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인재·생산관리로 ′지옥탈출′

 남선기공 성공스토리


IMF(국제통화기금)이후 지옥행 기업은 많았지만 다시 살아 나온 업체는 극히 드물다.
경영에 사형이나 다름없는 '화의'를 선고받은 업체가 회생했다면 '기적'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3년만에 수 백 억원 대에 달하던 부채를 0 베이스로 만들었다면 더 이상 말은 필요없다.

대전1공단 내 밀링 머신 전문제조업체인 (주)남선기공.
공원같은 공장을 만들겠다던 사장의 경영 철학이 IMF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이 회사 손종현 사장(53)은 지금도 농담처럼 말하고 있다.
〃천당에 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지만 지옥에 떨어졌다고 해서 낙담할 일도 아닙니다. 화의 상태에 있는 저희 회사가 살아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중역 중에서도 회사가 끝났다고 포기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니 할말이 없었지요.〃

국가적인 위기 극복에는 역부족

1950년 3월 1일.
한국전쟁이 터진 해 삼일절 만세사건 기념일에 남선기공은 대전시 동구 원동 골목에서 자그마한 가게로 문을 열었다. 화천기계와 쌍두마차를 이루며 국내 선반제조업계를 이끌어 오던 이 회사가 어렵게 된 것은 97년 IMF이후의 일.
창업 1대 손중만 사장에 이어 2대째를 맞아 착실한 경영으로 내실을 다지면서 매출과 기술 집적도에서 앞으로만 달려왔으나 역시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조그마한 중소기업이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98년 어느 날로 기억된다.
손사장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기자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부도 직전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경영자로서 좌절과 빚쟁이들의 행패 등이 겹치면서 사업가로서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고 생활인으로서도 극심한 무력감에 빠져있었다.
당시 그의 말이 생생하게 기억이 되고 있다.
〃아버지가 창업하신 ′남선′이라는 이름을 이어주고 종업원만 책임진다면 누구에게든 인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작은 살림집만 마련해주면 더 조건을 달지 않겠습니다. ″

'남선'이름만 이어주면 넘길 터

97년 말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매출은 끝을 예측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작기계가 한 달에 20여대만 팔려도 회사를 끌고 갈 수 있었지만 상황은 원하는 쪽과는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매월 판매대수가 15대, 10대, 5대에서 마지막에는 2대까지 떨어졌다. 판매가 전혀 안되었다는 말이다. 외환 위기 이후 설비 자본재인 밀링 머신은 신규 투자가 없으면 구매를 하지 않기 때문에 감량경영이 기업체 전반의 분위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흐름은 당연한 진전이었다.

회사가 의욕만으로 이끌어 지는 집단은 아니다.
당초 자신이 의도한대로 싱가포르의 엑셀사에 매각을 타진했다. 하지만 역시 장사꾼의 논리에 순수한 의도는 제압 당해 버렸다.
성장의 탄력을 잃었다고 판단한 상대회사는 매각 협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가격이 더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협상은 지지부진하게 되어 오히려 의욕만 꺾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죽기보다 싫은 '화의' 신청

그래서 기업인으로 죽기보다 하기 싫은 ′화의′를 위해 법원을 찾아갔다.
98년 6월 19일의 일이었다.
화의는 채권단에서 동의를 해야 가능하며 법정관리와 다른 점은 경영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채권단 대부분은 설득되었으나 지방은행을 인수한 하나은행에서만 동의를 얻지 못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화의는 개시결정이 떨어졌다. 법이 요구하는 이상의 채권단 승인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외환위기의 깊은 수렁 속에서도 남선기공이 일관되게 유지해 온 것은 기술력이었다. 인력관리, 즉 고급인력의 유출을 최대한 방지하면서 임금 체불은 단 한차례도 하지 않았다. 어렵지만 인재를 아낄 줄 알았고 결국 이것이 언젠가는 회사 회생에 절대적인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구조조정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어떻게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경영자들의 고민거리였다. 경영에 부담을 덜면서 기술력을 그대로 보유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동전에 양면같은 인력과 임금, 그리고 기술력의 조화는 이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화천기업에서 잔뼈가 굵었고 1983년에 입사해 생산책임을 맡고있는 이계성 공장장(63)의 말이다.
″구조조정은 정말 예민한 부분이었습니다. 노조와의 관계, 그리고 효과적으로 해야한다는 문제 등으로 인해 고민거리였지요. 그래서 직원의 절반은 소사장제를 통한 아웃소싱을 주는 형태를 도입했고 나머지는 회사 직원으로 남기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정확한 구조조정, 직원들의 땀이 주효

그 판단은 주효했고 정확했다.
소사장제를 도입하고부터 경기가 어려울 때는 소사장 스스로 몸집을 줄였고 좋아지면 바로 채용해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남선기공은 회사 직원과 소사장 직원이 반반이다.
다만 업무 분담은 고급 기술의 경우 직원들이 담당하고 일반 기술은 소사장들이 맡아서 관리하면서 톱니바퀴와 같이 한데 어울려 밀링 머신을 생산해내고 있다.

노력에 대가는 반드시 있었다.
구조조정과 더불어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60년대 구호를 도입했다.
사장이 유럽으로 뛰고 영업이사는 미주로 달리고 영업과장은 동남아로 나갔다.
국내 시장도 완전히 정비했다. 시장경제원리를 대리점에 도입했다. 누구든지 많이 파는 능력만 있다면 제한하지 않고 대리점을 주겠다는 개방형으로 바꿨다. 말하자면 고양이는 색깔보다 쥐만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가 필요했다.
7개에 불과하던 국내 대리점이 60개로 늘어났다.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판매도 덩달아 늘었다.
김시중 영업이사(46)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리점제를 폐지하고 기계를 파는 업체는 반드시 현금으로 대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물론 회사에서도 대리점에 담보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리점 마진도 크게 늘려 주었습니다. 그러니 하나 팔던 업체가 기를 쓰고 두 개를 팔려고 했지요. 매출이 신장될 수밖에...″

화의 3년만에 부채율 0 달성

98년 54억원, 99년 160억원, 2000년 244억원....
이 정도면 정상적인 기업의 매출 신장이라고 보기 힘들다. 기적에 가깝다.
수출 위주의 전략과 성공적인 구조조정, 그리고 동종업체의 외환위기로 인한 도산 등은 남선기공이 다시 설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었다. 거기다가 계속해서 유지해 온 기술력은 왜 남선이 살아날 수밖에 없는 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지난해는 전국 공작기계업체 매출액에서 6위를 차지했다. 대우종합기계등 대기업을 제외하면 1등이다.
화의 당시 부채는 210억원. 지금은 예금과 대출을 상계하고 공장에 남아있는 재고를 따지면 ′부채 0′이다.
화의상태에 있는 기업이 부채를 갚으려고 하니 이번에는 은행에서 제발 갚지 말라고 사정을 한다. 그리고 오히려 신기술 개발 자금으로 최근에는 저리로 10억원을 융자해주었다.
불과 3년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공원같은 공장을 만들겠다던 남선기공은 지옥에서 살아났다.
여기에는 경영자의 종업원을 아끼는 자세와 치밀하고 철저한 생산관리,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전 직원의 땀이 녹아있다.
아직도 많은 기업들이 IMF의 깊은 터널 속을 통과하고 있다. 대전공단의 작은 기업 남선기공의 성공스토리가 이들에게 교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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