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문화] 힐러리 클린턴의 '살아 있는 역사'를 읽고

우리 집 아이가 대 여섯 살 때이다. 아이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니네 엄마 안경 벗으면 어떻게 되냐?" 그 아이의 부모는 안경을 끼지 않고 있어서 인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우리 집 아이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응, 자는 얼굴이 돼."잠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안경 끼고 있는 내가 안경을 벗었을 때는 자고 있을 때였던 모양이다.

며칠 전 아이가 "엄마는 언제 웃어요?" 라고 물었다. 이런 식이라면 아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안경 끼고 있을 때는 늘 심각하고 자신을 야단칠 꺼리만을 찾거나 안경을 벗고 있을 때는 잠자고 있는 이미지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내 엄마를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나는 과연 그러하며, 내 엄마 역시 그러했던가?

2년 전 재미있는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여성, 삶의 이야기 10인 전'이라는 전시였다. 김백봉, 김유덕, 김성녀, 박남옥, 박정희, 박청수, 윤석남, 이효재, 황혜성, 정신대할머니 열 분의 인생을 담은 전시였다. 그분들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도 하고, 그분들의 삶을 인터뷰하여 책자도 만들었다. 책자의 후기에 이렇게 썼다.

'한번쯤 멈추어 남의 인생을 찬찬히 들여본다. 그곳엔 분명 내 삶도 있었고 꿈도 있다. 어느 결엔가 놓쳐 버렸다고 생각해 온 꿈이지만 누군가는 그 꿈을 하나하나 다져가며 살아온 삶이 있다. 그들 역시 충족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않지만 자신의 꿈을 향해 좇아온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흔적을 들여다 본다... 이제 나의 삶도 역사 된다. 역사를 소중히 간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내 삶에도 너의 삶에도 꿈이 있어 더욱 소중하다. 그 꿈이 역사가 된다.'

최근 힐러리 로댐 클린턴의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를 읽었다. 2년전 내가 썼던 글을 두 개의 단어로 압축해 놓은 것 같다. 여름이 오면 뒹굴거리며 재미있게 책 한 권 땠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을 올 여름 이 책으로 이룬 것 같다.

내가 아는 힐러리는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이었을 뿐이었다. 이 책을 통해 힐러리 로댐이라는 한 인간이자 여성이 꿈꾸어왔고 이루어왔던 삶이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슴 한가운데서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며, 미국의 여자아이들이 좋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누구나 그렇게 살수는 없지만 삶의 모델이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리고 우리의 사춘기 여자아이들도 이 책을 읽었으면 싶었다. 엄마들이 읽고 딸에게 권했으면 싶은 책이다.

얼마 전 서울에 갔다가 로댕갤러리에서 전시중인 '오노 요코' 전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여성작가가 전시하면 그의 작품보다는 사람 여성을 먼저 보게 된다. 그 전시회는 오노 요코의 삶의 일대기이자 작품이기도 하였기에 더 그러했을 것이다. 오노 요코 역시 이제까지 나에게는 존 레논의 부인이며 침대 위에서 존 레논과 누워서 인터뷰하여 신문에 나왔던 요란한 일본 여성이었을 뿐이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오노 요코라는 여성이 삶의 방식과 생각, 철학까지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다소 어렵고 난해한 점도 없지 않으나 생각을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다시 오노 요코를 읽고 싶었다. 언제 다시 갤러리 숍에 가서 오노 요코의 팜플렛 책자를 사서 읽어보아야겠다.

우리는 언제까지 단편적인 시선에다 편견까지 가세하여 한 여성을 누구의 남편으로, 가십으로만 스쳐지나가면서 보게 되는 것일까?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다가 간신히 책으로 또는 전시로 나마 뒤늦게 미안해하며 만나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책이 필요하고 전시가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뒤늦은 씁쓸함만이 남을 뿐이다.

그나 저나 우리 집 아이를 위해 나도 무엇인가 해야할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엄마도 웃고 다닌다는 것을 알게 해 줄 수 있을까. 웃는 사진을 집안 가득 붙여 놓아야 할까보다.

이춘아 시민기자(47)는 부산 출생이다. 한밭문화마당(대전시 서구 만년동) 공동대표로써 지역 문화예술 살리기와 청소년과 여성의 역할 찾기에 앞 장 서고 있다. 여성학과 교육학 전공을 살려 여성정책연구소에서도 오랫동안 일해왔으며 현재 대전시 여성정책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근까지 대전MBC 라디오프로그램에서 '여성문화 찾아가기'코너를 맡아 여성시각으로 바라보는 문화이야기를 다루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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