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노인 함께 하는 동네 축제

 금산 신대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아이들이 그린 아빠, 엄마의 얼굴이 만국기 사이사이에 끼워져 바람에 펄럭인다.
대둔산 정기와 유등천 맑은 물이 흐르는 충남 금산군 복수면 신대리 신대초등학교. 가을이 익어 가는 26일 이곳에서 순박하기 그지없는 농촌아이들의 운동회가 열렸다.

엄마 손잡고 언니 운동회 구경 나온 꼬마 친구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가을걷이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계절이지만 오늘만큼은 아빠, 엄마도 한껏 멋을 내고 학교에 나와 아이들을 응원했다.

전문식(51)교감 선생님의 개회선언으로 기다린 운동회가 시작됐다.

오랜만에 학교 나들이를 하신 할머니들이 화창한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신대초등핵교 행사만 할라믄 비오더니 오늘은 비안오니께 이상하구먼, 저녁에 올라구 그러나"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마 옛 시절이 생각난 모양이다.

초등학교 때 행사는 비와 연관이 많았다. 기실 그것은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어린 가슴을 너무 아프게 했기 때문에 행사 때만 되면 비가 왔다는 기억을 하는지 모른다. 어째든 초등학교시절 행사만 하면 그 날은 어김없이 비가 온 게 우리들의 기억이다.

"학교에 있던 이무기가 용이 돼서 하늘로 올라가는데 소사아저씨가 창으로 찔러 죽여 용이 원한을 품고 학교행사 때마다 비를 내린다"
그때 떠돌던 전설은 지금 생각하면 황당무계하다. 하지만 당시는 진짜처럼 들렸다.

날씨는 맑았고 하늘은 높았다.
지도교사의 호각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며 본격적인 운동회가 시작됐다.
한쪽에서는 100M달리기가 벌어지고 운동장 가운데서는 3, 4학년의 '만수무강하세요'경기가 한창이다.
신대초등학교 가을운동회의 주제는 「주민과 함께 하는 효 실천 가을운동회」이다. 그래서인지 학부모와 동네어르신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이 준비 되어있었다.

'만수무강하세요'는 운동회에 참석한 노인들을 모시고 음식상을 차려 대접하는 게임으로 참가한 할아버지들이 무척 좋아했다. 도시에 살고있는 손녀 뻘 되는 학생들이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절을 하니 "아이구, 고맙다. 고마워"를 연발했다.

하얀 천막을 친 본부석에는 복수면 유지들이 전부 모였다. 복수면장을 비롯하여 파출소장, 농협 조합장, 노인회장 등 기관장들과 인근 주변의 초등학교 교장들까지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고 있었다.

심한식교장 선생님(59)은 손님맞이에 정신이 없었다.
"옛날은 운동회 하면 사람들로 북적북적했어요. 이농 현상이 워낙 심해 학부형들과 동네 어른들 전부 모셨어도 이 정도밖에는 안되네요. 하지만, 아이들이 소박하고 성실해서 교사들을 잘 따르고 학부형들도 학교 일에 적극 협조해줘서 도시에 있는 학교 부럽지 않습니다"
은근슬쩍 학생들과 학부형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천상 신대초등학교 교장이다.

오전 프로그램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종목은 '동심속으로'라는 내빈 경기였다. 그동안 점잔 빼고 앉아 있던 기관장들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 굴렁쇠를 굴리는 모습이 아이들 노는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참가자들은 굴렁쇠가 생각처럼 굴러가지 않자 "환장하것네! 옛날에는 선수였는디,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네"라며 죄 없는 세월을 탓해 보기도 한다.

경기에 참석한 주정식(60·금산군 복수면 신대리)학교 운영위원장은 학교의 산증인이다.
"제가 이 학교 52년 8회 졸업생입니다. 신대간이학교로 34년에 개교했고 43년부터 신대공립국민학교로 승격되면서 졸업생을 배출했죠. 15년간 모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작년에 명예퇴직 했습니다. 지금은 운영위원장으로 학교에 봉사하고 있죠. 지금은 이렇게 썰렁하지만 82년까지만 해도 12학급에 60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죠. 그때 운동회는 학교 운동장이 좁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 참여했어요. 참 대단 했었죠"

하루종일 마이크를 잡고 경기진행을 하는 김잠숙(31)선생님의 솜씨가 왠만한 TV진행자 못지 않았다.

다들 즐겁게 웃고 떠드는데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경환(13)이가 울고 있다. 리코더부 합주에 옷을 잃어버려 참가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경환이 작은 엄마가 김잠숙(리코더부담당)선생에게 SOS를 청했다. 한걸음에 달려가 경환이를 달래는 김선생 모습이 꼭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친누나 같아 보였다.

기다리던 점심시간. 삼삼오오 나무그늘 아래 자리를 펼쳤다. 밤새 준비한 김밥, 삶은 달걀, 찐 밤 등 운동회 점심 메뉴는 20년 전이나 비슷했다. 번데기 장수, 솜사탕 장수도 여전히 운동장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정겨웠다.



자모회에서는 동네노인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노인들 대접하는 모습에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농촌의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흥겨운 사물놀이로 오후의 문을 열었다.
곧이어 운동회의 하이라이트 줄다리기.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학부형들의 힘찬 응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아이들은 "영차∼, 여엉차∼"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붓는다.

오늘의 마지막 경기 릴레이 경주가 벌어졌다. 청군과 백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제법 재미를 더했다.

최종결과는 604:554로 청군 승리.

흙 먼지 속에서 하루종일 아이들과 함께 뛰고 뒹굴었다. 몸은 피곤하고 지쳤지만 돌아오는 차안에서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이유는 무얼까.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순수하고 인정이 넘치는 우리네 이웃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신대리.
올 추석에는 자녀들을 데리고 아빠, 엄마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들러 보자. 그 동안 잊고 지냈던 내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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