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무대에서 일어나는 국가 간의 이해관계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논리와 정서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사실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존재는 미국의 영향력을 단 한 시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 국가의 모든 결정과정에는 미국의 입장이 고려되어야 했다. 그런 관계는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고착화해 미국은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고마운 나라'라는 선입관으로 깊게 각인되어 왔다.

그런 미국의 이미지와 권위가 세월을 따라 변화를 겪게 된 으뜸 이유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예전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 탓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의 수준이 미국의 속내를 쉽게 알아차릴 만큼 향상되었기 때문이라고 할까. 아무튼 어느 샌가 미국이 하는 일을 무조건 추종하던 지구촌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랫동안 힘과 지혜를 독점하고 있던 미국의 위상이 이번 이라크 침공을 통해서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라크를 쳐들어가고 있는 미국은 '혈맹'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진 대한민국의 참전을 바라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결국 소규모의 공병대와 의무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 폭발하는 반전 및 참전반대여론에 떠밀려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당초 '조기 파병론'으로 한 발 앞서 뛰어가려던 국회도 여론장벽에 부딪쳐서 전전긍긍이다.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인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달라진 미국의 위상 못지 않게, 국내에서의 정치권 위상 또한 달라지고 있다는 석연한 반증이다.

이 시점에서 미국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보자. 비록 세계전략의 차원에서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켜왔다고는 하나,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상당한 시혜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긴 세월 베풀어준 나라의 입장에서, '시주하고 뺨맞은' 기분이 들 게 뻔하다. 이쯤 되면, 개인 사이의 관계에 빗대어 말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그들에게 배은망덕한 나라가 되고도 남는다. 한국전쟁 때 달려와 피 흘리며 싸워준 동양의 작은 나라가 뒤늦게 등을 돌리고 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한국군 파병하면 북핵문제 더욱 꼬일 가능성 높아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면 미국이 간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들이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 한국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감회는 다른 나라들과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생각이 한국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달리 먹게 만드는 요인이다. 한국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어떤 형태로든 가담하게 되면, 한반도에서의 무력해결방식에 대해서 한국이 공감하는 것으로 되어버린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아무도 찬성하지 않는 최악의 선택에 직접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이 싫든 좋든 간에 이미 국제사회에서 '침략전쟁'으로 성격이 규정되어버린 전쟁을 놓고, 첨예한 현안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살육과 파괴를 전제로 하는 그 어떤 방법론에 대해서도 쉬이 찬동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 있다.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 비록 미국이 혈맹이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배은망덕'이라는 비난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참전요구에 대해서 응할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이라크는 전쟁으로 때려 부숴도 되고, 북한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온 세계가 비웃을 것이 자명하다.

국회는 이라크 파병안을 부결시켜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국민을 설득하려고 할 게 아니라, 미국을 설득시켜야 한다. 까짓 몇 안 되는 공병대와 의무대가 뭐라고, 무모한 파병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그르칠 것인가. 미안하지만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한국의 입장을 헤아려 달라,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손톱만치라도 있다면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은 안 된다. 침략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나라가 '평화'를 말하는 것은 온 세계가 납득 못할 모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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