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어렵긴 마찬가지예요″

  대전시향 박종호씨



프로야구 원년 우승멤버가 교향악단 수석 연주자가 되었다면 일단 관심의 대상이 된다.
프로야구와 음악은 과연 같은 음역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당사자를 만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자리에 앉자 마자 ′왜, 어떻게′변신했는가를 물어보았다.
″방위병 복무를 하면서 공을 던지는 오른 쪽 어깨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제대 후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야구선수 생활을 계속하려고 했습니다만 그때 후유증으로 결국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전시립교향악단 콘트라 베이스 수석 단원 박종호씨(37).
그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주였다.
그런 야구선수가 방망이를 놓게 된 이면에는 ′부상′이라는 타의적인 요소가 있었다.
OB 베어스 창단 멤버인 박씨는 아직도 원년 우승의 감격을 잊지 못하고 있다.
″코리안 시리즈 원년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죠. 만 18세의 나이에 선배들과 함께 야구를 하면서 주전보다는 대타 요원으로 많이 기용되었습니다. 지금도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선배들이 저를 행가레까지 쳐 줄 정도로 많이 귀여워해 주었지요.″

방위병 복무·인대 부상이 전환 계기

박씨의 야구 인생은 말 그대로 탄탄대로였다.
선화초등학교 4학년때 야구 글러브를 잡은 이래 한밭중 때는 체육부장관기 우승을 일궈내는 주역을 담당했고 대전고 재학시절에는 청룡기 4강에 진입하는 등 양지쪽에만 있었다.
적어도 방위병으로 입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82년 고교 졸업후 약관 18세에 당시 대전을 연고지로 하던 OB베어스에 스카웃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교생을 직접 프로팀에서 데려간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선수의 기량이 그만큼 뛰어나거나 장기적인 투자를 생각해서 기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씨의 경우 유망주였다.
프로팀에서 물론 주전은 아니었지만 필요할 때 대타요원으로 나가 한방씩 때려내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82년 원년 우승으로 프로 야구의 역사에 남게 되면서 더 훌륭하고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야구를 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던졌습니다. 야구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만큼 몰입했습니다.″

84년 방위병 복무 명령이 떨어지면서 야구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는다.
″바깥 날씨가 매우 추웠던 2월로 기억합니다. 조치원에서 훈련을 받는 도중 오른쪽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부상 당시에는 군기가 바짝 들어 몰랐는데 내무반에 들어와 보니 통증이 계속돼 인대가 늘어났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인대 부상이 방위병 복무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야구선수의 생명을 끊어놓는데는 결정적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팬들은 떠나갔고 야구도 멀어졌다.

좌절과 방황에서 음악 사랑으로

혼자서 재활치료를 하며 복귀를 노렸으나 역시 한번 늘어난 인대는 원상회복이 불가능했다.
그리고는 좌절과 방황이 시작되었다.
″평생 배운 게 야구인데..., 하면서 부상에서 오는 좌절감 때문에 허탈했지요. 그리고 바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심정을 지금에서야 편안하게 과거 일로 얘기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실의에 빠졌습니다.″

박씨 가족 중 여동생이 콘트라베이스를 하고 있었다.
목원대 음대에 재학중이었는데 묵묵히 드러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꼭 필요한 기능을 하는 콘트라베이스는 자신의 성격과도 흡사한 악기였다.
부드럽고 남 저음 목청과도 같은 소리에 매료되고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실의의 날을 보낸 지 1년 후였다.
음대 입학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3루에서 스퀴즈라도 하듯 음악이라는 홈을 향해 질주했다. 대전시내 음악학원에 등록을 하고 미친 듯이 연습을 했다. OB베어스에서 원년 우승을 일궈낼 때만큼 음악에 몰두를 했다.

1년 공부해서 음대에 들어갈 정도면 재능을 타고났던가 아니면 목원대 음대가 약했던가 둘 중 하나였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그는 멋 적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만큼 재능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목원대 음대는 그야말로 알아주는 대학이었다.
″동생이 하는 콘트라베이스 영향을 많이 받았죠. 또, 음악을 좋아했다는 점도 음대를 택하게 된 동기죠. 지금도 그 때 선택이 잘됐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야구보다 음악이 더 좋아

야구와 음악,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둘 다 어렵고 힘듭니다. 전문직이라는 것이 힘드는 원인이지요. 음악이나 야구 모두 전문가가 되기 위해 파고 들어가야 하고 더 잘해야하기 때문에 힘이 들죠. 음악을 즐기는 사람과는 틀리죠. 음악을 한다는 것은... 그렇지만 야구보다는 음악이 더 좋아요.″

지금은 야구 생각이 나지 않을까. 야구중계를 보면 내가 저 화면에 주인공이었다는 과거는 어떻게 정리를 하고 지낼까 궁금했다.
″야구는 음악의 길로 들어서면서 잊어버리려고 노력을 하죠. 야구중계를 해도 그냥 야구를 하는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지나치죠. 아무튼 음악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대학생활은 콘트라베이스에 대한 모든 것을 자세하게 알아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것이 박씨에게는 즐거움 이상의 기쁨을 주었다. 82년 고교 졸업 후 꼭 10년 만에 대학을 마쳤다.
이와함께 캠퍼스 커플 인 반려자도 음대에서 첼로 연주자로 만났다. 지금은 충남교향악단에서 첼로 리더로 활약하고 있는 김현실씨다.
″함께 독일에서 음악 공부도 하고 미국 인디에나 주립대학 박사과정을 거쳐 연주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많이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됩니다.″

박씨는 지난 7월 11일 대전시립교향악단에 입단, 수석단원이 되었다.
″시립교향악단 적응을 위해 노력하고 많은 연주를 해보고 싶습니다. 연주할 때 재미보다 긴장감이 감돌아 힘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을 말하라면 대개 좋은 연주하고 발표회 등 여러 가지를 말하는 데 저는 열심히 음악만 하겠다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
추억이 되어 버린 야구를 뒤로하고 또 다른 생을 개척해나가는 박씨의 삶은 ′극적인 변화가 새로움을 가져다 준다′는 말을 되새기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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