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싶어

 차세대 인물 탐구(문화예술)- 류기형 우금치 대표


우금치로 가는 길은 힘들었다.
대전에서 금산행 국도를 따라 추부 터널 아래 동네에서 오른 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우금치 사무실이 있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금치는 우금치였다. 갑오동학혁명 당시 공주 우금치를 탈환하기 위해 동학 농민군들이 힘들었던 것처럼 마당놀이패 우금치를 찾아나섰던 7일에도 눈보라 속에 길은 험난했다.
한차례 길을 잘못 들었다가 레커차의 도움을 받아 다시 입구에 있는 자그마한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우금치 단원 함석영씨(34)의 안내로 겨우 사무실을 찾았다.

우금치가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대전시 동구 하소동 677번지.
당골로 불리는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태봉암이라는 굿당이 있다. 굿하는 장소로만 빌려주는 암자로 주변 일대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 지금은 하소동이라는 행정동명이 있지만 당골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바로 신기(神氣)가 골짜기에 어려있다는 것이다. 길잡이를 한 함씨의 얘기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우금치에서 개를 여섯 마리 키웠는 데 이유없이 죽어나갔다. 신기가 너무 강해 짐승들이 자랄 수가 없다는 해석을 달았다. 그러고 보면 입구의 굿당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무당의 기운이 센곳이어서 굿당이 생겨났다는 게 주민들 얘기다. 이래저래 독특한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에 우금치가 비집고 들어왔다.
동리 사람들은 우금치의 입성을 매우 반기는 분위기였다. 신기(神氣)가 센 이곳을 시끄러운 북과 꽹과리로 그 기운을 눌려주어야 마을이 평안해진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만난 류기형 대표(40)와는 구면이었다. 지난 해 8월 마당극 연출가 최초로 국립 창극단 연출을 맡았을 적에 한차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류씨는 '우리가 모시러 간다니까 오다가 차가 빠졌지 않았느냐'는 농담과 함께 잠시 접견중인 손님과의 면담을 끝내고 오겠다며 집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에는 대전시청 출입기자 명단이 붙어 있었고 옆에는 마당극단 우금치 단원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기자단 명단은 홍보를 담당하는 기획부서 이신애씨와 함께 쓰는 사무실이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가 나타났다.

시민과 함께 하는 사업 통해 인식 전환

〃지금은 사회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80, 90년대만 해도 마당극하면 '운동권의 예술집단'으로 연결되었지요. 진보적인 내용을 담았다는 내용적인 측면도 물론 있지만 시민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저희 쪽의 여전한 진보적인 목소리가 다양화된 사회 속에 묻혀버리는 것 같아요.〃

그는 사회인식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하면서 '다만 시민과 함께 하는 사업을 통해 인식을 전환시키고 저 하는 노력은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진보적인 목청이 다양한 사회 구조 속에서 작아지면서 여유도 생겼다. 바로 사회 민주화라는 일방적인 주제에서 탈피, 여성, 환경, 노인문제 등을 다룰 수 있는 주제의 음폭이 넓어졌다. 좀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주제이지만 선택의 폭이 커졌다는 얘기였다. 과거 사회성 일변도의 구성에서 이제는 예술적인 부분이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는 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마당극하면 데모하는 데로 알려졌는데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로 자리 매김을 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게 아닙니까. 한국적인 연극을 지향하고 야외극이라는 특수성을 살리면 그게 경쟁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1998년도 콜럼비아에서 있었던 세계 거리극 축제에서 이런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 것이 극찬을 받았습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

우금치는 어떻게 운영이 될까. 산골짜기에 틀어박힌(?) 우금치가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 모습도 궁금했고 운영방식도 물어보고 싶었다.

〃현재 단원은 모두 14명입니다. 오전 9시에 출근하여 오후 5시에 퇴근을 합니다. 공무원과 똑 같지요. 연습은 하루종일 합니다. 공연 연습은 물론이고 판소리, 전통 춤, 심지어 체조까지 이 곳에서 연습을 합니다. 평소에 여러 가지를 연습해 두면 작품에 따라 필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단원들은 이곳에서 1년만 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현재 4명은 상주하면서 연습장을 돌보지만 기본적으로 1년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야 한다. 거의가 대전에 있는 대학교 졸업자들로 구성은 되었으나 출신지는 다양하다. 단원 중에는 전통한복을 디자인하다가 들어 온 사람도 있고 대학교에서 탈춤 연구반에서 활동하다가 북소리, 장구소리에 이끌려 골짜기를 마다 않고 찾아온 사람도 있다.

갑자기 '웽! 웽!'하는 바람소리가 산골을 갈랐다. 순식간에 어두워지면서 금새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쳤다. 눈과 바람이 한데 섞이면서 마구잡이로 내렸다.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산골날씨를 감안하더라고 너무 변덕스럽다. 올 때도 고생했는 데 제 때 산을 내려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도대체 이런 산골에 왜 들어왔을까.

〃대전시 선화동 구 법원 뒤편에 처음에 연습장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방음시설을 해도 주변에서 소음이 난다면 연일 진정을 넣었지요. 우리 나름대로는 방음장치를 했지만 늦은 밤 연습은 주민들에게 소음으로 들렸던 가 봐요. 그래서 마음 편하게 연습을 하자며 아예 깊숙한 산골로 들어오게 되었지요.〃

마음껏 연습 위해 산골로 옮겨

지금 우금치 연습실이 있는 곳은 포도밭이었다. 약 500평 규모로 단원들이 직접 시멘트를 붓고 용접을 하고 페인트칠을 했다. 조립식 건물이지만 연습실과 기숙사를 짓고 축대를 쌓았다. 축대는 대전시의 협조로 걷어내는 보도 블록으로 올렸다. 연습실은 '쟁이 마당'이라는 문패를 붙였고 기숙사는 '터줏대감'으로 작명했다. 토속적이다. '열심히 연습해서 최고의 쟁이가 되라'는 의미가 있고 '터줏대감 처럼 우금치와 기숙사에 오래 머물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만큼 축대를 쌓는 데 고생을 했습니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을이 있어 웬만하면 포장이 가능한데 땅을 귀중하게 여기는 농민들이 꺼려서 진입로가 여전히 좁습니다. 그래서 여름 장마길이라던가 겨울 눈길에는 나아졌어도 오가기가 힘이 듭니다. 눈비에 민감하게 되었지요. 이곳에서 생활은 힘들지만 재미있습니다.〃

류기형 대표는 천안 사람이다.
충남 천안시 입장면 하장리에서 태어나 양대 초등학교, 입장 중, 천안고를 나와 충남대에 입학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요즘말로 '범생이'였다. 모범생이라는 뜻이다. 반에서 1, 2, 3 등을 다투었으니 그럴만했다. 어렸을 적에 마당극과 인연을 찾아보라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 국극이라고 있지요.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창극의 일종이지요. 약장수들이 꼭 국극단을 이끌고 왔습니다. 약을 팔기 위해 그랬지요. 여기에 애들은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할머니 치마폭을 잡고 몰래 들어가 보곤 했는 데 그렇게 재미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게 인연이었던 것 같다. 이후 한동안은 마당극과의 연(緣)은 연결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정말 되돌아보기 싫은 기간이었다. 2학년 전체에서 꼴등을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술도 먹었다. 이때부터 방황이었다. 고3때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하여 반에서 17등을 하였더니 선생님이 커닝했다고 혼을 낼 정도로 성적이 형편없었다. 어째든 공부는 깜냥 껏 열심히 했다. 대학 입학은 82년 B급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충남대 물리학과를 택했다.

고2때 성적은 전체에서 꼴찌

〃중학교 때 과학과 수학은 뛰어났어요. 학교를 대표해서 과학경시대회에 나갈 정도였으니까요. 박종관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데 그 분이 '과학에 소질이 있다'라고 저한테 자주 말씀하셨어요. 그게 학과 선택에 기준이 되었습니다.〃

대학에서는 탈춤연구회에 들어 간 것이 오늘날 마당극 쟁이가 된 계기였다. 탈춤 자체가 당시만 해도 학생운동 성향이 강했던 차에 83년부터 학내 시위가 본격화되면서 노래와 탈춤을 잘하는 류대표를 학생회에서 곱게 놓아 둘 리가 없었다. 의식화 수준은 높지 않았으나 노래를 잘하니까 데모대의 맨 앞에서 노래를 지도하고 탈춤을 가르치다보니 공부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학사경고 2회에 이어 84년도 3학년 1학기 때 제적이 된다. 공부도 문제였지만 시위대에 가담한 것도 판단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여기서 그는 사회문화패 결성 준비를 하고 85년 발족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85년도 발족을 눈앞에 두고 15일만에 입영영장이 떨어졌다. 강제 징집의 성격이 강했다. 그가 없는 사회는 여전히 굴러는 갔다. 85년 5월 놀이패 '얼카뎅이'가 태어났다. 얼카뎅이는 어이쿠 덩어리라는 농요에서 따온 방언이었다. 그 동안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87년 제대를 하면서 다시 시작을 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하지만 이때 강력하게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다름 아닌 부모님이었다.

〃'정신차려라.' '젊을 때 허송 세월하면 늙어서 후회하고 고생이다' 는 등 만류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군대 갔다오면 대개 정신을 차린다는 데 저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또 3남 1녀 중 장남이어서 더욱 극성이었지요. 특별법으로 제적생에 대한 복교도 가능했지만 저는 복학을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부모님 실망이 이만 저만 아니었지요.〃




군사정권시대 '해방이 온다'가 첫 작품

87년도부터 작품을 썼다. 첫 작품이 '보시오! 해방이 온다'였다. 아직은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남아있을 때였으니 주목을 받을 만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민중의 힘을 느꼈다. 공연예술의 힘을 피부로 느꼈다. 민주화 운동의 경향성이 더 강해지고 관중의 울고 웃는 과정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일년에 한 두 편씩 작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1990년도에는 우금치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전신인 놀이패 '얼카뎅이'가 대전충남문화협의회와 함께 노선싸움에서 흩어지는 해였기 때문이다. 한쪽은 마당극을 지향하면서 농민을 대상으로 했고 다른 한쪽은 무대극을 하면서 노동자를 주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니 양자간에 노선의 차이는 생겨나고 급기야는 둘로 갈라지는 현상을 보였다. 얼카뎅이 9명중 7명이 나와 마당극단 우금치를 만들었다. 그렇게 긴 산고를 거치면서 우금치는 태어났고 하소동 골짜기에서 굿판 벌이듯 신명나게 연습을 하면서 대전의 대표 극단으로서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 대전시에서 지원을 해주지만 쌀독은 전적으로 단원들의 책임이었다. 지난 한해동안 무려 107회를 공연했다. 3일에 한번씩 한 셈이다. 활동량에 비해 대가는 적으나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측면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낫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우리의 소리와 극에는 네 가지가 있다. 판소리. 창극, 마당극. 국극이다.
판소리는 소리로써 음악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고 창극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서양의 무대와 결합한 형태이다. 국극은 여자 배우만으로 구성된 창극이다. 어릴 때 국극단 약장수가 한번 다녀가면 읍내 총각들이 상사병을 앓곤 한 것도 여자들 탓이다.
마당극은 1960년대 대학가에 성행했던 번역극 중심의 시대적인 조류에서 우리 것을 찾자는 뜻에서 출발했다. 탈춤과 우리 연극을 결합한 우리의 삶을 바탕으로 한 형식이다.

국립 창극단 연출 경이적 기록 남겨

류씨의 창극과의 인연이 깊다. 지난 해 12월 21일부터 30일까지 국립 창극단 연출을 맡은 '토끼와 자라의 용궁여행'에서 인연은 시작되었다. 마당극 연출자가 창극을 맡아 이미 한차례 화제가 되었지만 공연마다 매진되어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한 작품을 25회 공연한 것도 처음이고 연인원 1 만명을 달성한 것도 최초의 일이다. 부산 롯데 호텔에서 초청이 들어왔는 데 돈은 달라는 대로 주겠다는 조건이다.
그는 '토끼와 자라....' 팜플렛에서 연출의 글을 이렇게 썼다.

「...과거 조선시대와 근대사회에서 형성된 우리의 건강한 전통문화는 공동체성과 집단 성속에서 만들어지고 향유되어 왔다. 판소리와 연극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창극의 현재 모습을 보며 예전에 관중과 하나가 되어 향유되던 판소리나 전통연희에서 잃어버린 건강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어린이 창극은 이러한 전통문화의 건강성 회복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연희자와 관중이 더불어 호흡하는 '얼씨구' '절씨구' '좋다'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데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마당극을 연출하고 배우로 출연하면서 즐거움은 찾았지만 여전히 작품 소재를 찾고 관중들의 반응이 기대이하 일 때 는 힘이 들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관중들의 바람이 늘 부담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늘 예술은 능력보다 삶의 한 부분인 만큼 성실이 우선한다고 단원들에게 강조하곤 한다.

〃우금치는 이 시대 우리 민족이 찾아야 할 연극이자 민족적 양식입니다. 마당극을 정립한다는 목적 지향성을 가지고 활동을 할 예정입니다. 저 역시 여기에 밑거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연출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작품도 쓰고 배우로서도 열심히 할 예정입니다. 이와 함께 창극을 바로 잡는데도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창극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독특한 양식입니다.〃

우금치 류대표를 인터뷰하고 돌아오는 길의 길잡이는 여전히 함석영씨였다. 앞이 온통 뿌열 정도로 눈보라가 휘날렸다. 밴형의 봉고차가 여러번 기우뚱했지만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잘 내려왔다. 추부에서 대전으로 올수록 길은 좋아지고 날씨는 화창했다. 대전에 들어오면서 길은 말라있었고 눈도 오지 않았다. 불과 20여분거리인데 날씨는 천국과 지옥이었다.
북과 꽹과리 소리 대신 대전은 자동차 경적소리로 꽉 차 있었다.
연락처 (042) 273-2629, 011-456-7620



  ″카리스마가 있는 성실한 연출인″

 홍보담당 이신애씨(33)가 본 류기형


"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도 항상 확신을 가지고 추진합니다. 그것이 모두에게 힘이 될 때가 많습니다. 카리스마가 있다고 봐야지요. 작업 방식이 힘들 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가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많이 줍니다. 1993년도 민족예술 큰잔치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열악한 재정 속에서 힘이 들것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추진위원 500여명을 확보,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또, 인간적인 면에서도 카리스마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스스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모든 훈련에 빠지지 않고 10여 년 동안 해온 아침운동을 매일 한다던가 기천무예를 닦는 모습에서 일상생활의 절제를 느끼게 합니다. 본인이 실천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에 배우들은 몸에 직접 와 닿는 부분이 많지요.
다만 글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면서 마감 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소식지와 외부 기고가 많은 데 앞으로 꼭 지켜주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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