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봄에는 풀 코스에 도전 할 겁니다. 옷도 프로용으로 준비했고 운동화도 새로 바꿨지요.″
지난 겨울 만난 한 지인이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행복감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밝힌 새해 포부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요″라는 바보같은 질문을 먼저 했다.
평소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 그 날도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으니 상대의 근황을 잘 모르는 것은 당연했으나 42.195㎞를 달리기 위해 맹렬히 준비중이라는 그의 말은 평소 운동이라면 숨쉬기 운동 밖에 안하는 필자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운동을 즐기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던 사람들조차 어느 날 갑자기 마라톤 대회에 나간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마라톤 붐이 갈수록 기세를 더하고 있다.
"그래 달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정체된 삶도 함께 달린다."
국내 마라톤 붐에 일조를 했을 '나는 달린다'는 책의 저자 독일 외무장관 요시카 피셔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두 주먹 불끈 쥐고 뛰는 사람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달리기'가 어느 사이 날씨나 정치처럼 사람들이 모이면 등장하는 주요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도심을 가르며 세느강 못지 않은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내는 갑천과 유등천 변은 말할 것도 없고 동네 공원, 학교 운동장 등등 작은 공간만 있어도 뛰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이 최근의 풍경이다.

'마라톤 중독자' 갈수록 늘어

덕분에 마라톤 동우회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가 하면 마라톤 대회도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폭발 추세다.
이제는 마라톤 대회는 가장 인기 있는 이벤트 중 하나가 됐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라톤에 그토록 열중하게 하는가.
첫 번째는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는 건강증진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큰 돈 들이지 않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두 다리와 운동화 한 켤레만 있으면 건강을 위해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 같다.
두 번째는 확실한 다이어트의 방법이라는 점이다.
달리기만으로 살을 뺐다고 했던 한 인기 여자연예인은 지방흡입술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결국 연예계에서 퇴장해야 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으나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는 비만 극복에 달리기만큼 효과적인 운동도 없다는 것이 거의 정설처럼 돼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만으로는 마라톤 열풍에 대해 전부 설명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모든 운동이 다 건강에 도움이 되고 어느 정도는 살빼기에도 효과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라톤처럼 하나의 사회현상으로까지 파급되지는 않고 있다.
그렇다면 마라톤만이 갖는 특별한 무엇이 있는 걸까.
뛰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달리기는 한 번 맛을 들이면 안하고는 못 배기는 '중독성'이 있다고 한다.
실제 마라톤을 마약에 비유하기도 한다.
30분 정도 계속 달리면 처음의 피로감이 사라지면서 다리와 팔은 새처럼 가벼워지며 기분이 좋아져 리듬감과 새로운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고통을 이기고 난 뒤에 오는 도취감과 환희로 한껏 충족되면 열반의 경지와도 같은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른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다.
이러한 경지까지는 아니어도 달리다보면 이와 비슷한 충만함과 행복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 마라톤의 매력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기분을 한 번이라도 느끼게 되면 쉽사리 그만두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중독'인 셈이다.

부패·비리 집단 중독 증세 보여

현대인들은 뭔가에 중독되지 않으면 안되는 모양이다.
알코올중독, 약물중독, 도박중독 등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전통적인 중독에서부터 섹스중독, 쇼핑중독 등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잉태한 갖가지 병리현상에 이르기까지 한가지씩에는 조금씩 중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우리사회가 집단으로 중독되어 있는 것 한 가지가 부패, 비리중독이 아닌가 싶다.
사회가 변화하고 사람이 바뀌어도 달라지기는커녕 신문, 방송 보기에 겁이 날 정도로 오히려 더욱 교묘하고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부패 행태는 중독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비리와 부패 연루자들은 한 건했을 때 고통의 한계에서 마라토너들이 느끼는 기막힌 희열을 즐기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숱한 비극적인 말로를 보면서도 망설임 없이 빠져들어 중독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독이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
마라톤 중독은 감미로움과 쾌감을 주기는 하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오히려 삶의 활력소가 되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
갖가지 병리현상으로 중독된 우리사회에 그나마 사회를 좀먹게 하지 않는 유쾌한 중독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마라톤은 더욱 장려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쁜 중독을 막는 방어기제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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