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의 편에서 봉사하는 자세로 생활
 대덕밸리 집중지원 스타기업 만들어야

 차세대 인물탐구(정치)-이강철 대전시의원


우리들은 흔히 어린아이에게 커서 무엇이 되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어린아이들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통령, 판·검사, 정치인이라는 막연한 대답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목표는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어 갈수록 바뀌어 간다. 어릴 적 꾸었던 꿈은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린 시절 세웠던 인생의 목표를 실현시키는 사람은 흔치않다. 또 어릴 때 꾸었던 꿈을 위해 초지일관 외길을 걷는 사람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해진 길을 가고 그 목표를 달성시켰을 때의 성취감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자긍심으로 남는다. 굳이 돈과 권력, 명예를 지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발로 뛰는 노력하는 정치인

이강철 대전시의원(44)은 정치를 위해 인생을 투자한 준비된 인물이다. 그에게는 정치가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하게 정치를 위해 몸을 던졌다. 항상 준비하고 검증하고 분석하며 발로 뛰어다니는 노력하는 정치인의 자세를 지켜왔다. 지역 정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정치적인 꿈을 품게 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우연히 들른 국회의원 유세장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모습을 보고 정치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게됐다. 그 후 유세장을 따라다니며 후보자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으며 스스로 웅변 연습을 시작하기도 했다. 정치가로서의 길을 걷기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시절 어느 국회의원의 의정보고대회에서 한 참석자가 "국회에서 발언 한마디도 못했다면서요"라는 농담 한마디에 그 국회의원이 얼굴이 붉어져 "말은 안 해도 속은 있습니다"라며 퇴장하는 씁쓸한 모습을 지켜본 후 새로운 정치를 열어보겠다는 뜻을 굳혔다.

"정치는 사람과 사람이 조화롭게 살게 하기 위한 종합 예술입니다. 있는 지 없는 지 모를 정도로 드러나지 않게 물 흐르듯 법과 제도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현재의 정치는 사람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공동의 아름다움을 공유해 가도록 도와 주는 것이 정치인들의 할 일입니다. 때문에 정치인은 고압적이고 권위적으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명확한 근거에 의거해 논리적이고 대안을 제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이의원의 정치 소신은 뚜렷하다. 또한 정치인이 지켜야 할 자세도 분명하다. 그가 지방 의정활동을 펼치면서 내걸은 소신이 '경영의정'이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식 의정활동이 아니라 미래를 제시하고 정책적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경영의정이라는 것은 사전 감사적 기능을 활성화함으로써 시행착오를 줄여가자는 것입니다. 지금의 정치는 아무런 검증없이 정책을 입안한 뒤 뒤늦게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뒷북 의정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것은 지역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입안된 정책이 시행되기 전에 철저한 검증과 분석, 연구를 통해 정책의 잘못된 부분을 시정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시민들을 위한 진정한 정책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선출직 공직자 무보수 명예직 만들어야

그는 정치적 소신을 말하는데 있어서 만큼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그는 자치단체장, 지방의원 등 모든 지방 선출직 공직자들의 보수체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가 부의 축적 수단으로 악용되기 때문에 비리가 생겨난다는 논리다. 따라서 모든 선출직 공직자들을 무보수 명예직으로 만들어 보람과 봉사자의 역할을 다한다면 신뢰받는 정치 풍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방의원의 정당 공천제도를 폐지해 다양한 봉사자들이 깨끗한 정치를 만들어 가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전국 광역의회 의원들이 보수를 지급해달라는 연명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지요. 이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출직 공직자의 모든 보수체계를 없애 자원봉사자적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소신입니다. 정치가 부의 수단이 되어서는 깨끗한 정치를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선거도 국가의 돈으로 치르는 공영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치권에서 더 이상 돈이 발붙이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정치소신이 뚜렷하다면 그동안의 의정활동에서 자신의 소신이 반영됐는지 궁금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이의원은 자신만만하다. 대전시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세가지의 신념을 갖고 일했다고 말한다. '시의원의 눈으로 보지말고 시민의 눈으로 보자' '사회적 약자 편에 서자' '사회 정의로 판단하자'라는 신념아래 민생현장을 누볐다.

"행정부가 제출한 조례나 정책 등에는 행정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예전의 것을 답습하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이런 것들을 그냥 책상에 앉아서 시의원의 눈으로 보면 어떤 것이 시민들을 위한 것인지를 알 수 없어요. 주민들이나 장애인 및 노인 등 소외된 계층을 찾아다니며 불편한 점을 듣고 이를 자료로 만들어 논리적으로 개선시킴으로써 시민의 혈세가 낭비되는 것을 막았고 조금이나마 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주민 찾아다니는 가난한 정치인

이의원은 돈이 없는 가난한 정치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는데 무슨 정치를 하려 하느냐는 말을 하지만 그에게 돈은 필요치 않다. 돈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장점으로 생각한다. 돈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이 발로 뛰어 다녀야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주민들의 접촉이 많아지고 그것이 자산이 되었다. 지역구 행사에 참석해도 주민들에게 밥을 얻어 먹고 오는 경우도 많다. 17개 사회·시민단체에 관여하고 있지만 그들도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정치활동은 돈이나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과 발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몸을 던지고 발로 뛰어다닌 것이 오히려 도움이 돼요. 하지만 지역구민들의 애경사를 챙기는 일은 정말 힘들더군요. 그래서 묘안으로 애사에는 조화를 보내고 경사에는 직접 만든 시화 작품을 액자에 넣어 전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지요. 마음으로 선물한 것이라 그런지 오래 간직하고 좋아하더라고요. 시화작품은 한달에 30개정도 만들어 선물하고 있어요."

이의원은 국문학과를 졸업한 현역 시인이다. 청림글문학동인회, 한국공무원문학협회 등에서 20년 가까이 문학활동을 해왔다. 금강 물줄기와 접해있는 12개 지역의 작가들에게 창작의욕을 심어주기 위해 금강문학·금강시대라는 계간지를 발간하는 발행인이기도하다.

이의원의 고향은 충남 부여다. 부여에서 출생해서 고등학교까지 부여에서 자랐다.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의원은 6살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자라왔다. 초대읍장을 지낸 아버지는 어려운 농민들을 위해 보증을 서주며 농약과 씨앗을 살 수 있도록 해줬다. 하지만 어려운 농민들은 대출금을 제대로 갚지 못했고 아버지가 읍장을 그만둔 후 고스란히 빚으로 떠 안게 됐다. 보증을 서줬던 빚을 갚느라 가산을 모두 날려 학자금을 못낼 정도였다. 이 때부터 가난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의원은 떳떳하게 살며 남을 도우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실천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어 초등학교 시절 학자금을 스스로 마련해 보겠다고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어린나이에 국궁장에서 화살을 주워 다 주기도 했고 졸업식장에서 꽃장사를 해서 학용품을 사 썼어요. 부여가 관광지다 보니 가이드 노릇도 했고요. 처음에는 부끄럽고 힘들기도 했지만 이 때 행한 아르바이트가 저에게는 소중한 기억입니다. 어린 몸으로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립심을 길렀고 가난이 어떤 것 인가도 배웠으니까요."

영안실 아르바이트 등으로 학비 충당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의원은 본격적으로 정치가의 꿈을 펼쳐보겠다는 생각으로 육사를 지원했으나 몸의 흉터 때문에 고배를 마셨다. 결국 숭전대학교 국문과로 진로를 바꿨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학업과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큰누나가 결혼 때 받은 패물을 팔아 첫 번째 등록금을 대주었어요. 그 이후로는 스스로 학자금을 충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요. 캠퍼스 내에서 구두를 닦았고 삼성동 시장에서 짐꾼 노릇도 했어요. 또 저수지 낚시터를 돌며 김밥을 말아 팔았고 충남대병원 영안실에서 염을 해주기도 했지요. 대규모 그룹 미팅을 주선해주고 돈을 벌어 보기도 했어요. 힘들고 냄새나는 일이었지만 절박한 상황이라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각오였지요. 그 때 정말 많은 사회적 경험을 했습니다."

고된 아르바이트 속에서도 과대표나 문학동호회 회장을 맡는 등 정치가가 되기 위한 지도자 수업은 계속됐다. 80년 숭실대와 대전대의 분리운동이 벌어졌을 때 투쟁위원장을 맡아 15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는 학원자율화를 외치는 학원자율화의 선봉에 섰다. 혼란스런 정치상황이 그를 소위 말하는 운동권 투사로 바뀌게 했다. 급기야 이의원은 84년 11월13일 새벽 공권력에 의해 대전교도소에 수감됐고 5개월여를 차가운 감방에서 지내야 했다. 출옥한 후에는 출판사 외판원 일을 하며 기독청년협의회 등 단체에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정치가로의 꿈을 키워가며 리더역할을 했던 것이 당시 정치상황과 맞물려 투사로서 활동하게 만들더군요. 결국 5개월여의 투옥생활을 거쳐 출옥하니까 복학도 안되고 갈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민주화 단체에서 투쟁을 계속하며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도 열었어요. 88년 복권될 때까지 암울한 시대를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힘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신상의 편안함을 찾을 것인가, 편안함보다는 사회정의를 위할 것인가'하고 말이죠. 잘못된 현실에 대해 비판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어요."

대덕밸리는 대전의 미래

이의원은 시민단체들의 권유로 91년 광역의원 선거에 출마를 결심했다. 그러나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본 그는 꿈에 그리던 정치 무대 입문을 앞두고 결연하게 포기를 선언했다. 돈이 난무하는 선거는 그가 그리던 정치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였다. 서민들과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로 찾아다니며 낮은 자세로 7년여의 수업을 거친 후 98년 정치무대의 전면에 나섰다.

그의 고향은 부여지만 성장의 터전이 된 대전을 사랑한다. 특히 대전을 사랑하는 마음과 쾌적한 환경, 지역경제 활성화만이 대전의 밝은 미래를 던져준다고 굳게 믿는다. 3대 하천 살리기에 앞장서고 대전사랑운동본부를 만들어 대전의 정신을 심어주려 노력한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교통과 환경문제를 걱정하고 스포츠구단 후원회를 맡아 결집을 유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대덕밸리에 대한 그의 생각은 상상을 넘는다.

"대전은 21세기 성장잠재력이 가장 높은 도시입니다. 이는 첨단과학기술의 집적단지인 대덕밸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덕밸리는 대전의 미래입니다. 대덕밸리에 집중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세계적인 스타기업을 만들어 내고 이 기업을 주축으로 하청문화를 조성해야 대덕밸리가 세계화됩니다. 또한 아일랜드와 같이 외국인 기업들에 대한 지원 정책을 마련해서 세계적인 기업을 대덕밸리에 유치해야 합니다. '첨단기술은 있으나 벤처 육성 정책은 없다'라는 대덕밸리 벤처기업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대전을 위해 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행정경험을 쌓으며 직접적인 봉사의 기회를 갖기 위해 구청장 출마를 준비하고 중앙무대로의 진출을 꿈꾼다. 개인적으로는 대전을 효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사회 약자를 위한 정치, 지역경제를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는 구상도 있다.

그는 마당발이다. 어떤 이는 '약방의 감초처럼 안 끼는 곳이 없다'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 대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참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대전을 사랑한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전의 비전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 여기저기 이름을 걸어 놓는 게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전의 미래를 가꿔간다. 그래서 그에게는 가식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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