교 회관을 확장이전해서 전법 도량으로 바로 섰으면 하고 지역에 불교방송을 설립하는 게 하고 싶은 일입니다."

장곡스님의 취미는 없다. 그저 시간이 나면 혼자 있거나 차를 마시는 게 취미라면 취미다. 속가(俗家)에는 거의 가지 않는다. 한번은 장조카의 결혼 청첩이 왔지만 가지 못했다. 세속일에는 의미가 없어지더라는 말도 곁들었다. 집안 식구들이 절을 찾아오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긴다. 또 개인 신도가 없다는 것도 장곡스님만이 가지는 독특함이다. 그리고 절에 머무는 스님에게 당부하는 말은 '품위를 지켜라'는 것이다.

장곡스님과의 대화는 저녁 공양에 이르러 끝이 났다. 일어서는 필자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법당 앞에서 '어두운 길 조심해서 내려가라'는 당부로 마중을 했다.

손전화 : 011-217-8209, 갑사(041)857-8981

″변치 않는 뚝심의 원칙주의자″

 내가 본 장곡 스님 - 신도성 충청대 겸임교수


◈신도성 교수.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대전일보 기자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강산이 한번은 변했나보다. 당시 전북지역의 대둔산 자락 토굴에서 정진 중이던 스님은 맑은 기품을 풍겼다. 그로부터 종종 스님에게 글을 청탁했고, 대전일보의 '한밭춘추'라는 칼럼란에는 스님의 자연과의 만남이 소개되곤 했다. 청설모와 다람쥐, 너구리, 능구렁이 나비 등 각종 동물과 식물들은 스님의 벗이었다. 필자는 지금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네 가족 등 대식구와 함께 토굴로 스님을 찾아뵈었다. 작은 토굴방에 촘촘히 앉은 식구들에게 스님은 마음법문을 해주었다.
옛날 어느 스님이 절의 불사를 위해 힘들게 일하는 세 사람의 석공에게 "왜 이처럼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첫째 석공은 "어쩔 도리가 없지요. 부모 잘못 만나 배우지 못했으니 다른 도리가 있나요.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말했다. 둘째 석공은 "가족을 돌보려니 힘들지만 할 수 있나요. 그래도 이렇게 일해서 살아갈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셋째 석공의 대답은 달랐다. "나는 수도하는 마음으로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내가 다듬은 돌이 사찰의 주춧돌이 되고 기둥도 되어 훌륭한 절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좋은 길로 가도록 불공드릴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납니다.
인생을 보는 눈이 낙관적이냐 비관적이냐를 설파한 법문이다. 밝은 눈을 통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밝고 명랑하며 사는 것이 즐거운데 비하여, 검은 안경을 통해 바라보면 세상이 온통 어두워져 불만이 가득 찬 삶을 산다는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이 한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으고 지위가 높으냐가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고 즐겁게 사느냐에 달려있다는 얘기였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법문을 뒤로하고 대전으로 올 때 바라본 스님의 모습은 도인 그 자체였다.
일부에서는 스님을 재미없는 스님이라든가 원칙주의자 황고집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스님은 중물이 제대로 묻어있으면서도 때로는 중생들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넓은 마음을 지닌 분이다. 계룡산 자락의 갑사가 지나가는 절로만 여겨질 무렵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절은 단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순국하신 기허당 영규대사의 제사를 계룡대 군인들과 같이 매년 지내고, 대웅전 뒤켠에서 잠자고 있던 갑사 괘불을 중생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펼쳐 보이는가 하면, 각종 학술회·세미나 개최로 우리 문화와 역사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다. 스님은 아울러 산사음악회는 물론 각종 법회와 수련회를 적극 개최하는 등 포교의 원력을 널리 펴 신도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목표가 뚜렷한 스님에게 적당주의는 안 통한다. 한번 정한 규칙은 그대로 밀고 나간다. 절에서의 포살법회(참회법회), 조석예불 등 대중공사에도 빠지는 법이 거의 없다. 조계종 전법도량 백제불교회관과 백제불교문화대학 개교 등의 멋진 추진과 불교방송 등 각종 현안 불사를 위해 스님은 백제의 옛 고도에 환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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