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대서 학술대회 열려


일제 강점기 대전·충청지역 학생운동을 총 정리하는 학술대회가 15일 배재대 인문과학연구소 주관으로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는 대전과 충남지역 학생들이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 통합한 1930년을 전후한 공주, 대전, 예산의 학생운동을 집중 조명, 충청지역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구심체 역할을 했음을 부각시켰다.
특히 그동안 부분적으로 알려졌던 학생운동을 체계화시키고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시켰다는 점에서 이날 대회는 참석자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불러왔다.
학술대회 발표 요지를 게재한다.


예산농업학교 항일 학생운동

홍성찬(공주대 예산산업과학대 교수)


1930년을 전후로 예산 농업학교에는 극일(克日)을 위한 독서회, 좌익협의회, 예산학생동맹, 토요회와 금요회 등 몇몇 단체가 비밀리 조직되어 활동을 하고있었다.
이들은 문화계몽활동을 통하여 반일 사상을 길러왔으며 특히 1930년 5월 경성에서 에스페란토어를 배워 온 동료 김규환으로 부터 외국어를 배우는 등 언어연구를 통해 항일학생운동 세력을 확대시켜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격적으로 일어난 것이 21 맹휴(盟休)사건이다.
광주학생운동과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있고 난 후부터 일본은 예산지방의 학생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1932년 5월 중순부터 예산시내 이강오의 집 등 여러 곳에 은신하면서 모임을 갖고 광주학생운동에 버금가는 행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던 중 6월 학교측에서 학교 실습장에 묘(苗)를 짜라는 무리한 학생동원령을 내리자 이를 계기로 항일의지를 드러내게되었다. 또, 학교측은 실습용 미루나무 조각을 1인당 1,000개씩 가져오라는 과중한 숙제를 내자 드디어 억눌려있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을 뿐 실상은 조선학생들의 민족적 자긍심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이같은 배경을 잘 말해주고 있다.
박정순등 주동자들은 동원령은 3학년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전교생이 등교거부를 선언하는 방법을 택하자고 결의, 동맹휴학 선언을 통해 항일투쟁 목표를 명백히 하기로 했다.
이들이 내세운 주장은 △ 장마 중 노력동원의 부당성 △ 반민족적 처사의 시정 △ 한국학생을 차별하는 교사들의 태도개선 △ 한인 교사수의 증대 등이었다.
결국 경찰의 압력과 지방유지들의 권유로 처음에 뜻을 굽히고 등교했으나 여전히 학생들의 숭고한 뜻과 민족 자존의 정신은 후대에 까지 전달되고 있다.


공주고등학교의 항일학생운동

정내수(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1920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충남지역의 동맹휴학은 대부분 抗日民族的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일제강점기 당시 충청남도에서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던 공주고등학교(이하 일제 당시의 학교명인 공주고등보통학교를 공주고보로 약칭함)에서는 1926년, 1927년, 1929년 세 차례의 동맹휴학이 확인된다.
1926년 4월 26일 순종(純宗)이 승하하자 3·1운동 이후 쌓인 민족 감정과 망국의 서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공주고보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서 전교생이 참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학생들의 일방적 주도에 의한 결의를 학교 당국에서도 제지하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6월 10일에 1명뿐이었던 한국인 金大熙 선생을 모시고 전교생이 모여 서울을 향하여 망배(望拜)하고 망곡(望哭)하면서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염원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볼 때 1926년 6월의 동맹휴학은 순종의 승하로 민족적 비애를 느끼고 있던 조선인 학생들의 순수한 민족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발생하자 3·1운동 이후 쌓인 민족감정과 망국의 서러움을 견디지 못하는 울분이 각지에서 팽배하게 되었다.
동맹휴학 결과 학생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학생들에게만 많은 손실을 입혔고, 반대로 학교 당국의 입지는 강화시킨 모양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동맹휴학은 근본적으로 학생들의 항일 민족 의식에 바탕을 두고 단행되었기 때문에 학교 당국의 강경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이후 계속적인 동맹휴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접한 공주고보 학생들은 12월 2일부터 전교생이 일본인 교사배척과 민족차별에 대항하는 맹휴투쟁을 단행하였다. 공주고보 맹휴사건은 학교 당국의 가혹한 처벌과 일경의 강경한 탄압으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 이후 동맹휴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공주지역 학생들의 끈질긴 저항을 보여 주었다.
같은 시기 같은 공주지역의 영명학교에서도 광주학생운동 직후인 1929년 12월과 1930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서 동맹휴학이 발생하였음이 확인된다.
공주고보에서는 '명랑클럽'이라는 비밀결사가 확인된다. 1936년 3월 중순 공주 산성공원 웅심각에서 6명을 동지로 하여 명랑클럽을 결성하고 항일운동의 주자로 발족하였다.
1942년 6월에 그 동안 회원들이 유언비어를 살포하고 일본 순사를 폭행한 사실이 협소한 주점에서 회원중의 한사람인 천영관의 취중 실언으로 밀고되었고, 조선인 형사가 헌병대에 고발하여 대전헌병대 대원에게 체포되어 명랑클럽 회원 전원이 압송되었다.
공주고보의 명랑클럽 활동은 1930년대 중반까지의 사회주의 색채를 발견할 수 없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성격만을 발견하였다.
1930년대 공주고등학교의 비밀결사운동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교육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에도 기여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대전중학교 학생운동

김형국(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


대전중학 학생들은 1930년을 전후하여 급격히 몰락해 가는 지역민의 상황을 목도하고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결합한 사회운동 단체는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에 결성된 '충남전위동맹'이었다.
대전중학 학생운동 세력이 본격적으로 충남전위동맹에 참여하게 된 시점은 충남전위동맹이 단체의 명칭을 대전전위동맹으로 바꾸고 상향식 조직체계를 정비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던 1932년 6월을 전후한 시점이다.
대전중학 학생인 권용두가 소속되어 있던 '소년동맹'도 대전전위동맹의 운동노선 전환과 함께 6월 19일 해산집회를 갖고 해산직후 권용두가 중심이 되어 '대전중학학생반'을 조직한다.
이렇게 결성된 대전중학학생반은 군시제사노동반과 함께 대전전위동맹의 핵심적 조직단위가 된다.
학생반은 책임자에 권용두, 교양부 오명근, 재정부 서재윤 등이 주축이 되었고 매월 화합을 통하여 사회과학에 대한 학습과 토론을 벌였다. 이후 박병배, 장두진과 일본인 학생인 편산겸장 등이 가담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
이후 이들은 대전지역에 대한 경제적 착취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총독부의 제사공장'으로 불리는 군시제사대전공장에 조직을 결성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펼치게 된다. 당시 군시제사대전공장은 충남지역 양잠농민들로부터 싼 가격에 원료를 공급받아 막대한 이윤을 남기면서도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으로 유명하였다.
대전전위동맹과 군시제사공장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1932년 10월경으로 이들은 군시제사의 노동자인 송태빈, 서상복, 이종성을 대상으로 임금, 열악한 식사, 장시간의 노동에 대하여 비판하고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일제와 자본가에 대항할 것을 교육하게 된다.
대전그룹의 운동방향에 동조한 송태빈과 서상복은 동료직공인 이병철을 규합하여 반 조직을 구축하고 대전전위동맹과 대전중학학생반과의 몇 차례에 걸친 회합과 치밀한 준비작업을 거쳐 11월 7일 동맹파업에 들어간다.
이들이 노동쟁의 기간에 내건 6개의 요구조건은 △노동을 단축하라 △임금을 인상하라 △인종차별을 반대한다 △식사를 개선하라 △조선인의 해고를 반대한다 △삼본교육계장과 길전인사계장을 면직하라 등이다.
한편 대전중학학생반은 동맹파업과정에서 연행된 노동자들의 석방을 위한 가두시위와 대전경찰서 앞 연좌농성을 주도하여 지역민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군시제사대전공장의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의 7일간의 치열한 투쟁과 대전전위동맹, 대전중학학생반의 측면지원으로 회사측이 모든 요구조건을 수용함으로써 승리로 끝맺게 된다.
이처럼 1932년 군시제사동맹파업은 우발적으로 일어났던 같은 시기 제사업 노동쟁의와는 달리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전개되었고 단순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한 노동쟁의의 성격을 넘어서 일제의 가혹한 지배와 경제적 착취에 저항한 지역민의 저항운동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대전중학학생반은 동맹파업의 계획단계부터 적극적인 지원으로 노동자의 힘을 실어주었으며 지역민들에게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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