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편집위원·前 한국기자협회장)

 

2002년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6월의 '월드컵'을 꼽을 것이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대한민국을 가득 메웠던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는 국민들의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그 때 그 일은 전 세계 언론의 토픽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 이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수 백만 명의 인파가 자발적으로 같은 복장을 하고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열광적으로 나라의 이름을 외치며 질서정연하게 집단 응원을 펼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우리는 별로 없다.
온 국민들의 그런 엄청난 응원에 힘입어 한국축구는 세계 4강의 반열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놀라워할 정도로 과연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이변이었다.
그 뜨거운 월드컵 열기의 한가운데, 한국 대 포르투갈의 경기를 하루 앞둔 6월 13일 오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에서는 나중에 많은 국민들을 들고일어나게 한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생일잔치에 가기 위해 갓길을 걸어가던 신효순(14), 심미선(14)양 두 명의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숨졌던 것이다.
이 사건은 서서히 온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대규모 군중의 촛불시위로 번져갔다.
월드컵에서의 선전(善戰)과 열광적인 응원이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면, 미군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사건은 훼손당한 민족적 자존심을 찾고자 하는 열망에 불을 당겼다.

시대 변화 견인하는 여론몰이꾼 네티즌

대한민국의 2002년 마지막 이벤트는 12월 대통령선거였다.
애초엔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간의 후보단일화와, 정치권의 표현 그대로 '한나라당 후보가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에서 투표 전날 밤 정몽준의 '지지철회'라는 돌발사태까지 딛고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일은 정말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다.
2002년을 뜨겁게 달군 이러한 일련의 사건 사태의 뒤에는 시대의 변화를 강력하게 견인하는 새로운 여론몰이꾼 네티즌들이 있었다.
월드컵 때 국민들을 길거리의 붉은 악마로 나서게 한 것도, 미군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고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SOFA) 개정여론을 불러일으킨 것도, 또 절대 불리하다던 개혁파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가능하게 한 일도 그 뒤에는 네티즌들의 무서운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보수언론들은 '세대간 갈등'이라는 개념을 곧잘 동원하곤 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세상만사를 대립시키고 갈등시키는 논법으로 여론을 마구잡이로 좌지우지해온 수구언론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증거에 불과하다.
그것은 세대간의 갈등에서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를 무시한 결과가 아니라, 세대교체를 통해 주역이 바뀌는 자연스런 역사발전의 한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국민들의 선택의지 또한 변화와 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당연한 진행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추동하는 힘의 한 복판에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정보매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향유하는 네티즌들이 있다.
사실 그렇다. 2002년은 여론형성 또는 여론주도라는 차원에서 전통언론의 영향력이 처음으로 맥을 못 춘 원년이 되었거나, 최소한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된 한 해였다.
결국, 이 같은 변화의 조짐을 진작에 깨닫고 무게중심을 옮겨실은 세력은 성공했고, 입으로는 격변의 현상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 뜻으로 따라잡지 못한 세력은 실패의 쓴잔을 마셨다.
하지만, 아름다운 반란으로 세대교체와 개혁 대통령의 선출이라는 엄청난 일을 이루어낸 네티즌들은 우리가 안고있는 커다란 숙제들 앞에서 지금 희희낙락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민족의 통일과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다.

성숙한 자세로 변화 이끄는 지렛대 돼야

그 문제들 가운데서도 가장 시급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치개혁'이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외쳐온 숱한 목소리들이 무색하게도 기득권을 움켜쥔 정치인들의 태도는 여전히 철옹성이다.
정계개편, 중대선거구제 문제, 개헌, 정당개혁, 지역감정 해소 등 시급한 주제들을 놓고도 정치권은 변함 없이 당리당략이라는 고장난 프리즘을 통해서만 사안을 투시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세모의 정세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북핵 문제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북한의 벼랑끝 전술과, 무력해결도 불사하려는 미국의 태도를 놓고도 정치권이 말하는 해결책은 사뭇 다르다.
미국의 험악한 분위기를 모른 채 낙관론에만 연연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그래도 대화를 통해서 북한을 설득하고 미국을 달래어서 해결해야한다는 입장이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여전히 국론은 분열되어있고, 여차하면 두 패로 나뉘어 물러가라 말아라, 장외 투쟁하겠다 그만 둬라 하고 극한대결을 벌일 가능성은 여전히 높은 형편이다.
예나 다름없이 정치권에서의 개혁기운은 아직 대세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2003년 새해를 앞두고, 우리가 마냥 희망에 부풀어있을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네티즌들의 앞에는 지난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고 심각한 과제들이 수두룩하게 놓여있다.
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앞두고 한없이 꼬여 가는 정국을 빌미로 어쩌면 또다시 기세 등등할 지도 모를 냉전 수구세력들의 패악(悖惡)을 막아야 한다.
절대다수 국민들의 안위보다도 이념적 승리만을 꾀하는 극단론자들의 지나치게 뾰족한 주장들도 슬기롭게 갈아내야 한다.
만약 네티즌들이 중심을 잃어버린다면 미구에 닥칠 지도 모를 엄청난 혼란을 지혜롭게 극복할 마땅한 방도가 없다.
인터넷의 힘과 네티즌들의 영향력이 비로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긴 했다해도,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있다고 보기엔 아직 이르다는 것이 이런 걱정의 요체다.
네티즌들이 바로 서야 한다. 우리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지렛대로서 올바른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더욱 더 천착(穿鑿)하고 고민해야 한다.
이제 2003년 새해 대한민국의 운명이 네티즌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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