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해를 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똑같은 행동을 할까? 그렇지 않다. 개인마다 기질적 요인과 성격에 따른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병을 앓는 것도 체질적 요인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계속 아닌 것을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선택이고 무엇 때문일까? 끊어내지 못하는 사랑과 증오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불안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과 양심의 갈등에서 오는 것이 자신에겐 죄책감으로 온다. 즉 양가감정을 자주 느낀다면 불안과 죄책감의 강도는 높아진다. 이럴 경우 자신이 건강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다. 이 말의 의미에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 중에는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악한 마음’을 다른 의미로 표현하면 ‘위선(僞善)’이다. 생각해보면, 선(善)의 반대는 악(惡)이 아니고 위선(僞善)이다. 위선은 선을 가장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는 것에는 감정, 생각, 행동, 눈빛 등 다양하다. 우리가 관계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타인에 대한 감정이 섞인 언어와 말투, 눈빛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정신
‘울고 싶은데,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면서 흐느끼기만 한다. 한 때 우는 것을 배워보고 싶단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다. 그만큼 감정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진짜 아프면, 진짜 억울하면, ‘진짜’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진짜 아픔이거나 과한 억울함이면 울음도 꺽꺽 거리거나 멈출 수 없을 만큼 표출된다. 지인에게 전화하며 엉엉 울면서 전화하는 것은 다반사일 경우도 생긴다. 현재 우는 것을 잊었다면 그만큼 마음의 평안함이 있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또는 자신이 감정을 쓰지 않았을 때가 편
일상의 대부분은 ‘선택’과 관련되어 있다. 그 선택은 최소한의 책임을 비롯하여 막대한 책임까지 부여된다. 그러나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면 그 결과에 따라 억울함과 분노의 정도는 고조된다. 즉 자신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당신(부모, 자녀) 때문에’, ‘환경(상황) 때문에’ 등으로 처한 상황에 대한 원망을 하게 된다.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라는 말로 마치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책망 받는 느낌까지 주기도 한다.우리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어떻게’라는 방법론
성인이 되어서도 어른이 되는 과정은 고달프고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포기한다고 해서 어른이 아닌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부모'때문에, '자식'때문에, '당신'때문에, '너'때문에, '나'때문에 우리는 아파하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다. 또한 '부모'덕분에, '자식'덕분에, '당신'덕분에, '너'덕분에, '나'덕분에 우리는 기쁘게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필요하지 않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의 삶에서 위대한 선장은 작은 감정들이다. 우리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늘 감정에 복종한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은 감정에 복종하게 되고 이끌리게 된다 라는 것이다. 결국 그 감정은 ‘과거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라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은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나의 머리와 마음 그리고 몸을 지배한다. 사람의 에너지 중심을 세 가지로 머리, 가슴, 배로 말할 수 있다. 머리는 생각, 가슴은 마음, 배 즉 장은 행동으로 쉽게 표현된다. 여기서 장은 본능으로 볼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로
부부의 인연이든, 가족의 인연이든,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인연이든 상관없이 인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무엇인가 얽매인다는 것은 집착을 유발하게 된다. 생활화 되어 있는 ‘인연의 묶음’ 또한 무디어져 있는 익숙함의 일상이 되어 있다. 그런 익숙함에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알면서도 ‘속고 있기’를 원하는 있는 것인가? 인연은 자신의 선택이나 의도와는 무관하다. 어쩌면 상대방에 의해서, 어쩌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인연이 끝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인연은 흘러가는 것이다. 이왕 서로 잘 지낼 수 있다
스스로 처리되지 않는 감정이 고스란히 타인의 몫이 되었을 때, 그 타인이 가족이 되거나 자녀의 양육에 치명적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감정의 대물림’이라고 한다. 감정의 대물림에서 자녀는 부모 행동을 그대로 흡수하며 배우게 된다. 이러한 것을 ‘동일시’라고 한다. 잔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돌아서서 누군가에게 똑같은 잔소리를 쏟아낸다. 또한 폭력을 경험한 아이는 돌아서서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즉 ‘공격자와 동일시’라는 개념이다.부모가 내면 깊숙이 감정을 억압해 놓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감정들, 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작품 ‘이방인’에서의 ‘이방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외를 느끼는 이방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은 감정에 솔직한 사람, 겉과 속이 같은 사람,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다정한 무관심’이란 표현이 적절한 듯하다. ‘다정한 무관심’은 타인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파악하지 않는 채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다정한 무관심’의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판단하고
우리는 삶과 죽음의 실존적 존재와 의미론적 존재로 살기를 원한다. 추억의 사람을 기억하고,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은 반대로 ‘내가 그들을 의미 있는 존재로 기억하듯이, 그들에게도 내가 의미 있는 존재로 남고 싶다.’ 라는 의미이다. 의미는 삶의 원동력이 될 만큼 중요하다. 그 의미 또한 상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자신 안의 긍정 마인드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부여를 스스로 하기 위해서는 아픈 추억을 새로운 추억으로 덧입히는 방법과 삶을 재해
많은 날을 살아보았고, 살아가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똑같은 하루를 맞이해 본 적은 없다. 주어진 하루가 매일 새로운 것은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축복이다. 자연은 매일 다른 하루를 나름의 방법으로 잘 맞이하고 있다. 매일 보는 하늘도 똑같은 하늘이 없고, 구름의 모양도 늘 다르다. 나무와 꽃, 돌 사이에 작은 풀포기 하나라도 햇빛과 물과 공기를 먹은 만큼 자라고 있다. 단지 우리의 관심밖에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 사실 우리의 삶도 자연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자연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즉 우리의
우리는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서 자신을 살게 하는 일이라면 착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조건 착한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결정이다. 착한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고자 했다면, 혹은 현재 착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믿고 있는 자신 안에서 이제는 나와야 한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왔던 삶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상관없이 습관처럼 살아왔던 삶이었다. 그래서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또한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의 선택이다. 자신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알에서 깨어나
상대방의 고통과 상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는 동일한 경험을 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고통과 상처는 자신의 것인지, 상대방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원인은 질투와 시기심에 있다. 인간의 질투와 시기심은 한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인간의 이기심은 인간의 선함을 뛰어넘는다. 인간의 종말에는 선함이 압도적이란 걸 믿고 있지만, 우리가 함께 사는 동안은 이기심이 많은 사람을 이겨낼 방법은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36계 줄행랑’이다. 정확히 第36計 주위상(走爲上)으로 달릴 주(走), 할 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랑과 열정, 따뜻한 정서를 배우는 반면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기심, 배신감 같은 감정도 배운다. 그런 삶의 여정 속에서 지금의 나는 어떤 변화된 모습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 보게 된다. 특히 변화된 모습 중에서 사람을 경계하는 부분에 대해 나열해 보려 한다.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었던 사람이 사람을 경계한다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이고 자신의 인지적인 부분, 행동적인 부분, 정서적인 부분에 있어서 많은 세부적인 것들에서 부정의 것들을 생각하고 냉철하게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마는 않았을
『올해 88세인 친정아버지의 폐암 진단을 받고 가족 모두가 모였다. 조직 검사를 실시했는데, 출혈이 심해서 결국 조직 검사의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의사가 다시 조직 검사를 권유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치료를 하겠다는 목적이 있다면 조직검사를 하자는 거였다. 다시 조직 검사할 때는 위험부담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또 출혈이 있으면 개복수술해서 조직 검사를 실시해야 한단다. 조직 검사 때 출혈이 심할 경우에는 사망할 수도 있으니 가족들과 모여서 상의하라고 한다. 치료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조직 검사를 할 이유가 없다 라는 것이 의사
코로나19로 인한 지금의 현실은 심리적 전쟁이다. 코로나19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은 외출자제, 기본 손 씻기, 기침을 할 때의 지켜야할 행동규칙 등이다. 우리는 구속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타인을 구속하는 것은 괜찮을지 모르나, 타인이 나를 구속하는 것이나 나 스스로 자신을 구속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만큼 자기중심적일 수 있다. 지금은 타의에 의해 구속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심리적 구속은 똑같은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함과 불안, 우울을 동반한다. 일주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삶에 주인은 나’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런 말은 많이 들었어도 어쩌면 자신과 상관없는 단어라고 잊고 살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의 질문에 ‘잘 모르겠어요, 몰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어요, 몰라요’라는 말 속에는 사실상 ‘저만이 생각이 있으닌까 그만 물어 보세요, 다른 사람 삶에 참견하지 말아요’라는 뜻이 담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기 보다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함부로 물건 쓰는 것처럼 제멋대
나는 ‘나의 그것’이 나의 큰 단점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그리 어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좋아했다 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나는 그동안의 나의 관계 맺음이 엉터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많은 아픈 경험을 하면서, 사람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면 위축되기도 하였고, 내가 스스로 모든 모임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공황장애를 일으킬 정도로 폐쇄된 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여전히 잘 지내고 바쁘게 지낸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나를
우리는 무심결에 해왔던 습관대로 그렇게들 걸어가고 있다. 마치 ‘다람쥐체바퀴’ 도는 기분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러나 자세히 자신의 삶을 드려다 보면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단지 우리가 체감으로 느끼는 강도가 낮기 때문에 늘 그대로의 삶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변화를 원한다. 역설(逆說) 같은 표현이지만 역설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느끼지 않고 살 뿐이다.도전을 두려워하지만, 나의 무의식 세계에서는 ‘도전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 ‘도전’이 목표를
청소년들에게 미래의 직업군, 이상형에 대한 질문도 하기 전에 스스로 이야기 한다. ‘저는 외모도 좀 생겨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집도 있어야 해요. 와이프 될 사람은 반드시 맞벌이해야 하는 조건이예요.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연봉을 억 단위로 받아야 돼요.’ 전혀 현실성이 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는 혼자 살기에도 버거워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자동차의 종류, 옷이 메이커인지 아닌지, 핸드백이 명품인지 아닌지를 살피는 사람도 있다. 집안의 재산도 따져보는 사람도 있다. 프로필 사진을 찍을 때도 얼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