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나는 이곳에서 남부럽지 않을 만큼 사업도 확장시켰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늘 비어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으니까. 형제들이 그립고 보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더욱 마음이 울적해집니다.”“그럴 테지요.”빅또르 김과 내가 이런 애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 선배가 건배를 제의 했다. 좌중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숨이 막 힐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가냘프리만큼 목이 긴 유리잔에 찬물 같은 보드카를 한잔 가득 따랐다.“빅또르 김의 사업이 번창하고 우리의 우정이
“러시아로 말하면 특수안전요원 쯤 되는 셈이지요. 이 친구 깡말랐지만 대단한 친구였어요.”“아! 그래요. 아무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나는 감사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스바시바를 연거푸 토했다.또 한 차례 술잔이 오갔다. 나는 그들이 따르는 데로 술잔을 들이켰다.“저의 고향은 경북 상주라고 들었습니다.”빅또르 김이 말했다.“경북 상주?”“예! 상주군 사벌면. 할아버지께서는 그곳에서 농사를 짓다 일본인들의 침탈이 심해지면서 이곳으로 오셨답니다.”“그랬군요”“할아버지께서는 이곳에서도 계속 농사를 지어셨다더군요.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할아버
그는 자신을 빅또르 김이라고 또박또박 소개했다. 숫염소같이 단단해 보이는 피부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했다. 두터운 손바닥의 감촉이 부드럽고 촉촉 했다. 나는 그의 눈망울을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까맣고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가 열정적이었다. 온후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 속에는 자신감이 이글거렸다.나는 두텁고 부드러운 손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 손이 다소 두터운 탓인지 손이 두터워야 복이 따른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놓고 그런 속설을 내뱉은 적은 없지만 손바닥이 두터운 사람이 후덕하고,
나 선배는 아파트 언저리에 볼품없이 붙어 있는 단층 건물 가까이에서 차를 멈추게 했다. 그 건물은 외견상 낡은 곡식 창고처럼 쥐가 드나들고 썪은 감자가 구석에 쌓여 있을 것 같은 그런 건물이었다. 하지만 나 선배는 이곳이 빅또르 김이라는 고려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이라고 소개 했다. 또 이 음식점이 블라디보스토크 전체에서 손꼽을 만한 규모로, 전통 러시아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말했다. 음식을 먹으며 가무를 즐길 수 있는 곳도 이곳뿐이라고 말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으며,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눈치였다. 컹컹거리며 생담배 냄새를 맡기도 했고 코를 실룩거리며 방안의 찝찝한 냄새를 즐기기도 했다. 나와 따냐는 중간이 헤진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렸지만 그는 회전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구의 틈바구니에 숨어있는 바퀴 벌레처럼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말을 먼저 꺼내지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채린에 대한 얘기를 끄집어냈다.“김 채린이라는 극동대 유학생의 실종…….”
“…….”“왜 사이가 안 좋아?”“사실은 집사람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극동대…….”“아! 그럼 김 모라는 극동대 유학생이 제수씨란 말이야? 그래서 보호자란에 장 기자 이름이…….난 전혀, 자네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네.”그는 적잖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전혀 상상치 못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나를 뚫어지게 봤다. 갑자기 허를 찔린 사람같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냉수를 한 컵 길게 들이키고 난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조심스런 말투였다.“김 선생 실종 문제는 사실상 내가 전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단
“개인적인 일 때문에…….”“기자들은 매번 입장이 곤란하면, 개인적인 일이라더라.”“.......”“ 탈북자들 때문에 왔구먼.”“…….”“어휴 말도 하지마. 탈북자들 때문에 얼마나 곤혹을 치렀는지 알아, 탈북자란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날 지경이야. 탈출을 극비리에 성사시켜 놓으면 귀순자들이 이곳으로 온다고 보도하는 사람들이 기자들이야. 그 바람에 살해된 사람도 있어, 장 기자도 기자니까 하는 말이지만 너무들 하더라고......” “......”“어떤 기자는 이곳 블라디보스토크로 전화를 걸어요. 그리고는 뭐라고 묻는지 알아?” “..
총영사는 내게 트집을 잡히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또 그는 구차 할 만큼 세부적인 수사 자료까지 일일이 내 보이며 자신들이 빈둥빈둥 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그들은 채린을 찾는 일보다 수사상황을 어떻게 그럴싸하게 보고를 하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나는 면담을 끝내고 사무실로 나왔다. 여전히 여름날의 한가로움이 졸고 있었다. 텅 빈 공간을 직원 한 명과 터벅머리 사내, 전화를 열심히 받고 있는 러시아여성이 지키고 있었다.내가 막 영사관을
내가 또 다른 담배를 빼물었을 때쯤에야 그는 채린의 실종에 대한 얘기를 어렵게 끄집어냈다. 폭탄에 뇌관을 심듯이 조심스러웠고 신중했다. 종전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설명할 때와는 달리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여운을 남겼다.“김 선생이 실종됐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솔직히 지난 3일 이었습니다.”그는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잠시 머뭇거렸다. 잠시 입을 오물거린 뒤에야 다시 답답하던 말문을 열었다.“실종되고 이틀이 지난 뒤였지요. 처음에는 영사관에서도 어디 여행을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다
‘1850년 네벨스크 제독이 이끄는 탐험대가 연해주 해안을 탐사하고, 1858년 동 시베리아 총독 무야비요프 제독의 휘하에 있는 탐사대가 이 지역을 정밀 탐사 한 후 1859년 이를 근거로 블라디보스토크 군사 기지를 만들기로 결정 했다…….’나는 한 차례 숨을 길게 들이켰다.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한 스스로를 나무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계속 해서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1860년 쉐프너 선장 및 선원 31명을 실은 해군 수송선 만튜르호가 블라디보스토크 해안에 닻을 내림으로써 세계지도 상에 등장하게 된다. 시의 명칭인 블라디
따냐는 1층 현관에서 서성거리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공관에 오른 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른 사내가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터벅머리의 그 사내는 후덥지근한 사무실의 열기 탓인지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인기척에 놀란 모습이 확연했다. 그는 허겁지겁 가슴팍이 내다보일 만큼 열어 제친 옷을 여몄다.“어떻게 오오셨습니까?”더듬거리는 말투가 서툴렀다. 잠이 들깬 모양이었다.“총영사님을 뵙고자 왔습니다.”“약속을 하셨습니까?”“예”“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그 사내는 수화기를 들고 유
그가 눈을 부라리며 권총을 머리에 들이 댔지만 채린은 비명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얇게 찢어지는 듯 한 파장이 뒷골을 끈질기게 당겼다. 나는 귀를 막고 그에게 당장 아내를 풀어 주라고 표독을 떨었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목젖을 넘어오지 않았다. 입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채린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애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머리에다 권총을 더욱 가까이 들이댔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내 몸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안 돼.
승용차는 텅 빈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을 지나 10월 혁명 탑이 서 있는 광장 옆 레닌거리를 가로 질렀다. 긴 외투를 두텁게 입고 선 병사의 동상이 30미터는 치솟아 있었고 총검을 들고 선 사내의 주먹만 한 눈빛이 어둠에 빛났다. 그는 부라린 모습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항의 밤물결을 응시하고 있었다.블라디미르 선상호텔은 10월 혁명 탑을 지난 뒤 곧바로 나타난 극동군 사령부 맞은편 항구에 떠 있었다. 여러 척의 군함들 사이에서 상아빛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소련 시대에 호화 여객선을 개조해 만든 호텔이었다.블라디보스토크 항의 밤은 다른
나는 따냐를 앞세우고 기숙사 관리인을 만났다. 늙수그레한 얼굴에 백발인 그는 낯선 도시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시골 노인의 모습이었다. 눈가에는 다감한 인정미가 묻어났다. 낡은 멜빵으로 흘러내리는 바지를 고정시킨 그는 흰 와이셔츠 사이로 때 묻은 내의의 소맷자락이 삐죽이 내다 보였다. 그는 따냐의 말을 한참 듣고 난 뒤에야 두터운 장부를 서랍에서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기숙사에 들어있는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 나이 국적 등이 꼼꼼하게 적혀있었다. 3001번으로 표시된 카드에는 채린의 사진과 신상관계가 세밀하게 적혀있었다. 채린의 방 주
유병호작가의 작품전을 보고유병호작가가 오랜만에 작품전을 열었다. 4월 20일까지 유성구 덕명동 '갤러니 나'에서 열린다.나는 작품을 논하기 이전에 작가를 먼저 분석한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소유자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유병호 작가는 계란형의 작은 안경을 쓴 화가다. 흰 콧수염과 턱수염을 가지런히 자르고 베레모를 즐겨 쓰는 그런 작가다. 그의 첫인상이 당당하고 세련 되 보인다. 그래선지 그의 작품들 속에도 그런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바다와 하늘 그리고 꿈과 이상을 닮은 블루가 공간의 절대적 위
채린이 실종된 날에도 오전 11시에 강의가 들어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신발장에 들어있는 까만 아내의 구두에는 따뜻한 그녀의 온기가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쓰레기통과 옷장도 뒤졌다. 모든 것이 잘 정돈 된 그대로였다. 책상 서랍은 채린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해 유리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어느 구석에도 낯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리를 낮춰 침대시트를 걷어 올렸다. 어둠침침한 침대 밑에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먼지만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내가 막 시트를 내리려는 순간 노란 담배꽁초가 눈에 뛰었다.그 꽁초는 끝부분이 구두
나는 커튼을 걷어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그제야 신선한 바람이 방으로 급속히 밀려들었다. 낡은 책상 위에는 책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 볼펜이 책 가운데 골에 연필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책상에 붙은 책꽂이에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맥심 고리키의 ‘고백’ 같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그 아래에 채린과 아들 그리고 나의 모습이 담긴 작은 갈색 액자가 놓여있었다. 사진은 두어 해전에 아파트 거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녀가 하얗게 웃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책상을 어루만지며 다른 손으로는 안경
“죄송합니다. 걱정을 끼쳐드려서.......”다시 고개를 조아렸다.“채린에게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아내를 믿거든요.”나는 애써 태연한척 했다. 따냐의 마음을 더 이상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내가 조금만 더 울적한 표정을 짓는다면 그녀는 식탁에 엎드려 펑펑 소리를 내며 울어버릴 것 같았다. 축축하게 젖은 눈알이 시선을 잡지 못한 채 흔들렸다. 조용히 앉아 어깨를 떨었다. 나는 따냐와 별다른 대화 없이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 그리
그녀는 약간 마른 체격 이었지만 언제나 선홍빛 입술과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사람을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거미발같이 긴 손가락에는 러시아산 호박 반지를 끼고 있었지만 결코 천해 보이지 않았다. 특히 그녀의 엷은 갈색 눈은 마주보는 사람의 마음을 깊이 빨아들이는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헤퍼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이었다. 이곳에 취재차 왔을 때 그녀는 기꺼이 가이드를 맡아 주었다. 때문에 나는 그녀와 보름간의 시간을 거의 같이 보냈었다.더욱 내가 그녀를 가깝게 느껴온 것은 채린을 극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