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이웃 빵 나눠주기 계속할 것″

 차세대 인물 탐구(기업인)-임영진 성심당 사장


오늘은 아기 예수가 탄생한 성탄절.
성탄의 기쁨이 온 누리에 넘치는 날 이런 글을 쓰게 된 건 행운이었다.

「성자(聖者)가 된 빵장수」.
완료형을 쓰긴 했으나 그는 여전히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誠之者)이였다.
'최고에 달한 것은 하늘의 도(道)이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道)이다.'(誠者天之道, 誠之者人之道)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절대적인 목표가 하늘로 표현된 '완전함'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일이라는 해석이다.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없듯이 빵장수가 성자(聖者)는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목표를 위해 달리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성심당 임영진사장(48).
아마 이 글을 읽으면서도 쑥스럽고 겸연쩍어할 것이다.
그리고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주변을 돌아 볼 것이다.

' 대전에는 성심당이 있다.'
천안은 호두과자가 있다면 대전은 성심당이다. 과학의 도시, 행정의 도시와 함께 성심당을 떠올릴 정도로 지역의 명소가 되었다.

대전시 중구 은행동 153번지 성심당을 찾은 것은 성탄 3일전.
과자와 빵 속을 헤치며 신관 4층 사무실에 이르기까지 마치 동화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임사장과는 많은 인연이 있었다. 1988년쯤으로 기억된다. 대를 이어 가업을 하는 '창업 2대'라는 연재물을 쓰면서 처음으로 만났고 이후 종종 행사장에서 부딪히다가 2000년부터는 중구 제2건국위 활동을 함께 하면서 가끔 얼굴을 보게되었다.

모든사람이 다 좋은일 하고 싶어

4층 맨구석에 있는 사장석에서 인사를 나눴다. 홍보부장 김미진씨(43)를 소개했다. 성심당에서는 홍보와 장식, 인테리어 등을 맡고 있다. 일과가 끝나면 아내다. 인터뷰를 위해 3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홍보부장도 동행했다. 자연스럽게 부부인터뷰가 되었다.

경영철학을 먼저 물었다.

〃성서 로마서 12장 17절 얘기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게 하도록 하십시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직원, 고객, 거래처, 성심당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게 경영철학입니다. 이 말은 97년 작고한 선친 때부터 내려오는 모토지요.〃

그렇다면 경영목표는 어느 정도 이루고 있을까.

〃달성여부를 산술적으로 계산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위주의 경영을 하기 때문에 얼마나 이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들어오는 것도 그런 사람을 위해 쓰고 싶습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요. 크리스찬 정신을 위해 살고 구체적인 행동도 성서구절에 맞춰 살고자 하고 있을 뿐입니다.〃

'버는 것을 모든 사람이 좋게 여기는 일을 위해 쓴다(?)'. 좋은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잔뜩 벌어서 조금만 쓴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한 달에 얼마나 벌고 어느 정도 쓸까.

〃매월 수입은 7억원 정도입니다. 직원 260명 월급을 주고 여기저기 쓰다보면 거의 다 나간다고 봐야지요. 큰 이익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일이 좋고 많은 사람들도 이곳에서 일을 하니 좋지 않습니까.〃

한국전쟁이후 삶은 덤 인생

임사장은 월남가족이다.
선친 임길순씨는 함경도 함주군 출신이다. 공산당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종교적인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함주시장에서 사과 24개를 팔아 고비 때마다 묵주(默珠)를 보여주면서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까지 흘러왔다. 미군들이 철통같이 지키는 길목에서 묵주는 스파이가 아님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었고 종교적인 신념이 쉽게 상대 신분을 믿게 만드는 역할을 한 모양이다.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경영철학도 거기에서 나왔다. 선친은 늘 한국전쟁이후 삶은 덤으로 생각했다. 진작 죽을 목숨이었는 데 살았으니 좋은 일하자는 뜻이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에 태어난 임사장에게 덤 인생은 정말 살갑게 다가왔다. 만약 선친이 한국전쟁에서 돌아가셨다면 그는 태어나지도 못했으리라. 그렇다면 남을 위해 사는 삶은 타고났다고 봐야 옳다.

피난처 거제도에서 나온 후 1953년부터 진해에서 하기 쉬운 「함흥 냉면집」을 냈다. 결과는 야반도주였다. 무작정 서울로 가다가 내린 곳이 대전이었다.

〃대전역에 내려서 쓰레기를 한켠으로 치우고 시작한 게 찐빵장사였습니다. 1956년 겨울에 시작이 되었지요. 간판이 있을 수도 없고 기술도 밀가루 장사가 밀가루를 팔 요량으로 어설프게 가르쳐 준 걸 이용했습니다. 그때부터 '빵 나눠주기'는 시작되었지요.〃

헐벗고 배곯음 속에 찐빵은 귀한 음식이었다. 대동 달동네 담 너머로 던져주기도 하고 다리밑에 사는 거지들에게 땔감과 먹을 것을 싸다주었다. 모두가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게 직업이었다. 밀가루 값도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퍼주는 아버지와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어머니와 다툼은 당연히 있었다. 충돌은 있었지만 낭비가 아니라는 점에서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래서 잘 넘어갔다.

아버지는 1997년 돌아가시기 전에 주위 분들로부터 '좋은 일 많이 하셨다'고 말을 들었다.
그 때 '준 것보다 받은 게 더 많았다'는 말로 응수를 했다.

대전역에서 찐빵장사 시작

오전 11시에 인터뷰를 시작해 한 시간이 흘렀다. 마침 대흥동 성당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정말 가깝게 다가왔다. 하루에 세 번 울리는 삼종 중의 하나였다. 이때 천주교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간단한 기도를 한다.

이번에는 홍보부장 김미진씨가 답변을 했다.
〃빵장사를 하다가 아이들이 종소리가 나면 기도를 하게끔 1968년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당시 중동에서 성심당을 하고 있었고 잘되었는데 허허벌판인 지금의 자리로 옮기겠다고 하니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 때 물론 성당은 있었고요. 정말 1분 1초가 아쉬운 바쁜 시간에도 삼종때는 길 건너 성당에 다녀오곤 했지요. 저희들이 대흥동 천주교 신자 중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신자입니다. 모두 믿음에 대한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에게 천주교는 종교였지만 아들에게는 고역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녔는데 억지로 나갔지요. 안 다니면 맞으니까요. 정동에 있을 때 새벽미사를 졸면서 본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크면 안 해야지'라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큰다는 것, 그것은 아버지가 안 계시고 결정을 내 맘대로 하는 걸 의미한다.
그는 크기도 전에 안하려고 했다. 커서 했으면 무난할 법한 일인데도 말이다.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일이다. 자식을 키워보면 누구나 느끼는 일이지만 중학생은 부모입장에서 보면 어려도 한참 어리다. 2차 성장이 나타나면서 저들끼리는 다 큰 걸로 으쓱대곤 한다. 그런 녀석이 계란을 바위에 던졌다. 바로 종교적인 저항이었다. 종교의 자유라는 우주의 대 원칙을 아버지, 그것도 천주교로 무장된 아버지에게 던졌다.
성당에 못나가겠다는 말이다. 신앙의 자유를 향한 투쟁은 무작정 상경으로 나타났다.

〃중학교 2학년 때 3번 가출을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갔다가 잡혀오기도 하고 돈이 떨어져 연락하면 엄마가 와서 데려가기도 했지요. 이때 술도 먹고 담배도 피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너는 너무 일찍 담배를 피워서 키가 안 컸다'고 말씀하십니다.(임사장의 키는 163㎝)〃

회의 느낀 천주교 때문에 방황길 들어

딸 넷에다가 어렵사리 본 아들의 방황을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 까.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 한 명이 있기는 하지만 장남의 방황은 부모에게 너무 부담이 되었다. 방황은 중 3때까지 계속되었다. 공부는 끝에서 맴돌았다.

〃대전고, 충남고 원서를 쓰려고 하니까 선생님이 다른 친구들 응원단으로 갈려면 원서를 써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냥 가서 다른 친구들 시험 보는 데 허드렛일이나 하라는 말이죠. 그래서 간 곳이 유성농고였습니다. 지금이야 사정이 다르지만 그때는 대전에서 떨어지는 애들만 갔습니다. 충남고는 1학년 1학기초에 전학을 왔습니다.〃

한마디로 '문제아'였다. 담배와 술에다 공부까지 못했으니..., 더구나 70년대만 해도 군사독재를 하면서 나름대로 군대식 독재형 사회기강이 잡혀있을 때가 아니던가. 임사장만의 방황의 끝은 중3말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회는 누구도 몰라주었다. 공부를 죽어라고 해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고 유성농고에서 전학 온 놈이라며 아예 문제아의 시각으로 보는 주위의 눈도 그랬다. 그리고 한번 배운 담배는 왜 그리 끊기가 힘드는지.

충남고 1학년때 만 정학을 4번 당했습니다. 담배 때문이죠. 아버지가 공부하라고 도마동에 방도 얻어주셨는데 면목도 없었지요. 정말 찬물에 발 담그고 다리와 목을 묶어놓고 공부를 했습니다. 고시공부하듯이 했지요. 하면 뭐합니까. 성적이 올라가야지요. 한 번 기회를 놓치니까 정말 힘이 듭디다. 집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학교에서 못 알아들으니까 문제지요. 요즘도 아이들에게 '집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졸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해줍니다. 그때 기억 때문이지요.〃

얼마 전 만났던 임영호 동구청장이 '그 친구 학교 다닐 때 개구쟁이였다'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임청장 얘기로는 공부도 안하고 정학을 수시로 당해 공부께나 하는 친구들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고 아는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고교때 정학만 4번… 문제학생

하지만 열심히 한 공부에 결실은 있었다. 충남대 공대에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이후 생활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군대도 공군 장교로 가고 아버지를 돕는 일은 대학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천주교에 대한 사랑도 이해를 하고 가업 뿐만아니라 종교도 잇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아내와는 제대하던 해인 1981년 여름에 만났다. 한남대 미술교육학과 졸업을 앞두고 대성고에 교생실습을 나갔다. 거기에 박덕기 선생님이라고 있었는데 임사장의 친구였다. 한 달 동안 관찰 한 끝에 친구에게 소개를 해주었다. 인연은 그렇게 연결되었다.

〃빵집을 한다니 이상했고 아저씨 같아서 싫었습니다. 또 학생이 아니라서 더 그랬지요. 그런데 우리끼리 얘기하면서 '교수'라고 하자 '교수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지적해주고 '아줌마'보다 '아주머니'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것을 보고 철학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결정했지요.〃

성모여고졸업에다 카톨릭 신자라는 것도 결혼을 쉽게 만드는 촉진제가 되었다.
1982년 6월 웨딩 미사를 올렸다.
〃소개한 박덕기 외는 친구들이 다 반대를 했답니다. 아마 자기가 소개한 여자와 결혼을 않았던 탓도 있었을 겁니다. 사장님은 제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81년부터 아버님 일을 전적으로 맡아 일을 하다보니 데이트는 주로 전화로 하던가 밤 11시 이후에 이뤄졌습니다.〃

이번에도 홍보부장이 답을 했다.
마침 전화가 왔다. 손님과 얘기중이니 일단 미사부터 가고 판공 성사 후 수녀님에게 얘기하라는 내용의 말을 전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막내 아들 대혁군(16)과의 통화였다.
대혁군 외에 선양(20), 마리아양(10)이 임사장 식구다.

친구 소개로 결혼 골인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일수는 없다.
1986년 뉴욕 제과가 바로 옆에 가게를 얻었다.
골목을 차지하려면 골목대장을 먼저 잡아야 하는 걸까.
대전 제빵업계 골목대장 성심당을 진압하기 위해 코앞에다 문을 열었다. 승부는 너무 싱거웠다. 전통과 고객 우선의 성심당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쪽으로 갔던 고객들이 오히려 성심당을 찾았으니 문고리만 잡아 준 셈이 되었다.

인근 수정다방을 사들여 확장을 하고 본관을 건립한 일, 그리고 옛날 자리에 신관을 지은 일등은 역시 경영방침과 같이 모든 이에게 좋은 일을 하겠다는 철학에서 비롯됐다. 세상일이란 우연은 없지 않던가. 임사장이 경영권을 잡으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도입하고 인테리어를 통한 환경변화, 신제품 개발 등 성장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결정을 해야 할 때 옆에서 보면 '까짓 것 그걸 해버리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신중합니다. 말하자면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느긋하고 순리적으로 기다리면서 일을 합니다. 〃
아내 김미진씨의 말이다.
부부가 함께 일하다 보면 의견이 상충될 때도 있을 텐 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는 낮에는 철저하게 직원으로서 있습니다. 제 업무 외는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20년 정도 함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원들 대부분이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우리 부부가 모범이 되어야 직원들도 아름답게 보고 나중에 저런 가정을 꾸며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게 아닙니까.〃

데모군중 빵 제공…기관서 '성심당 없애라' 지시

사업에 위기는 없었을까.
6.29선언 직전에 대전역과 대흥동 성당 주변은 온통 데모천지였다.
남은 빵을 데모대에도 주고 전경에게도 나눠주었다. 그게 문제가 되었다.
학생들은 전경에 빵을 주었다고 돌을 던졌고 정보기관에서는 데모대를 문제삼았다. 그 때 기관에서 위생과에 성심당을 없애라고 지시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경찰에서 통조림을 빌미삼아 입건을 하기도 했으나 검찰에서 기각시켜 버린 일도 있었다.선행이 문제가 되는 사회, 이는 분명 잘못된 사회였다.

또 하나 뿐인 남동생과의 서로 다른 사업 마인드도 임사장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형은 성심당 본관과 신관 운영에 전념하고 동생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통해 성심당의 부가가치를 높여 가고 있다.

임사장의 빵에 대한 열정은 거의 병적이다. 외국을 나가면 관광은 커녕 자그마한 빵집에서 호텔 빵까지 다 훑고 다닌다. 타산지석을 삼겠다는 뜻이다. 성심(聖心)이라는 상호처럼 살겠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벌어주신 돈은 올바르게 쓰는 것이 앞으로 살 방향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즐기는 오토바이는 지금 그에게 유일한 취미이다.
선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임사장과의 인터뷰는 오후 2시에 끝이 났다. 돌아오는 길은 평소와는 달리 양보하고 짜증내지 않으면서 잠잠한 마음으로 운전을 했다.


″온 몸에서 따스한 정이 느껴져요 ″

직원 이진선양(24)이 본 임사장


성심당이 남은 빵을 불우이웃에 나눠주는 일은 대전이 다 아는 일이다.
하루 평균 20-30만원 어치를 나눔의 빵으로 쓰인다. 몇 년 전까지 만 해도 임사장이 직접 담당했으나 사세가 커지면서 이진선양이 이 일을 하고 있다.
〃전화를 해서 이 만큼 남았으니 필요하면 쓰시라고 합니다. 매일 일정하게 나눠주지는 않지만 수용인원에 맞춰서 나눠 드립니다. 고맙다는 전화도 자주 받지만 저는 심부름만 하는 셈입니다. 먼저 약속된 곳도 있는 데 다른 곳에서 달라고 할 때가 가장 어렵습니다. 사장님은 참 존경스럽습니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가끔 뵐 때마다 잘 지내는 지하고 자상하게 묻습니다. 그런 점이 좋아요. 특히 이름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 데 이름을 불러주면 정말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요. 인정으로 직원을 대해주시고 사업을 상업적으로 하지 않고 따스한 정으로 하는 것 같아 좋습니다.〃


 ″항상 웃는 얼굴 신부님 같아″

친구 박철용씨(48)가 본 임영진


〃생활에 일관성이 있고 술을 좋아하지만 흐트러진 적이 없습니다. 자제력이 대단하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도 도덕성을 보입니다. 그게 경영자의 덕목이라고 봅니다. 어떨 때는 천사같은 느낌을 줍니다. 항시 웃는 얼굴이며 모습 그대로 검소합니다. 친구들이 훌륭한 인격을 가졌기 때문에 어려운 고비에서도 살아났다고 봅니다. 빵에 대한 신뢰를 절대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지요. 다만 결정에 과감하고 카리스마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과 직원을 생각해서 위험한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으면 합니다. 학자와 같고 신부님과 같은 사람입니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