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일제의 맥 끊기 흔적 남아 있어

 지역 한 승려 중창추진 화제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마음이 그렇고 생각이나 이상 등은 존재하지만 볼 수 는 없다. 혹자는 이를 하느님, 극락 등의 실체를 입증하는 데 원용하면서 종교적인 신뢰도를 높여 가기도 한다.
만약 지금 이 글의 독자가 보이는 것만 믿는다면 다른 곳을 클릭하는 게 좋다. 풍수지리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개태사 복원이 국운 회복의 길」
드라마 태조 왕건이 시청률 1위를 오르내리는 요즘, 개태사를 중창해야 나라가 평정을 되찾고 남북한이 통일된다며 법력을 기울이는 승려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서기 936년 왕건이 후백제를 격멸한 후 창건한 이 절은 한반도에 가장 요충지여서 국운이 여기에서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폐허로 남아있어 나라가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취재는 익명을 전제로 시작되었다. 기사작성 편의상 그 승려의 법명을 '중광'이라고 표기하기로 했다.
개태사가 위치한 천호산(天護山)은 호랑이 형국이다. 호(護)는 곧 호랑이(虎)를 의미하며 풍수학상으로 보면 호랑이가 오른쪽으로 누워 고개를 아래쪽으로 오므리고 있는 상이다. 남북으로 뻗어있는 도로를 따라 시선은 전라도를 바라보고 있으며 꼬리는 몸쪽으로 역시 당겨져 있다. 그래서 개태사지의 삼존미륵석불입상이 깔고 있는 돌은 용바위이다.용과 호랑이가 마주보면서 바위는 서로 바꿔 갖고 있다. 개태사가 위치했던 곳은 바로 호랑이의 머리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옛날에는 8만9암자가 있었고 승려 또한 수천명이 상주하여 사하촌이 될 만큼 풍성했다. 오늘날에도 호랑이 등을 따라 수많은 암자와 자그마한 절이 자리한 것도 결코 우연치 않는 일이라는 게 중광 스님의 주장이었다.

호랑이·용이 여의주 갖고 노는 형국

반대편에 있는 계룡산맥 또한 개태사의 지리적인 중요성에 비중을 더 해주고 있다. 행정 구역상 연산(連山)은 산을 이어주는 곳으로 계룡산과 대둔산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계룡맥과 대둔맥에 고리와 같은 중요한 지역이 바로 개태사 일대라는 뜻이다. 여기에도 역시 용(龍)의 흔적은 곳곳에서 보이고 마애석불이 들어서 있다. 개태사 맞은 편에는 호두바위가 있다. 용의 꼬리가 감고 도는 곳이 송정리이고 천호봉에서 마주 보이는 곳이 용근(龍根, 용의 성기)부분이다. 호랑이와 용이 서로 감싸고 여의주를 갖고 노는 형국의 지형이 바로 이 지역이다.

〃전국에 호랑이 기운을 띤 지역이 많지 않습니다. 안팎으로 완전히 호랑이 기운이 들어서 있습니다. 대전의 정신적인 기맥은 계룡이 잡고 있으나 현실적인 측면에서 바로 천호산의 호랑이 기가 펼쳐져야 합니다. 해동성국 국운의 흐름을 바로 이곳에서 내포하고 있습니다.〃
중광스님의 말이다.

역사적으로도 개태사의 중요성은 여러 곳에서 입증되고 있다. 태조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의 목을 친 곳도 이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견훤이 운주성 싸움에서 실패하고 금산사에 유폐 된 후 왕건을 도와 아들 신검을 무찌르고 개태사로 끌고 왔다는 것이다.
도선대사가 말한 「도선비기」 또한 이렇게 적고 있다.
'삼한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전쟁으로 인한 민심을 수습하고 화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이 자리에 절을 세워야 한다.'

견훤 아들 신검 목 벤 역사적 장소

〃지금이 삼국시대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눠져 있고 남한 또한 영호남을 갈라져 있지 않습니까. 국운이 분열되는 것도 이 자리가 확실하게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방의 수행자가 왜 이런 일에 관심이 많으냐고요. 이곳이 바로 서지 않으면 분열상태가 계속되고 남북 통일도 어렵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에 나서도 있습니다.〃

개태사 주변이 명당이라는 것은 일제의 침략 역사에서도 간접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고려 말부터 잦은 왜적의 침입도 우연한 건 아니다. 박인계장군이 공민왕 원년에 싸우다가 전사한 일이나 미륵 삼존불상이 불심으로 왜적을 막았다는 전설은 호랑이 기를 꺾기 위한 왜구들의 노략질이었다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먼 내륙까지 쳐들어와서 노략질을 했느냐는 문제이다.
더구나 일제강점기에는 맥을 끊기 위한 여러 가지 흔적을 남겼다.
바로 개태사 앞산에 위치한 용석(龍石)을 산산조각 낸 일과 마애불상을 가른 일이다.
용석은 여의주인 만큼 돌이 반짝거리고 있다. 주민들에게는 수정을 캔다는 명목으로 맥을 없앴다. 높이 약 20미터에 달하는 용석 파괴현장에는 지금도 돌이 방금 전에 깨뜨린 듯 이끼하나 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돌이 살아있다는 건 명당이라는 뜻이리라.
뿐 만 아니다.
마애불상은 아예 불상 뒤에 돌을 약10여미터 잘라버렸다. 주민들은 일제가 불상을 파괴하고 싶었으나 천벌이 두려워 차마 이루지 못하고 바위를 부셔 맥을 차단했다고 믿고 있다. 일제의 맥 끊기는 여기서만 그치지 않고 있다. 개태사가 마주 보이는 곳에 위치한 바위 또한 계룡맥과 천호산의 정기를 없애기 위해 잘려져 나갔다.



일본인들 용석 조각내고 마애불상 잘라

〃일본 사람들이 처음으로 개태사를 방문했을 때는 삼존불이 누워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한테도 절을 못하게 했다는 전설은 뭘 말합니까. 반드시 복원을 하여 국운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시기라는 시대적인 배경도 있었겠으나 카리스마를 이루기 위해서 미륵을 자칭한 역사가 많았다. 궁예가 미륵불을 자칭한 것이 그렇다. 법상종의 석총스님은 왕건이 대권을 잡기도 전에 간자(簡子)를 주었다. 간자는 미륵불을 증명하는 물건이다. 그 간자를 왕건의 진전(일종의 초상화)과 함께 개태사에 모셔졌다는 일도 역시 터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일화가 되고 있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도참설이 성행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역사를 종종 보아왔다. 나라가 어렵게되면서 혹자는 또 다른 형태의 혹세무민이 아니냐는 주장을 할 수 도 있다. 하지만 개태사 복원은 문화재 재생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굳이 중광스님의 말이 아니더라도 복원은 진지하게 다시한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정치가 진흙탕 싸움을 계속하고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면 한 승려의 정신없는 주장으로만 치부할 일만은 아니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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