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의견 수렴하는 지방행정 필요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김제선 사무처장.

김제선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39)을 만나러 간 날은 대전 용두동 철거민 문제가 전환점을 맞을 즈음이었다. 보상 금액 협상과정에 대전지역 시민단체들의 공동 참여 여부가 쟁점이었다.
8월 9일. 이날도 시민단체 대표가 모여 이 문제를 두고 한차례 격론을 벌었다.
토론의 결과는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담 도중 김광식 환경연합 사무처장, 박정현 녹색연합 사무처장, 이광진 대전 경실련 사무국장이 들어와 약 30여분동안 명분과 실리를 거론하면서 참여여부에 관한 논쟁을 했다.

대전시 중구 문화동 기독교 연합 봉사회관 8층에 위치한 참여연대 사무실 한 켠에 자리잡은 김처장 사무실은 다소 어수선했다. 많은 서류와 책들로 가득 채워져 산만해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손이 닿을 곳에 중요한 서류가 있어 나름대로 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三界皆苦, 我當安之」(모든 세상은 고통이고 내가 그것을 당연히 평안하게 해야 한다)
석가(釋迦)의 법언(法言)이 책상머리에 적혀있었다.
'세상을 평안하게 하겠다'는 말이 어쩌면 그를 참여연대라는 시민운동으로 끌어넣었는지 모른다.
그 아래 적혀있는 또 다른 글귀도 역시 그랬다.
'주도적이 되고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며 소중한 것부터 먼저하고 .....'

법언이나 아래 글귀나 모두 사회활동을 하면서 '사무사(思無邪), 즉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야 된다는 걸 스스로 당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이 줄곧 시민운동의 선명도를 높이고 말을 무게 있게 만드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두동 철거민 문제 속에 대담

대담은 대전시의원 출마자였던 김용분 전 서구의원을 화두(話頭)로 풀어나갔다.
김 전의원이 구의원이 된 이면에는 시민후보라는 배경이 되었다. 참여연대와 시민운동단체에서 출마를 종용했었고 당선되었다. 이번에는 활동반경을 시의원으로 넓히기 위해 광역의회에 도전했으나 기득권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마했다.

〃시민연대에서 특정당의 후보를 지지할 수 는 없지만 아쉽습니다. 다양한 의정 활동을 통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정당의 한계와 낮은 정치 수준이 낳은 결과라고 봐야하지요.〃

공감이 가는 말이다.
김 전의원은 정당연설회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그게 표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결국 현실적인 공약과 활발한 의정활동이 유권자의 표심을 끌어오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의정활동을 굳이 잘 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적절한 줄서기와 필요할 때 주민들 환심만 사면 된다는 얘기였다. 이런 저런 얘기로 어색했던 순간은 점차 누그러지면서 본래의 주제를 무리없이 던질 수가 있었다.

〃지방정치의 투명화와 활성화가 미흡합니다. 이는 의사 결정에 시민의견 반영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대전에는 자민련과 한나라당이 균점을 하고 있어 다원적 가치를 띠고 있지만 시민 참여가 안 되는 지방 권력의 투명화와 합리화는 어렵지요.〃

다원적 가치란 말이 선뜻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전 자민련 일색에서 한나라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일당독주는 막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지방정치 측면이 그러하다면 행정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지방자치의 권한이 역시 미흡합니다. 많은 권한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지요. 민선이 친절도를 높이는 측면도 있으나 전시행정이라든가 인기에 영합하는 부정적인 요소도 많습니다. 특히 재정 능력을 무시한 지나친 투자가 그렇지요.〃

지방자치 투명화·활성화 필요
◈80년 중학교 졸업식에서 가족들과.

김처장은 대전시 1조8천억원 예산 중 가용재원은 1천억원에 불과하다는 걸 예로 들면서 '쓸 수 있는 재원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대전시 교통문제와 행정으로 옮아갔다. 염홍철 대전시장이 약속한 경전철 도입의 문제점과 시내버스를 비롯한 대중교통의 개선점등 많은 의견을 내놓았다. 그 동안 기자회견이나 성명서를 내면서 준비했던 의견들을 단편적으로만 엮어놓아도 기자와 같은 문외한에게는 전문적인 지식으로 와 닿는다.

관중석에서 본 대전시 행정의 문제점은 두 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주민을 주인으로 보는 관점이 미약하다는 점이다.
고객위주로 행정을 하는 게 아니라 아직도 관치 행정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있다는 말이었다.
두 번째는 도시관리능력 부재를 꼽았다.
상대적으로 다른 도시보다 급속한 성장을 하다보니 양적인 팽창에 도취된 느낌을 주고 있다는 뜻이다. 양적인 성장과 함께 현재 살고 있는 시민들이 쾌적한 생활을 하게끔 행정력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분별한 택지개발로 인한 과잉 공급과 교통분담률 낮은 버스의 활용방안 등은 적절한 통제와 관리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시민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지역언론 상황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또, 홍선기 시장 재직시 소각로 문제에 시민연대가 참여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솔직한 답변이라는 전제를 두고 물어보았다.

〃지역언론 문제는 경영여건으로 만 따질 일은 아닙니다. 서울 중심 구조의 희생물이 지역언론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정부 차원에서의 적절한 지원책이 있어야 합니다. 중도일보에서 소각로 문제를 이슈화했는데 저희들 입장은 그 속에 '담합행위'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두고 접근을 한 것입니다. 홍시장이 개인적으로 '중도일보에 편의를 얼마나 봐주었는데...'하면서 섭섭해하는 걸 직접 보았습니다. 이 문제도 인간적인 정리에 기준을 두고 해석할 건 아니었지요. 대형 공사를 발주하면서 있을 수 도 있는 합법적인 봐주기 또는 담합행위를 없애겠다는 게 입장이었습니다.〃

지역언론, 중앙논리의 희생물
◈82년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이 문제는 조금만 눈을 옆으로 돌려보면 지역언론과 자치단체장과의 싸움에 시민연대가 언론편을 들어주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는 말에 '과정은 같을 수 있으나 목표는 달랐다'고 말했다.

김처장 약력은 외로운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꿈과 낭만이 넘친다는 대학생활은 반체제 운동이라는 투쟁의 시간이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진보적인 그의 가치관은 반정부 활동에 몸을 던지게 했고 지금도 그 운동은 시민운동이란 새로운 옷으로 계속되고 있다.

평양이 고향인 아버지는 월남민이다.
대전 인동에서 호남정기화물이라는 운송회사를 할 정도였으니 어릴 때 가정은 풍족했다. 고물상을 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정기화물과 함께 고혈압, 한량 등의 부정적인 단어로 대신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길지 않았다.

〃고물상을 하시면서 전쟁통에 돈벌이가 잘 되었다는 기억은 남아있어요. 고혈압 때문에 서너분이 동업으로 하던 호남정기화물을 그만두시고 사냥, 낚시 등으로 소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돌아가셨는데 제가 아홉살이었습니다.〃

자양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지금이야 여성이 사회 진출이 능력에 따라 가능하지만 그때는 제한적이었다. 일자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부장중심의 남성이 차지하기도 어려울 실정이었다. 그 통에 여성이 일자리를 찾는다는 건 지극히 힘들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노점상이었다. 손쉽게 얻은 일의 수입은 당연히 적었다. 어머니 김능균여사(80)은 중앙시장 노점에 나 앉았다. 당시 49세였다. 그러나 가장을 잃은 가정에 고생은 예정된 일이었다.

어머니, 중앙시장에서 노점상
◈민주주의 민족통일 대전충남연합 결성 후(92년).

충남중, 보문고, 충남대를 다니면서 홀어머니에게 못할 짓 만했다.
3남 1녀 중 막내이면서 데모로 제적당하는 등 늘 보통사람과는 거리를 둔 유별난 길을 선택했다. 어머니는 이때도 늘 희생적이었다. 노점상을 하다가 하숙으로 집안을 끌어갔다. 3남1녀의 무거운 짐을 가녀린 여인의 양어깨에 걸머져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못된 아들이지요. 고생해서 대학을 보내놓으니 데모해서 제적이나 당하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억척스럽고 고생을 많이 하신 것 밖에 없습니다. 불심(佛心)도 깊고 정말 희생적이었습니다.〃

여든 나이에 퇴행성 관절염이니 천식 등 노인성 질환이 온 게 안스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한 게 요즘 심경이다. 함께 모시고 사는 게 사죄의 의미가 들어있는 듯하다. 작은 가슴을 가진 어머니의 평생 소원은 막내아들이 졸업하고 고시를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나간 시간을 '철이 없었다'는 표현을 썼다. 정말 철이 없던 일이 있기는 했다.

1982년 어렵다던 경찰대학에 합격을 했다. 학교에서는 의과대학을 가라고 권할 정도였으니 공부는 꾀 잘 했다. 그러나 면접이 문제였다. 면접관이 지원이유를 묻자 당시 시국사건이나 다름없던 '사북사태'를 얘기해버렸다. 물론 자신의 생각을 잔뜩 집어넣었다. 82년도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럴때인데 경찰대학 지원한 녀석이 사북사태 운운하는 건 '나는 떨어지겠소'하는 것과 같다.

지나고 보면 사북사태 운운하는 건 우발적인 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교 때 사회문제에 관한 토론을 하는 모임 '하늘' 멤버였다. 지금 내일신문 대전주재로 있는 김종필 기자와 의정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송인권씨등이 그 때 멤버들이다.

고교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대학도 역사학과나 철학과를 가고 싶었으나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의대갈 실력이었으니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랄까. 보편적인 사고로 현실에 묻히기 보다 진보적인 생각은 대학시절을 순탄치 않게 만들었다.

대학 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
◈대전충남총선연대 일주년 기자회견 모습.
1984년 대학 2학년때다.
'전두환은 나쁜 놈'이라는 유인물 300장을 제작해서 버스 위에 올려놓았다가 3일만에 검거됐다. 안기부로 끌려갔다. 거기에서 만든 지낸 10일은 정말 '기억하기 싫은 것'들 뿐이었다.
목에서 발끝까지 맞아서 피멍이든 선배를 보았고 열흘 있는 동안 야근 수당을 나눠가지는 모습도 보았다. 한쪽은 목숨을 담보로 떨고 있었는 데 그쪽은 너무나 여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권총차고 패니까 공포심은 두배가 되더군요. 1년6개월을 선고받았고 10개월 형을 사는 도중 학원자율화조치로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때 얼마 전 작고하신 강구철 선배와 만든 민중야학이 그 사건으로 폐쇄되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철이 너무 없었다는 표현으로 당시 상황을 반추했다. 보안사 준위 출신이 큰 형이 면회를 오면 '내가 옳은 일했다'고 막무가내로 주장했다. 형의 가슴이 더 아팠을 것이라며 '드러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 자부심도 있고 젊은이로서 해볼만한 일이었다'라는 말로 과거 행적을 정리했다. 하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일도 있었다. 재판받는 날이 공교롭게도 어머니 회갑이었다. 이래저래 불효만 한 셈이다.

1984년에 복학을 했다. 의미는 없었다. 학생으로 돌아왔다는 신분상의 복학이 전부였다. 광주학살진상 규명 데모를 하면서 후배들이 파출소 유리를 깼다.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학업 계속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때 상황에서는 학생이라는 신분이 별로 중요하지가 않았습니다. 학교 졸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학생운동을 하는 내부 분위기는 그랬습니다.〃

학생 신분을 버리고 택한 곳이 기독교 청년회 활동이었다. 중앙위원이 사회에서 부여한 첫 직책이었다. 민주헌법쟁취...충남민주운동... 등등 이후 그의 이력에는 '민주'라는 단어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그림자가 된 '민주'라는 말

민주화 운동은 95년 서경석 목사가 시민운동으로 탈바꿈시켰다. 기존 민주화운동과 차별화된 방식으로 시민운동을 하겠다는 취지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의 변화를 꾀했다. 거기에 김처장이 몸을 실었다. 대전참여자치 시민회의 대변인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시민운동의 방향과도 연관지어 활동을 할 예정입니다. 권력 감시형, 주민밀착형 시민운동이 필요합니다. 또, 지금까지 경부선을 중심으로 편중 개발된 국토를 균형개발이라는 이념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일을 하겠습니다. 잘 알다시피 지금과 같은 불균형으로는 미래가 없습니다. 〃

또, 행정에는 구체적으로 4대 관행을 없애는 작업을 병행하겠다는 말을 했다. 요컨대 업무추진비남발, 용역 남발, 해외연수 예산 남발, 임의보조금 남발 등을 방지하는 데 대전참여자치연대의 힘을 결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부인 강도영씨(39)와는 대전민주청년회 활동 때 만났다. 92년에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수정양(9)과 수연양(5)을 둔 '딸딸이' 아빠다.

〃등처가입니다. 아시죠. 아내를 등치는 남편요. 사회운동 취지에 동의를 해서 결혼을 하게되었습니다. 아내도 직업으로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비영리단체에 일하는 걸 직업에 넣었는데 우리는 아직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를 많이 하면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늘 고맙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여유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지만 가끔 평일 저녁에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아빠다. 독서를 주로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고 그것을 업무에 참고하는 성실한 아버지상을 자식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요즘은 매주 일요일 오전 7시 10분부터 50분간 대전 MBC에 '김제선의 열린 세상'이라는 고정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시민사회운동이 앞으로 인프라를 많이 구축하여야 합니다. 시민운동의 전문성 제고를 위해 재교육 시스템이 필요하고 전문성과 기여도를 크게 해야 사회적 기능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젊은 후배들에게 권장할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자기주장을 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사회적 성취도가 큽니다. 전문지식 측면에서도 단기간 내 많이 배울 수 있는 게 시민운동입니다.〃

(연락처) 016-403-8176, (042)253-8176


″지역의 소금 같은 존재″

내가 본 김제선 - 송인준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집행위원장


"한마디로 우리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꾼입니다. 냉철한 머리와 따듯한 가슴을 가진 진정한 시민운동가이지요. 예전에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그랬고 지금 맡고 있는 일도 그렇습니다. 늘 일에는 투철하면서도 남에게는 유연하면서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학교는 선·후배 사이지만 그런 후배하고 함께 일을 하는 것도 큰 복입니다. 80년대 말 참여연대가 결성되기 이전 준비단계부터 알았지만 모든 일을 잘 이끌어가면서 새로운 제안도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친구입니다. 배울 점도 많고요. 특히 추진력에서 뛰어납니다.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이뤄내는 인물이지요. 참여 연대을 비롯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희생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김 처장은 이런 면에서 정말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참여연대의 지속적인 발전과 개선을 위해 자신의 몸 돌보면서 건강하게 그 자리를 지켜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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