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덕(대전언론문화연구원 이사장·변호사)


얼마 전 미국 뉴욕의 상징인 쌍둥이 빌딩(WTC)이 항공기 자살 테러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있었다. 그 잿더미 속에는 미국시민 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 여러 나라의 귀중한 생명들이 묻혔다. 지금 세계의 이목은 미국의 대 테러전쟁의 강도와 그 여파에 몰려있지만, 미국은 상처받은 자존심의 회복에 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나라든 국가가 어려울 때 난국타개의 수단으로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개인간의 이해득실의 차원을 넘어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 마음이 뭉쳐야 결국은 국민 개개인의 생존도 보장받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금 그 어느 때 보다도 국민적 단결로 하나가 되고 있다. 행정부, 의회가 대 테러전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고, 국민들도 대통령인 부시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언론 또한 정부 정책의 대변자로서 충실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통령, 정부, 의회, 국민 모두가 애국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다민족 화합의 촉매제 역할

미국인들의 이러한 애국심의 한가운데에는 늘 성조기가 있다. 자기나라 국기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 국민은 없겠지만 미국인들의 성조기에 대한 애착은 유별나다. 성조기는 미국인들의 문화적 자존심이자 생활 그 자체다. 현재 대참사의 중심부인 뉴욕은 물론이고 미국 전역이 성조기의 홍수 속에 파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기 게양 붐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국기 제조공장들은 때아닌 철야작업에 즐거운 비명이고, 소매점은 물론 방산업체들, 심지어 맥주회사까지 광고내용을 성조기 중심으로 바꾸고 있다고 하니 성조기 열기를 짐작케 한다.

200년의 일천한 역사 속에서 다양한 민족과 종교, 문화가 미국이라는 용광로에 스며들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성조기의 숨은 공로가 적지 않다고 보인다. 다민족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일체감을 형성시키는데 국기 만한 상징물이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인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국기에 대한 존경심을 갖도록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 베씨 로스(Betsy Ross)가 바느질로 성조기를 처음 만드는 그림이나 사진을 곳곳에 걸어두는가 하면, 시민권 시험문제엔 성조기 관련 문제가 포함되고 있고, 관공서는 물론이고 약국이나 식당에도 국기를 자발적으로 걸고 있는 것이다. 그 인종과 피부색이 다른 다민족의 통합의 상징물이 갖는 의미를 경험상 체득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는 지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국기가 다민족의 이질적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 속에 친근한 태극기 만들어야

그래서 성조기는 미국인들에게 있어 아주 친근하고 통속적이다. 성조기는 이제 귀걸이, 신발, 운동복, 핫팬츠는 물론이고 얼굴 화장에까지 이용되고 있다. 미국인들에 있어 성조기는 가슴에 손을 얹고 멀리 바라보는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늘 가까이 생활을 함께 하는 생필품과 같은 필수품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썩 좋게 생각하는 편이 아닌 필자로서도 무고한 생명을 대상으로 하는 명분 없는 테러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 평소 단일민족 개념에 입각해서 국가를 생각해 온 탓인지 필자의 눈에는 다민족, 다문화의 미국은 영 국가로 보이지 않았었다. 매스컴을 통해 미국에 물결치는 성조기를 바라보며 그 동안 우리가 바라본 국기(태극기)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성조기의 실용성에 비해 우리의 태극기는 권위 또는 존엄성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국기가 애국심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의 상징적 존재라고 볼 때, 성조기에 대한 미국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국기는 국기 자체로서의 권위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속으로 얼마나 친근하게 다가오느냐의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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