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목기 기능보유자 김인규옹

지난 11일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발표한 2003년도 기능보유자 5명의 명단에는 반갑게도 우리 지역에 거주하는 김인규옹(65. 대전시 대덕구 덕암동)이 전통목기제작 분야 수상자로 들어있었다.

발표 이후 언론사의 인터뷰일정 때문에 결국 일주일 후에서야 작업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페인트칠로 휘갈겨 쓴 ′고려공예사′ 글씨가 선명한 양철 대문을 열고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은 김 옹의 장남 김용오씨(45)였다. 김 옹이 손수 심었다는 빨간 봉숭아 꽃길이 작업장까지의 길을 안내해주었다.

″지리산이나 영동 쪽에서 가져오는 100%국산 물푸레나무를 써요. 나무에 대해서는 아버님이 전국에서도 일가견이 있으세요. 이론으로는 못 풀어도 경험적으로 판별을 하시거든요. 가져온 원목 자체를 용도에 맞게 재단하는 초벌깎기를 거쳐서 45일 정도 건조 후에...″

용오씨는 한창 작업 중이던 김 할아버지 대신 익숙한 모습으로 자료가 될만한 내용들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중간에 기사 방향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이제 알겠다는 듯이 이야기를 풀어갔다.

″아버님은 17살부터 지금까지 군대 3년 빼고 계속 이일만 하셨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는 생활기록부에 (거주지 변동이 잦아서) 쓸 칸이 부족했어요. 솔직히 쫌 창피했죠.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님 하시는 일이 나무따라 가야 되는 일이잖아요. 좋은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거기다 밤이고 낮이고 일만 하다보니까 사실 집안 살림에 좀 등한시 하셨죠. 저희 4남매가 전학을 가든지 말든지.. (웃음) 지금은 동생들 다 대기업 다니고 잘 키워주신 거 생각하면 정말 고맙죠″

창업 2대 아들, 대물림에 보람

제기들을 쓰다듬으며 용오씨는 말을 이었다.
″어렸을 적에 제기 위에 모르고 앉았다가는 조상님께 절 할 곳인데 앉았다고 불벼락이 떨어지곤 했어요. 조금만 흠집이 나도 가차없이 불 속으로 던져버리시고... 그땐 이해를 못했는데 지금 보면 참 자랑스러워요″

어린 용오씨의 눈에는 아버지의 고집스런 열정이 어쩌면 섭섭함으로 비쳐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 앉았어도 하루에 몇 천 배씩 절을 받는데 얼마나 좋으냐′며 여담도 하시고 큰 보람으로 생각을 하셔요. 사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놀러 좀 갑시다′ 해도 ′니들 갔다 와라, 난 이거나 하고 있을란다′ 하시면 서운하기도 하고 그러죠. 좀 쉬셨으면 하는데.. 그래도 이번에 발표난 거 보고 너무 좋아하세요 ″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하는 내내 몇 분 간격으로 연신 전화벨이 울려댄다. 발표가 난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늦게나마 소식을 듣고 걸려오는 축하전화들이다.

″일은 하나도 못혔어요. 전화받느라고...″

사포질을 하다말고 전화를 받으러 가는 표정이 싫지만은 않은 듯 부인 오옥선여사(60)도 옆에서 거든다.
″우리 아자씨는 나이가 70이 다 돼 가는데 이 고생을 하다가 이제야 이름을 얻었으니 을매나 좋아요. 보면 젊은 사람들이 일을 안 할라고 그래. 우리 아자씨는 아침부터 일어나서 저것들(제기들) 다 일일이 사포질을 하는데. 쉬는 날이 어디가 있어.″

夫唱婦隨로 엮어가는 제기 공정

초벌깎기 작업장에 들어서니 톱밥이 눈처럼 이리 저리 날린다. 잘 마른 원목토막들은 자동끌이 닿자마자 금세 화채그릇, 밥그릇으로 변하면서 그 뒤로는 꼬불꼬불한 톱밥들이 뿜어져 나온다.

″이상하게 맨 날 있는 우리들은 안 무는데 새 손님들 오면 어떻게 아는지 꼭 물더라고요″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기자 뒤로 어느새 다가온 할머니는 모기물린 손목에 직접 맨소래담을 발라주시고는 모기향을 찾으러 가신다.

마침 전화 받으러 나오신 김 할아버지와 드디어 자리를 마주했다.
″솔직히 바래긴 바랬지. 지금이라도 인정해주니까 고맙지 뭐. 나로서는 평생을 바친 거지. 아무리 해도 돈벌이가 안될 땐 좀 짜증도 나고 왜 이런걸 배웠나하고 속상해 하지만 그래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한번도 안 들었어요. 보람도 있고... ″

할아버지가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옻칠 과정.
마무리하면서 티끌 하나 없어야 되기 때문이다.

″좋은 거는 보통 11번 정도 이상 칠을 해서 옻 기가 나무에 꽉 절어야 돼. 그래야 뒤틀림도 없고 늘 한결같은 법이거든. 그런데 보통 한 4번만 칠해놓고 백화점 같은데서 팔고 하면 보통 사람은 구별 못 햐. 아마 전문가래두 겉만 보면 구별 못할거야.″

그래서 할아버지는 손님들에게 일단 물건을 보내주고 나중에야 돈을 받는다.

″중국산 때문에 소비자들이 의심을 너무 많이 해요. 사러와서는 아예 작업장을 뺑뺑 한바퀴 돈다고. 그러면 아, 걱정 말라고, 나는 국산나무밖엔 안 만드니까 만약 하자 있으면 언제라도 가져오라 허지. 공들여 만드는걸 아무렇게나 만든 걸로 취급할 때는 참... 내 속을 뒤집어 놓을 수도 없고 그럴 땐 참 마음이 안 좋지.″

″죽을때까지 이 일 하갔시유∼″

제기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길이 자식을 바라보는 듯 정겹다.
″처음에는 솔직히 아버님 일을 도와드려야겠다 하다가 6.25 때 아버님 돌아가시고는 우리 9남매 생계유지할랴고 했지. 고향(전북 남원) 떠나 대전에 17살 때 와서 그때만 해도 니야까(리어카)도 없어서 등에 짊어지고 팔다가 조그맣게 집 얻고.. 조금씩 팔리고 하다보니까 '아 이게 내 길이다. 아버지 일을 내가 이어받아야겠다' 생각이 들데. 그 뒤로 대동(대전시 동구)에서만 35년 했지. 사람도 좀 두고.″

무엇보다 할머니의 말없는 희생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전에 우리 식구는 농촌의 부호로 살았어요. 시집와서 고생많이 하고.. 지금같으문 이혼했지. 아유. 애들 뒤치다꺼리에 집도 하나 없다가 빚도 좀 얻어서 장만도 하고. 고생은 우리 식구만큼 많이 한 사람 없어요. 그저 나야 고맙지 뭐..″

그릇을 손질하다말고 슬그머니 앞뜰로 나가는 할머니를 쫓아나갔다.

″힘들어도 어떡해. 바깥양반이 하는데. 우리 아들한테 인정을 못 받았었다니까요. 지금이야 자식들 다 키워서 웬만큼 직장 갖고 했지만. 요새야 중국것 때문에 장사가 안되죠. 내 물건 탓하면 내 남편 탓하는 것 같고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아. 집도 훵하고 아파트도 불편해서 그냥 여기서 살림도 하고 재밌게 지내지. 왜 부러울게 없어. 돈 벌어서 집도 짓고 하고 싶지. 안 돼도 희망은 가져야잖아″

1년 통틀어 추석을 앞둔 요즘이 가장 바쁘다며 할아버지는 다시 주섬주섬 장갑을 챙긴다.
″뭐.. 난 늙어 죽드락까지 할 꺼니까. 놀러다니는 것도 생각 없어요. 그것도 몸에 배야하는 거구.. 그저 하던 일 하면서 걱정없이 살면 그만이지. 같은 일 하는 사람도 예전엔 많았는데 전부 딴 직업으로 돌리고 이젠 나밖에 없어. 배울라는 사람도 없고 한번 들어온 사람도 2. 3년 버티다가 나가는 사람들 있지. 그게 좀 아쉽지...″

연락처 042) 932-5837 고려공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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