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쳐 보였다. 많은 출혈로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져가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권총을 다른 여종업원의 어깨에 올리고선 모습이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그는 서른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동양계였다. 구레나룻을 기른 모습이 중국계로 보였다. 검은 머리칼, 우수에 젖은 눈빛, 까무잡잡한 피부, 다부진 체구........ 그는 피가 흘러내릴 때마다 버릇처럼 헛바람을 내뱉었다. 총구 앞에 머리를 들이대고 있던 여종업원은 파랗게 질린 채 얼굴이 백지장으로 변해 있었다. 온몸을 오한 들린 것처럼 떨었다. 그
의자의 안락함을 느끼며 몸을 깊이 묻었다. 나른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때였다. 레스토랑으로 통하는 호텔 복도 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탕” “탕” 곧이어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깨진 유리조각 같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나는 활줄같이 몸을 일으키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스토랑은 여전히 조용했다. 잠시 뒤 다시 예리한 총성이 벽 속에서 들려왔다. “탕” 그 총성은 잠시 전에 들렸던 두 번의 총성보다 더욱 가깝게 들렸다. 레스토랑과 복도가 마주한 계단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총성에 귀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내 속옷이며 양말을 챙겨놓는 것부터 은행에 이자를 갚는 일이나, 새로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 부금을 넣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이나 보험료를 제 때 납부하는 것, 자동차 할부금에 쫒기는 것도 아내였다. 그녀의 책상 머리맡에는 언제나 빽빽하게 적힌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가장 가까운 친구도 그녀였고 고달픈 내 고민을 털어 놓을 대상도 그녀였다. 때문에 아내를 유학길로 떠밀기까지 나는 족히 한 달간의 속앓이를 했다. 그리고는 마음을
[2] 블라디미르 선상호텔 6월10일 호화여객선 조타실을 개조해 만든 블라디미르 선상 호텔 레스토랑은 조용했다. 하얀 벽면은 병원냄새가 날 만큼 단조롭게 처리됐으며 유리창마다 수술이 차랑거리는 미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잔잔한 클래식음악 사이로 배의 엔진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나는 그곳에 버려진 사내처럼 혼자 멍하게 앉아 있었다. 진한 커피향이 피어오르는 잔속에 낯익은 사내가 어른거렸다. 금테안경이 짙은 잔속에 반짝 거렸다. 길게 담배연기를 들이켰다. 푸른 연기가 음악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며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먼지를 일
나는 목젖이 들여다 보일만큼 입을 크게 벌리고 괴성을 질렀다. 어깻죽지가 목을 조였다. 잠시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등허리를 얽어매고 있던 척추는 등골만을 남겨둔 채 마디마디가 촌충같이 떨어져 나갈듯이 아려왔다.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정신이 든 것은 털보가 내게 얼음 같은 냉수를 정수리에 들이붓고 난 뒤였다. 온몸이 땀과 함께 뒤섞인 냉수로 축축이 젖었다.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두 팔은 맥이 풀린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이반 곤예프는
■ “매드 베데프! 단단히 손을 봐 줘…….안되겠어……. 개새끼 독종이야.”그는 가래침을 바닥에 뱉고 신발바닥으로 씨익 문지른 다음 황급히 지하실을 나갔다.나는 털보의 손에 들린 채 쥐떼들이 몸부림치는 웅덩이 위에 매달려졌다. 그곳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굵은 손이 어린아이를 다루듯 익숙했다.나는 쥐떼들이 소용돌이치는 허공에 매달려 한동안 버둥발을 쳤지만 이내 다리 난간 대에 목이 멘 개처럼 늘어졌다. 수갑을 채운 손목이 끊어질 듯이 조여 왔다. 그는 나를 허공에 메달아 둔 것도 모자라 밧줄을 서서
■ 그 때였다.이반 곤예프가 구역질이 날 만큼 상한 닭을 쥐떼 한 가운데 던졌다. 그러자 물결같이 일렁거리던 쥐떼들이 소리를 지르며 닭을 향해 돌진했다.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치는 쥐 발소리가 우르르 건물을 얇게 진동시켰다.닭은 잠시 물결 속에 잠기는 듯 하다 이내 솟구쳤지만 어느새 뼈마디를 갉는 쥐들의 날카로운 이빨만이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이었다. 더욱 나를 충격 속으로 몰아간 것은 굶주림에 지친 쥐떼들이 허기를 채우려다 못 이룬 먹성을 다른 쥐들을 상대로 채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들은 눈알을 반들거리며 서로를 물어뜯어 한 점
[1] 심문6월12일 어스름하고 침침한 공간은 내 생리에 전혀 맞지 않았다. 습기와 눅눅한 느낌, 그리고 포유동물의 사체 썩는 냄새가 뒤엉켜 코를 찔렀다. 어둠이 배인 벽체는 습기에 찌들어 있었다. 천정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압도하며 낮게 내려 앉아 있었다. 해묵은 건물 지하의 냉기가 사체 썩는 냄새의 역겨움을 더했다.“매드 베데프.”나를 심문하던 이반 곤예프가 앙칼진 목소리로 문간에 있던 털보를 불렀다.얇게 찢겨 올라간 눈자위 사이로 극도의 잔인함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고 내가 주눅들 필요는 없었다. 또 누명을 뒤집어 쓸 이유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