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미술 접목 통해 차별화 시도


박일호 대전시립 미술관장(43)의 취임 화두(話頭)는 차별화와 지역간 미술교류의 장(場)이었다. 지난 해 1월 대전매일신문 권도연 기자와 가진 취임기자 회견에서 처신과 관련, ′몸을 낮추는 관장(館長)′이 되고 미술관 운영은 타 도시와 차별화를 이루면서 과학문화도시에 걸 맞는 특성화를 통해 영·호남지역과 문화교류 공간으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그가 공채를 통해 대전시립미술관을 이끈 지 꼭 1년 7개월이 되었다.
경쟁력 제고를 위한 공채였기 때문에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출범 당시 구상했던 밑그림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는지도 알고 싶었고 교수에서 관장이라는 행정가로 변신한 사연도 듣고 싶었다. 또 성장과정에서 굴곡은 없었는지, 있었다면 그 문턱을 어떻게 넘었는지 하는 등속의 의문이 8월 27일 오후 녘에 대전시 서구 만년동 시립미술관을 찾게 만들었다.

대전시립미술관은 한 눈에 예술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엑스포 남문 광장을 옆에 끼고 들어간 관장실은 염홍철시장의 시정구호가 걸려있는 것을 제외하면 교수 연구실과 같았다. 빼곡이 꽂혀있는 서적들이며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는 전공서적들은 관료보다는 학구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게 했다. 약속된 오후 3시 정각에 관장실에서 마주앉았다.

맨 먼저 물어보고 싶은 건 취임 인터뷰에서 제기한 차별화와 교류의 장이었다.

″업적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대전시립미술관 특화를 어느 정도 만들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전국에는 비슷한 규모의 도시에 미술관 크기만 다르고 차별화가 안된 공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전은 조금은 특색있는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그쪽에서 부러워합니다.″

취임 때 약속했던 일들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하긴 임기 3년 중 이제 절반을 약간 넘어섰으니 지금과 같은 페이스라면 목표까지 가는데는 충분할 것 같았다. 물론 시민 속에 살아 숨쉬는 문화공간을 창출하겠다는 박관장의 의지가 끝까지 지속될 수 있는 가에 따라 결과는 크게 좌우되겠지만 임기 반환점에서 스스로 평가는 그런대로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는 것이었다.

″기획전시를 통해 차별화를 시도했습니다. 과학도시 이미지를 알리기 위한 비디오, 컴퓨터 관련 전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호남, 그리고 충청을 한 데 어우르는 지역미술간의 교류도 매년 정기적인 전시를 통해 해결하고 있습니다. 대전이 위치한 충청도는 교통요지라는 이점을 살려 물류유통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데 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장점을 예술분야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반환점에서 평가는 ′긍정적′

차별화된 미술관 운영은 박관장의 핵심정책이다.
그는 ′차별화′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조금만 눈을 크게 뜨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중도일보 2001년 4월 10일자 칼럼 '문화초대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차별화를 위한 두 가지 전략을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교통의 요지로써 대전의 특성을 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도시 대전의 이미지를 확립하는 것이다....지역감정이 정치권의 첨예한 화두가 되고 있지만 미술과 문화에 있어서는 화합과 상생이 가능함을 보이고 그 현장이 대전에서 이뤄지고 있음을...이러한 미술계의 경향을 전시로 꾸며 과학과 미술이 접목된 전시를 펼쳐낼 때 첨단과학연구단지가 있는 대전의 과학도시다운 면모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남들과 다른 미술관을 운영하고 과학도시를 응용한 전시를 통해 대전 이미지를 영·호남 화합을 통해 연출하겠다는 고집스런 시도는 궁극적으로는 '시민 속에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귀결될 수 있다. 박관장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미술을 어렵게만 여기는 마인드를 바꿔주어야 합니다. 시민들이 미술에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음악회, 무용공연 등 문화적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보자는 게 제 의도입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학예사들의 전시기획능력에 자신감도 많이 붙었고 주변 상황도 좋아지고 있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미술관 입구에 걸려 있던 제 17회 아시아 국제미술전람회 현수막이 얼핏 떠올랐다.
1회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를 하고 17회를 대전에서 열고 있으니 꼭 16년만에 한국으로 다시 가져온 셈이다. 규모와 대회 명성에 비해 시민 반응은 좋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번에 대전에서 유치를 했는데 12개국에서 109명이 참여를 한 대규모 전시회입니다. 서울에서 온 사람까지 합치면 약 170명의 작가가 참여를 했지요.″

사진 촬영차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듬성듬성한 관객들을 보고 아직은 우리가 수준 높은 전시회를 대중화시키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구나하는 생각을 가졌다.

과학도시 응용한 전시회 필요

취재를 하면서 나름대로 어려움도 있었다.
신문사 재직 때는 분야별로 나눠져 있어 문화·예술 쪽을 다룰 일이 없었으나 인터넷 신문으로 옮기면서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 뛰다보니 가끔 예술인들을 인터뷰하게 될 때가 있다. 이 때 곤혹스런 일은 그 분야에 상식이 없고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난 번 함신익 대전시향 지휘자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일상적인 얘기와 신상 문제를 하다가 조금만 깊이를 더하면 이해가 되지 않으니 내심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이날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술작품은 어떻게 감상해야 합니까′라며 정말 우문(愚問)을 던져 보았다.

″우선 미술이 어렵다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그건 많이 보지 않고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전시장에 다니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작품을 고르는 작업을 반복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취향도 생겨나고 공부도 하게됩니다. 그러다 보면 왜 이런 것이 좋은 지도 알게되고 안목도 넓어집니다. 아는 만큼 보이지요.″

영남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아는 만큼 보인다'고 쓴 글을 읽고 '아! 정말 적절한 말이구나′하고 무릎을 친 적이 있었다. 인터뷰 다음날 보충취재를 위해 박관장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또 그 말을 들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관장은 부여 쌍북리 태생이다. 본적은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로 되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부모의 본을 딴 기록이다. 아버지가 경찰 공무원이었으니 어릴 때부터 이사를 자주했다. 아버지 직장따라 옮긴 탓이다. 그의 기억 속에는 백마강의 푸른 물과 잔잔한 물결이 잔상처럼 남아있다.

″아버지가 지서장을 하셨어요. 백마강을 건너서 아버지가 계시는 지서로 갔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집에서 해주는 밥을 먹지 못해 고생했던 것 등등이 아주 어릴 적 기억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늘 바르게 사는 법을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는 원칙주의자였습니다. 특히 시골지서장을 했으니 주변 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릴 수도 있는데 제 기억에는 그런 일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었어요.″

″예술은 아는 것 만큼 보이는 것″
◈대전고 교정에서.(윗줄 맨왼쪽이 박일호관장)

5살 때 신탄진으로 이사와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대전시 동구 신흥동에 정착을 하게 됐다. 이사를 한 이듬해 신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위로는 누나3명에다 아래는 남동생을 둔 장남이었으니 부모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을 했다.

중학교는 동산중으로 배정되었다.
지금 교장을 재직중인 손정자 선생님이 1학년 때 담임이었다.
두 해에 걸쳐 추첨을 통해 학생을 배정 받았던 터라 학교에서도 1,2학년에 거는 기대가 컸다. 지금도 존경하고 있는 손정자 선생님과는 악연이 있었다.

″선생님은 기억하실 지 모르지만 한번은 선생님의 욕을 한가지씩 친구들에게 하라고 강요했어요. 그 때 충남대 공대 운동장에서 여러 친구들과 모여서 제가 앞장서서 그렇게 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실컷 흉을 봤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같이 흉본 친구들 중 한 명이 담임선생님한테 고자질 한 겁니다. 교무실에 불려가서 혼이 난 적이 있는 데 아마 저는 선생님을 좋아하는 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니 그게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왜 사춘기 때 그런 감정 있잖아요.″

손선생님 여동생이 큰 누님과 공주교대 동창이었으니 서운함은 배가되었을 수 도 있다.
선생님이 어머니를 붙잡고 ′일호가 그럴 수가 있느냐′며 울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1997년도 충남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은사를 찾아뵙고 인사를 했고 미술관장 확정 때도 그랬다. 지난해는 스승의 날을 맞아 모교에서 강의를 하는 등 중학교 담임과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지나온 얘기에 푹 빠져 있을 즈음 전갈이 왔다.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이 방문한다는 내용이었다. 원래 이날 1시 30분에 김의원과 약속이 되었고 3시에 필자와 만나기로 했다는 데 김의원이 일정 상 늦어서 함께 만나게 되었다.

달변가인 김의원은 이것저것 한참동안 정치 얘기를 했다. 박관장과는 크게 인연은 없었던 터였으나 이번 아시아 국제 미술전을 계기로 서로를 알게 된 듯했다. 김의원 부인이 전시회에 출품을 한 게 끈으로 작용했다. 굳이 연(緣)을 찾는다면 대전고, 서울대 동창이 공통분모일 수 있었다. 박관장에 대한 평가를 부탁해보았다.

″동산중 손정자선생님 존경″
◈90년 결혼식 장면.

″대전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학문적 업적이 축적된 사람이어서 개성있는 시립박물관으로 입지를 넓힐 수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대전고 3학년때 서울로 이사를 갔다.
박관장은 공부 때문에 따라 갈 수가 없었다. 퇴미고개 어느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놀기도 하면서 공부도 하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을 노리니 될 리가 만무했다. 그때 사귄 친구들이 지금까지 가까운 사이로 남아있다. 그 친구들은 두 부류로 정확하게 갈라져 있다. 공부 잘하는 친구와 놀기를 잘하는 친구다. 이때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민한 시절에 부모와 떨어져 있다는 주변 상황이 방황으로 연결되었다. 술도 먹고 놀러만 다녔다.

그러니 원하는 대학을 갈 수가 없었다. 졸업하던 해에 연대 상대를 낙방하고 다음해 재수를 했으나 다시 서울대에 떨어졌다. 삼수(三修) 끝에 서울대 인문계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예술철학은 예술을 대상으로 철학적으로 공부하는 학문이다. 풀이말이 더 어렵지만 그렇게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박관장이 미학과를 택하게 된 건 대학에 들어가서 개론을 듣게 된 게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입학식에서 아버지와 함께.

″인문학부 때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1학년 때 여러 과목의 개론을 듣게 되었는데 그 중에 예술과 관련이 있고 예술 문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학문이 바로 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이 학과가 인기가 있지만 그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진 데 비례하여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 커지고 미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사회가 필요로 하면서 인기학과로 부상하게 되었다. 새로운 학문과 흥미와 관심을 끄는 학문의 성격은 박관장을 전공에 빠지게 만들었다. 학부 과정을 끝내고 단숨에 석사를 마친 것도 학문에 대한 열정 탓이다. 거침없이 달려온 학구열은 박사과정이라는 최종 관문을 앞두고 좌절과 번민, 그리고 자신의 한계에 대한 심각한 고민 등 부정적인 용어를 양산하게 된다. 그 문턱을 넘기가 너무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논문 제안서를 가지고 교수님을 찾아가면 계속해서 ′노′를 하는 겁니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얘기지요.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너무 힘이 들었고 논문 때문에 울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주제를 선정하고 실마리를 잡을 때까지 정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박사학위 8년만에 수여받아
◈2000년 여름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에서.(가운데가 지도교수였던 오병남선생님.)

박관장의 이력서를 보면 1983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88년 석사과정까지는 정상적인 행보였다. 그러나 박사과정을 달랐다. 1989년에 시작하여 1996년 8월에 마친 걸로 되어있다. 무려 8년만이었다. 물론 박사과정을 거치는 동안 관동대, 덕성여대, 외국어대 등을 출강하면서 공부와 가르침을 병행했지만 박사학위는 너무 힘들고 지루한 관문이었다. 그 문고리를 잡고 있었던 교수가 오병남교수였다. 논문 토씨하나까지 고쳐줄 정도로 제자를 아끼고 바른 길을 살아온 스승으로 박관장은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동산중 손정자선생님과 오교수님을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을 때마다 찾아가서 조언을 듣곤한다.

박사의 긴 여정 속에서도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통해 등단하는 즐거운 순간도 가졌다. 1995년 ′리얼리티와 미술, 그리고 키치′라는 미술 평론부문에 당선되었고 이듬해는 박사과정 통과, 또 다음해는 충남대 조소과 전임강사 등 매년 좋은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던가.
그토록 자식의 굳건한 성장을 염원했던 아버지가 충남대 교수 채용직전인 97년 2월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대학교수로 재직하는 자식의 모습을 무척 보고 싶어했어요. 폐암으로 힘든 투병생활을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에 ′충남대로 확정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니 ′이제 눈을 감아도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충남대 재직 3년여만에 대전시립미술관장 공채를 통해 자리를 옮겼다.
공채 응모동기가 궁금했다.

″미술이론과 평론을 공부하다보니 현장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앞으로 활동에도 도움이 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도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도 한길을 똑바로 가려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만 사람을 많이 사귀는 행정도 알고 조직관리도 하는 관장이라는 직책이 필요한 경험이라고 봅니다.″

현장경험 얻고 싶어 공채 응시
◈2001년 여름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몇 가지 더 물어보았다.

- 어려운 점도 있을 텐데요

″예산 확보가 가장 힘들지요. 미술관을 학예관 중심으로 운영을 해야합니다. 학예관과 학예사를 각 1명씩 확보하여 인원은 어느 정도 갖추었으나 부족한 예산을 메우는 데 힘이 듭니다. 쉽게 될 일은 아니지만 젊으니까 의자에 앉아있기보다 돌아다니면서 예산 따내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 교수로 있다가 옮겨오니 시청에 계시는 분을 잘 알지 못해 결례를 할 때가 많습니다.″

- 앞으로 운영 계획은

″미술관의 차별화를 계속해서 시행해 나갈 계획입니다. 또, 미술관 소장품을 구입, 특성을 알릴 수 있는 작품을 많이 갖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변에 예술의 전당과 수목원이 들어서면 대전의 문화벨트를 형성, 시민과 가까이하는 휴식공간을 만들어 나갈 예정입니다.″

- 임기 만료 후 연임할 생각은
◈제주도 여행지에서 가족과 함께.

″임기에 관계없이 연임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교에 돌아가야지요. 미술관도 궤도에 오르도록 최선을 다하게 되면 연임은 시간 떼우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필요하다면 대전의 문화사업에 이바지 할 길을 모색하겠습니다.″

박관장은 미학과 조교시절 같은 길을 걷고 있던 최은주씨(39)와 결혼을 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있던 그녀와는 지인의 소개로 만나 1년여 열애 끝에 평생의 반려자로 선택했다. 박관장 나이가 33살로 적지 않았고 편하게 해줄 것 같은데다가 아버지가 손자를 빨리 보고싶어해서 서둘렀다.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과 산하 덕수궁미술관장으로 재직하고 있어 주말부부다.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손자는 두지 못했고 딸 둘을 두었다.
소혜(12. 신가초5)와 윤혜(9. 신가초2)가 있다. 낮에는 주로 일에 매달리다 보니 시간이 나지 않고 저녁에는 좋아하는 술과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전지법에 윤병구부장판사와 가깝게 지내고 주량은 소주 2병 이상. 취기가 오르면 윤항기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열창하며 최근에는 골프 연습장에 나가고 있으나 마음같이 되지 않는다고 겸연쩍게 웃었다.

취임 당시 약속했던 일을 어느 정도 하고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박관장은 ″글쎄요. 거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술계에는 말이 많은 곳인데 아직까지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일은 비교적 잘하고 있다고 봐야지요″라면서 주차장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연락처 :(042)602-3201, 손전화 017-250-0524

- 내가 본 박일호 -

 맡은일 최선 다하는 책임감 있는 친구
 유한호 삼성경제연구소 부장

″일호″ 동생들의 이름은 이호, 삼호로 이어질 것 같은 이름이다. 그는 이름처럼 집안의 장남이다(위로 누님들이 계시지만). 그래서인지 평소에 무게를 잡는 편이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고 몸에 밴 것 같다. 별 거 아닌 이야기도 좀 심각한 표정으로 한다. 말로는 뭐 별 일 아니라고 하지만 표정은 늘 심각하다. 생각이 많아서일 것이다. 마른 편이라서 없어 보이지만 가진 것이 참 많은 친구이다. 생각만 많은 것이 아니고 친구도 많고, 후덕하신 어머니와 부인, 아이들(딸이 둘이었는데 최근에 아들을 낳았다.), 집도 서울에도 있고 대전에도 있고 게다가 직함도 많다. 미술평론가, 교수님, 관장님, 부회장(동창회 부회장 하기 힘든 것 여러분도 다 아시리라) 등등 아마 내가 모르는 직함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가진 것이 많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능력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인생을 참 진지하게 산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 하려는 책임감이 누구보다도 강하다. 늦은 밤 문득 고독이 밀려 오거나 대화상대가 필요할 때는 책임감이 강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친구가 필요로 할 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박 일호처럼 책임감 강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나는 이제까지 한번도 거절 당한 적이 없다. 미술관 관장을 맡은 후에 대전에 사는 친구들이 물심양면으로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동참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박 일호관장이 앞으로도 더욱 활발한 활동으로 우리의 고향, 대전의 문화 수준을 팍팍 올리는데 큰 공헌을 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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