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하나같이 떨고 있었다.나는 이들이 달아난 야마모토와 한패거리며 채린을 납치한 자들과도 같은 패거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발뺌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들이 채린의 납치에 직접 가담한 자들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채린의 납치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새끼들!”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분노가 터질듯이 치밀어 올랐다. 죽여도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나는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의 입에 박혀있던 총구를 빼는 순간 그의 턱을 권총 손잡이로 있는 힘을 다해 후려갈겼다. 그러자 욱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우두둑 이빨이 뽑히
나는 꼬꾸라지며 피를 토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빈정거리며 히죽거렸다. 내가 두 다리를 쭉 뻗고 드러눕자 한 녀석이 높이 뛰어 오른 뒤 신발 뒤 굽으로 이마를 알밤을 까듯 짓밟았다.나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푸줏간에 걸린 고깃덩어리 같이 무력하게 축 늘어졌다. 또 다른 사내가 늙은 말처럼 쉭쉭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푹 꺼진 그의 동공에는 자신이 위대하다는 착각에 빠져 혼자 즐거워하는 그런 미치광이의 자긍심이 번뜩였다. 또 자신에게는 대적할만한 자가 없다는 유아적 오만함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기
“......”“여기 뭣 하러 왔느냐니까. 말이 안 들려. 놀러왔어. 아니면 재미 보러 왔어?”“......”“이 새끼가 대답이 없어, 묻는 말이 말 같지 않아?”멀뚱하게 쳐다봤다.“나 말이오?”나는 아무 말도 못들은 척 대답했다.“그렇다면,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냐?”그 사내는 기분 나쁜 어투로 내게 더욱 다가서며 가래침을 땅바닥에 퇵 뱉었다.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내가 내 가슴을 향해 느닷없이 발을 날렸다. 갑작스런 일이었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닥친 일이라 숨 들이쉴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그러자 또 다른
나는 길 건너편을 따라 오르며 그가 어디로 가는 지 관찰했다. 만일 내가 걸음을 빨리 걷는 다면 그자에게 발각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걸음을 무작정 늦추면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안감이 스쳤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공장 노동자들이 몰려나오는 시각이라 내가 그를 쫓기에 용이했다.다음 횡단보도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와 4차선의 도로를 사이에 두고 평행선을 그으며 같은 위치에서 걷고 있었다.‘야마모토는 채린과 같은 층의 기숙사를 썼기 때문에 그녀에게 쉽게 접근 할 수 있었을 거야. 또 기숙사에서 나와 아들 그
그가 나를 피해 몸을 숨긴 곳은 노점상들이 즐비한 시장골목이었다. 그곳에는 시장사람들이 허리높이의 회색빛 판자 위에 딸기와 야채, 거센 불에 구어 낸 빵, 음료수 등 식료품을 올려놓고 팔리기를 기다렸다. 잡동사니며 세간들이 거리에 너절하게 널려 있었다. 하얀 보자기를 뒤집어 쓴 노파와 체중을 거북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뚱보 아주머니. 중년의 노동자, 때가 꼬질꼬질 한 시장 아이들, 흥정에 지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다.나는 몇 발자국을 더 달리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따라가며 담배꽁초를 주워들었다. 말보르 담배였다. 필터에는 눅눅한 침과 질겅질겅 씹힌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채린의 침대 밑에서 발견했던 그 담배꽁초 그대로였다. 그자였다. 채린을 어디론 가로 데려 갔을지도 모를 놈.나는 그가 달아나는 쪽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뒤쫓기 시작했다.30여 미터쯤 앞서가는 그를 잡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금방 손끝에 잡힐 것 같았다. 나는 다리에 힘을 더하며 그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는 내가 뒤쫓는 것을 힐끗 돌아본 뒤 건물의 구석진 곳으로 휙 돌았다. 나는 그를 놓칠세라 이를 앙다물고
그 때였다. 내 앞 10여 미터쯤 떨어진 아파트 모퉁이에서 매끈하게 생긴 동양계 사내가 불쑥 튀어 나왔다. 얼굴선이 단조로운 외모로 보아 일본인 같았다. 색이 적당하게 바랜 청재킷과 청바지를 입고, 몸은 호리호리하게 보였으며 눈썹은 먹물을 바른 것처럼 짙게 돋아 있었다. 나이는 25세 정도로 보였다. 그는 담배를 비스듬히 꼬나물고 걸어왔다. 생긴 것과는 달리 불량기가 몸에서 풍겼다. 그는 나를 보는 순간 움찔 놀라는 기색이었다. 새까맣게 박힌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바지 주머니 속에 꽂혀 있던 손이 순
나는 권총의 자물쇠를 잠갔다.권총을 지닌 후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속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기를 간절히 고대했다. 권총에 촘촘히 박힌 실탄을 다시 뽑아 낼 까도 생각했지만 홍등가에서 격은 일이 떠올라 장전한 채로 서너 차례 자물쇠를 확인하고서야 옆구리에 총을 찼다.나는 따냐에게 차이나타운에서 50 미터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 옆에 차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는 혼자 차이나타운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연신 옆구리에 찬 총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자기 최면을 통해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들고 싶다는 절박한
그러나 줄곧 그런 즐거운 생각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어느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섬광처럼 스치면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곤 했다. 그런 생각들은 대체로 채린이 나를 보고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리지나 않을까. 또 그녀가 의도적으로 나를 피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들이었다.채린은 내게는 가장 친한 친구이며, 연인이고, 애인이었다. 7년여의 삶을 그녀와 나누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떨쳐 본 적이 없었다. 도리어 그런 생각은 돌이끼 낀 부도같이 갈수록 빛깔을 더하며 우리 사이를 끈끈하게 묶었다.그런데 그런 아름다움이 오늘에 와서 흔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러면서도 내가 빅또르 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 아닐까를 의심했다. 채린을 보았다는 그 말이 도리어 믿기지 않았다.“뭐라고요?”“김 선생님을 우수리스크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답니다.”나는 그제야 흐트러졌던 생각들이 제자리를 잡아감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흐트러졌던 병사들의 대열이 일순간에 기수의 신호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우수리스크에 있는 주점에서 김 선생님과 비슷한 사람을 아이들이 봤답니다. 1주일 전쯤. 그러니까 지난 8일 저녁에 아이들이 우연히 중국계들이 경영하는 ‘바’
알렉세이는 그제야 2층 계단으로 오른 뒤 10여 분이 지난 뒤에 내려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권총과 실탄 5발이 들려 있었다. 그가 들고 나온 권총은 살상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제 토카레프 38구경 다연발 권총이었다.그는 권총을 내게 넘겨주기 전에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다.그것은 먼저 총기를 가지고 다니다 경찰이나 정보요원 등에게 적발되면 그 즉시 철창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총기를 지니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하며 혹 그것을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된다 해도 자신에게 총
“못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그것은 빅또르 김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보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찾아오지 마시고 모든 것을 빅또르 김과 상의를 하세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도 그에게 얘기를 해놓을 테니까. 왜냐하면 나를 만나봐야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 세상이 평안치 못하기 때문이요. 중국계 아이들이 블라디보스토크 한복판에서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지 않소.”그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지며 자신이 뱉은 말에 스스로 동요되는 듯 더욱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그자들은 정신을 좀먹는 마약거래를 일삼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