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시합마다 태극조끼 입고 응원

 고학생 뒷바라지 기자·검사 키우기도

 괴짜 인생 - 아리랑 응원부장 박용식씨


대전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박용식씨(40)는 축구에 미친 사람이다.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만사 제쳐놓고 축구장으로 달려간다. 그가 거리를 지날 때면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낯이 익기 때문에‘이름은 모르지만 어디에서 분명히 봤는데…’라며 그를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의 공식 직함은 아리랑 응원단 응원부장이다.
그 외에도 ‘꽹과리 아저씨, 태극 조끼 사나이, 태극마크 아저씨, 축구에 미친 사람’등의 수식어로 불리고 있지만 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런 수식어들보다 축구경기장에서의 모습을 설명하면 누군지 쉽게 알 수 있는 사람이다.
축구중계가 있는 날 우리 팀이 골을 넣으면 붉은 악마 응원단과 함께 어울려 태극기를 조끼로 만들어 입고 얼굴에는 태극마크 페인팅을 하고 꽹과리를 치며 몸을 흔들어, 보는 사람들마저 축구장 분위기에 빨려 들게 하는 사람 그가 바로 박용식이다.

국가대표간 축구 경기가 있거나 월드컵, 올림픽 축구가 열릴 때면 장사를 제쳐놓고 서울행 기차를 타거나 20여일씩 외국을 다니며 한국팀을 응원한다. 물론 모든 경비는 자신이 부담한다. 대전시티즌 홈경기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관중석 중앙에 나와 목이 쉬도록 '시티즌 파이팅'을 외쳐대고 이리저리 오가며 꽹과리를 쳐댄다. 축구는 그의 모든 것이다.

나이트클럽 웨이터 생활로 가정 꾸려

그는 누구보다 불우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3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5 남매가 끼니를 굶어가며 배고픔이 무언지, 피눈물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자랐다. 먹고살기 위해서 안 해 본일 없었다. 공장 생산직 근로자로 일하면서 손이 성할 날이 없었고 나이트 클럽 웨이터까지 정말 돈 되는 일이라면 악착같이 매달렸다.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셨지만 몸이 좋지 않아 실질적인 가장 노릇은 그의 몫이었다.
비록 돈이 없어 그는 공부를 못했지만 동생들에게만큼은 그런 아픔을 물려주기가 싫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옛 말을 떠올리며 동생들과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나이트클럽 웨이터 생활을 하면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 학업을 마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아원 원생들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고 명문대에 입학하고도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하려는 학생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고아원 원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은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그가 웨이터 생활로 모은 돈으로 어렵게 음식점을 운영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그는 집도 없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어머니가 주방일을 봤고 형님이 카운터와 홀 서빙을 맡았다. 그러면서도 고아원아이들을 돕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돈 없어 배우지 못한 설움을 이렇게 라도 풀지 않으면 안됐다.

불우 이웃돕기에 인색 안해

또 한번은 TV에 나온 안타까운 뉴스를 접하고 10년 이상을 한 가정을 뒷바라지했던 적도 있다.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이 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할 형편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방송국을 찾아가 등록금을 전달했다.

“등록금 전달 후 학생집을 가게 된 적이 있었어요.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병든 홀어머니 모시고 공부하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제 어릴 적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그 집의 가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학교 때문에 서울에 가있는 자식을 대신해서 매달 어머니를 찾아가 보살피고 생활비를 전달했다. 그것만으로 그의 가장역할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서울대 진학한 학생에게는 군대를 제대하고 언론고시를 준비하려는 형이 있었다.

“어떻 하겠습니까. 그 집의 가장노릇 하기로 했으니 제대로 해야지요. 서울에 방을 하나 얻어 줬어요. 아무생각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해줬죠. 물론, 어머니는 제가 계속해서 돌봐 드렸죠. 그런데 언론고시가 힘들긴 힘든가봐요.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수 차례 떨어지더군요. 결국 2년 만에 서울의 모 신문사 기자로 입사해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동생은 지금 서울대 법대를 졸업해 사법고시에 합격 현재 사법연수원에서 연수를 받고 있는 중이다.
이 정도 뒷바라지를 해줬으면 그만 두어도 좋으련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두 형제가 모두 서울에서 생활을 하니 어머니가 대전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없는 돈을 모아 서울에 세 식구가 살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기까지 했다.

그는 많은 매스컴과 인터뷰를 가졌지만 축구 이외의 얘기를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무척 쑥스러워 했다.

가정에선 빵점자리 아빠

최근에 그는 또 한번의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유성구에 거주하는 소년, 소녀 가장을 돌보는 일이다.

“제가 생활에 여유가 있으면 많은 사람을 도와 주겠지만 사실 제 형편도 썩 좋은 편이 못되거든요. 그래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돕질 못해요. 검사, 기자를 만들어 놨으니 그 사람들은 이제 그만 도와도 되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 돕던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유성구청 복지과 손진분씨의 소개로 소년, 소녀가장 2명을 돕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후원자들처럼 한 달에 한번 온라인으로 돈만 부쳐주는 그런 후원자가 아니었다.

“저는 생활비를 꼭 현금으로 직접 전달해 줍니다. 단순히 물질적으로 만 도와주는 후원자가 아니라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고민과 인생상담을 해줄 수 있는 형, 오빠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어서죠”라며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일 수록 물질의 빈곤보다 외로움으로 인한 사회에 대한 반감을 갖는 것이 더 안타까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도 어머니와 부인 자식이 있는 한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축구에 미쳐있고 남 돕는 일에 미쳐있으니 가정생활은 어떨지 궁금했다.

“부인한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해외 응원 나가 있으면 아이들 중에 한 명이 꼭 아파요. 그때 애 엄마 심정이 오죽하겠어요. 제가 가정에서는 빵점 짜리 남편, 아빠일 겁니다. 그래도 제 마음만은 평생 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부인 오순기씨(38)와의 사이에 두딸 지은(12)이와 지영(8)이를 두고 있다.

94년 미국월드컵 때 아리랑 응원단과 인연

그럼 그가 왜 축구에 미치게 됐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94년 미국월드컵 지역 예선전 마지막 경기로 기억이 됩니다. 우리선수들이 북한을 이기고도 고개를 떨구며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아!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며 머리를 싸매고 고개를 떨군 순간 갑자기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라크가 극적으로 일본과 동점을 만들어 우리가 월드컵에 진출하는 순간이었죠.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몸에 막 소름이 돋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 행을 결심하게 됐다. 마침 조선일보에서 김흥국씨를 단장으로 100명의 응원단을 모집하고 있었다. 두 번의 망설임도 없이 응원단에 지원하게 됐다.

그가 수많은 응원을 다니면서도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경기가 있다. 그가 첫 응원을 했던 미국월드컵 스페인전과 도쿄에서 열린 98년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 일본전이다.

스페인전의 경우 2 : 0으로 패색이 짙었고 누구도 우리가 비기리라는 예상을 못했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정말 말 그대로 극적인 동점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교민들과 한데 어울려 눈물을 흘려가며 아리랑을 불렀던 기억은 그를 축구장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계기 중에 하나이다.

또 한번 감격은 이어졌다.
98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이 열리던 도쿄. 그 경기는 어머니를 모시고 응원에 참석한 특별한 날이었다. 어머니가 옆에서 같이 응원해준 덕분 이였을까. 이민성의 발끝에 걸린 공이 골네트를 흔들었을 때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것도 그가 태어나서 가정 즐거운 꿈. 그 꿈같은 일은 현실이었다.
이것이 그가 축구장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운명적인 경기였다.

“외국 축구장에서 울려 퍼지는 우리의 사물놀이는 단순한 사물놀이가 아닙니다. 교민, 유학생, 그리고 고국의 국민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끈과 같은 존재죠. 이런 끈을 제가 묶고 다니는 겁니다. 하나의 끈으로 묶인 사람들이 ‘코리아 화이팅’을 외칠 때 가슴이 뭉클하고 뜨거운 피가 심장을 두드리는데 그 기분을 말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기쁨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다. 축구장을 찾는 것은 저의 사명입니다”

원정응원 땐 상대응원단으로부터 생명위협까지 느껴

응원 다니다 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정경기 시 홈팀이 지고 있을 경우 경기장 분위기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살벌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1차 예선 태국경기 때가 그랬다.
우리가 태국을 3 : 1로 꺾고 승리를 확정짓는 순간 날아오는 빈 병과 돌을 피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예선 중국과의 경기는 중국 공안이 동원되는 심각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중국이 경기에 패하고 나자 10만 중국관중이 우리응원단을 둘러싸고 움직이지 못하게 해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한 체 불꺼진 경기장에서 2시간 동안 불안에 떨기도 했다.
그런데도 계속 축구장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떤 불상사를 당할지 모르지만 항상 축구장을 찾을 겁니다. 응원을 다니면 한순간에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난 관중에 떠밀려 밑에 깔리게 되면 그냥 죽는 거죠. 그래도 저는 축구장을 떠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축구에 미친 사람이니까요”
그와 얘기를 나누는 중에 자꾸 머리 속에 애국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우리는 그를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축구에 미쳐 생업은 안중에도 없고 축구장만 쫓아다니는 팔자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기고 남 돕는 일에 자시의 희생을 아끼지 않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요즘 또 하나의 일을 꾸미고 있다. 우리나라 축구응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축구전시관 식당을 준비중에 있다. 1년 전부터 월드컵 개막이전에 오픈을 목표로 준비해온 식당은 그동안 외국과 국내 경기장을 돌며 응원했던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어 준 태극 조끼를 비롯해 국내 축구응원에 관련된 용품들을 전시할 계획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제가 축구경기장에 나갈 수 있는 기력이 있을 때까지 우리나라 축구팀을 응원할 겁니다”영원한 축구인으로 남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2002 한·일 월드컵이 어려운 경제가 회복되는 하나의 전환기가 될 수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라고 해도 나라를 생각해서 이번 월드컵에 관심을 갖고 국가대표팀과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선수단에게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축구장에서 태극조끼를 입고 얼굴에 태극마크 페인팅하고 힘차게 ‘코리아 화이팅’을 외치는 그의 모습을 계속 지켜볼 것이다.

박용식 홈페이지 : my.netian.com/~pys2002 손 전화 : 017-402-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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