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냐는 1층 현관에서 서성거리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공관에 오른 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른 사내가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터벅머리의 그 사내는 후덥지근한 사무실의 열기 탓인지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인기척에 놀란 모습이 확연했다. 그는 허겁지겁 가슴팍이 내다보일 만큼 열어 제친 옷을 여몄다.“어떻게 오오셨습니까?”더듬거리는 말투가 서툴렀다. 잠이 들깬 모양이었다.“총영사님을 뵙고자 왔습니다.”“약속을 하셨습니까?”“예”“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그 사내는 수화기를 들고 유
그가 눈을 부라리며 권총을 머리에 들이 댔지만 채린은 비명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얇게 찢어지는 듯 한 파장이 뒷골을 끈질기게 당겼다. 나는 귀를 막고 그에게 당장 아내를 풀어 주라고 표독을 떨었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목젖을 넘어오지 않았다. 입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채린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애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머리에다 권총을 더욱 가까이 들이댔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내 몸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안 돼.
승용차는 텅 빈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을 지나 10월 혁명 탑이 서 있는 광장 옆 레닌거리를 가로 질렀다. 긴 외투를 두텁게 입고 선 병사의 동상이 30미터는 치솟아 있었고 총검을 들고 선 사내의 주먹만 한 눈빛이 어둠에 빛났다. 그는 부라린 모습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항의 밤물결을 응시하고 있었다.블라디미르 선상호텔은 10월 혁명 탑을 지난 뒤 곧바로 나타난 극동군 사령부 맞은편 항구에 떠 있었다. 여러 척의 군함들 사이에서 상아빛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소련 시대에 호화 여객선을 개조해 만든 호텔이었다.블라디보스토크 항의 밤은 다른
나는 따냐를 앞세우고 기숙사 관리인을 만났다. 늙수그레한 얼굴에 백발인 그는 낯선 도시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시골 노인의 모습이었다. 눈가에는 다감한 인정미가 묻어났다. 낡은 멜빵으로 흘러내리는 바지를 고정시킨 그는 흰 와이셔츠 사이로 때 묻은 내의의 소맷자락이 삐죽이 내다 보였다. 그는 따냐의 말을 한참 듣고 난 뒤에야 두터운 장부를 서랍에서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기숙사에 들어있는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 나이 국적 등이 꼼꼼하게 적혀있었다. 3001번으로 표시된 카드에는 채린의 사진과 신상관계가 세밀하게 적혀있었다. 채린의 방 주
채린이 실종된 날에도 오전 11시에 강의가 들어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신발장에 들어있는 까만 아내의 구두에는 따뜻한 그녀의 온기가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쓰레기통과 옷장도 뒤졌다. 모든 것이 잘 정돈 된 그대로였다. 책상 서랍은 채린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해 유리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어느 구석에도 낯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리를 낮춰 침대시트를 걷어 올렸다. 어둠침침한 침대 밑에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먼지만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내가 막 시트를 내리려는 순간 노란 담배꽁초가 눈에 뛰었다.그 꽁초는 끝부분이 구두
나는 커튼을 걷어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그제야 신선한 바람이 방으로 급속히 밀려들었다. 낡은 책상 위에는 책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 볼펜이 책 가운데 골에 연필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책상에 붙은 책꽂이에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맥심 고리키의 ‘고백’ 같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그 아래에 채린과 아들 그리고 나의 모습이 담긴 작은 갈색 액자가 놓여있었다. 사진은 두어 해전에 아파트 거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녀가 하얗게 웃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책상을 어루만지며 다른 손으로는 안경
“죄송합니다. 걱정을 끼쳐드려서.......”다시 고개를 조아렸다.“채린에게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아내를 믿거든요.”나는 애써 태연한척 했다. 따냐의 마음을 더 이상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내가 조금만 더 울적한 표정을 짓는다면 그녀는 식탁에 엎드려 펑펑 소리를 내며 울어버릴 것 같았다. 축축하게 젖은 눈알이 시선을 잡지 못한 채 흔들렸다. 조용히 앉아 어깨를 떨었다. 나는 따냐와 별다른 대화 없이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 그리
그녀는 약간 마른 체격 이었지만 언제나 선홍빛 입술과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사람을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거미발같이 긴 손가락에는 러시아산 호박 반지를 끼고 있었지만 결코 천해 보이지 않았다. 특히 그녀의 엷은 갈색 눈은 마주보는 사람의 마음을 깊이 빨아들이는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헤퍼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이었다. 이곳에 취재차 왔을 때 그녀는 기꺼이 가이드를 맡아 주었다. 때문에 나는 그녀와 보름간의 시간을 거의 같이 보냈었다.더욱 내가 그녀를 가깝게 느껴온 것은 채린을 극동대
“그들이 장 기자님을 감금한 것도 그런 이유랍니다. 그들의 말로는 사살된 놈이 메스암페타민 2킬로그램을 그날 오후 블라디미르 호텔에서 미화 15만 달러에 밀매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덮쳤다는 겁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 마약 밀매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경찰이 덮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거죠. 물론 메스암페타민은 찾아 내지 못했지만.”“......”“경찰은 당시 호텔 내에 있던 누군가가 필로폰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본 거죠. 그런데 그놈의 수첩에서 장 기자님의 이름과 방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발견하고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대충은 아시겠지만 소련체제 붕괴 이후 러시아로 넘어오면서 이곳은 마피아의 세상이 됐어요. 대부분 밑바닥 상권과 경제권을 마피아들이 쥐고 있으니까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마피아들도 조직에 따라 서로 성격을 달리해요. 자동차 중계상이나 주점 등 비교적 양성경제를 쥐고 있는 마피아가 있는가 하면 마약과 같은 범법 행위를 통해 조직을 확대시키는 마피아도 있어요. 조직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것이 주로 러시아계 마피아며 음성 경제를 쥐고 있는 쪽이 중국계지요.”“.........”“이곳 경찰 당국이 범죄와의 전쟁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는 마
[3] 마피아의 마약밀매 6월12일경찰에 연행 된 뒤 파김치가 된 모습으로 풀려 난 것은 오후 4시 40분이 지나서였다. 나는 낯선 영사관 직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호텔방에 내동댕이쳐졌다. 꼬박 이틀 하고도 2시간이 넘게 숨 막히는 공간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눅눅한 습기와 꿉꿉한 냄새가 가득했던 심문 실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나의 의지나 러시아 경찰의 아량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현지 한국 영사관에서 내 신원을 보증하는 조건으로 풀어준 것이었다. 이곳에서 더 이상 말썽을 피우지 않겠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사
“당신 신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어. 당신네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당신의 이 무례한 행동을 고발 하겠어.”그러자 이반 곤예프는 더욱 큰소리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얼굴색이 급작스럽게 돌변했다.“이 새끼 도저히 안 되겠구먼. 죽고 싶어 환장 했어, 여기가 어디라고 고함이야. 하스볼라토프 홍이 너를 만나기로 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어. 그래도 끝까지 시치미 뗄 생각이야?”“증거라니?”이반 곤예프는 작은 수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얇은 메모지를 꺼냈다.“이것이 미스터 홍의
그는 피식 웃었다. 독사눈을 뜬 채 의도적으로 눈가에 잔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조금 전에 죽은 그 놈과 한 통속이잖아. 다 알고 있는데 무슨 넋두리를 떨고 있는 거야. 제대로 손을 봐주어야 실토를 하겠나?”그는 다시 고함을 버럭 지르며 메모지 뭉치로 책상을 내리쳤다.“너는 내 손 안에 있어. 이렇게 한 방이면 끝이야. 순순히 털어놓는 것이 좋아.”그는 엄지와 검지만을 편 뒤 내 이마에 대고 말했다. 권총 한 발이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난다는 것을 암시했다."무슨 얘깁니까. 그와 한 통속이라니.
“아니 여보셔. 내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 겁니까?”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는 내행동이 가당찮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시간이 없어. 가지고 있는 소지품을 책상 위에 모두 내 놓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좋게 말할 때 순순히 말해. 나도 인간적인 것을 좋아하니까.”나는 주머니 속에 있던 소지품을 몽땅 털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여권과 지갑, 이곳에서 사용하려고 가져온 지폐, 비행기 티켓, 담배, 라이터, 전화번호가 메모된 수첩, 가족사진, 손수건, 블라디보스토크 사진이
사내는 아무도 없는 지하 방에 던지듯이 쑤셔 박고는 밖에서 문을 잠갔다. 나는 그 방에 버려진 뒤 한동안 길게 거친 숨을 토해냈다.방에는 낡은 책상이 구석진 곳에 놓였고 그 책상 양 옆에는 결코 앉고 싶지 않은 그런 의자가 하나씩 놓여있었다. 그렇다고 양쪽에 놓인 의자가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한 쪽에는 낡고 딱딱한 의자가 놓인 반면 다른 쪽에 놓인 것은 등받이가 달린 회전 의자였다. 천장에는 갓 달린 백열전등이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벽에는 어떠한 장식도 치장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장식을 해도 찝찔한
“뭐하는 거야?” 나는 심상찮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려고 애썼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머리에다 러시아제 떼떼권총을 들이대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싸늘한 총구의 냉정함을 느꼈다.“조용히 해. 시끄럽게 굴어 좋을 것 없어.”“아니 왜 이러는 거냐구. 당신 누구야?”“따라가 보면 알 수 있어. 고분고분 굴어.”그는 사정없이 나를 끌고 레스토랑을 빠져 나갔다. 어이가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어떻게 손을 써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발버둥 치는 나를 불끈 들어 올린 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순간적인 총격에 눈을 감고 얼굴을 바닥에 쑤셔 박았다. 안경이 허공에 튀어 오른 뒤 힘없이 내동댕이쳐졌다. 머리통에 손가락 굵기의 바람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을 통해 골수가 허공으로 치솟은 탓인지 머리가 빈 깡통같이 비어 있었다. 시퍼런 섬광이 동공을 강하게 찔렀고 이어 급작스럽게 수축된 동공이 신축성을 잃고 멎었다. 앞이 캄캄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코맹맹이 같던 메가폰 소리도, 또 전투화 발자국소리도, 찢어질듯 천정으로 솟구쳤던 괴성도 달팽이관이라는 이름의 블랙홀로 스며든 뒤의 고요함만 있었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콧속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야. 이를 깨물고라도 살아야한다.’ 다시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문 쪽은 그가 지키고 있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후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아날 틈이 있다면 가슴까지 차오르는 카운터를 뛰어넘는 길 뿐이었다. ‘카운터를 뛰어 넘자. 달아나자. 저 미치광이의 총에 죽을 수는 없다. 저자가 언제 총부리를 내게 겨눌지 모른다. 살아야한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오른쪽 무릎이 가슴에 닫도록 끌어당겨 낮은 포
“개새끼들아. 할 테면 해봐.” 그는 여종업원의 정수리에 총구를 바싹 들이대고 길게 숨을 들이켰다. 잔인한 눈빛이 그녀의 볼을 핥았다. 종업원의 흑갈색 눈빛이 순식간에 탁한 빛으로 변하며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빨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몸서리치도록 예민하게 만져지는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서서히 덮쳐오고 있다는 절박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종업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창백한 얼굴로 그의 눈빛을 주시했다. 레스토랑의 유리창이 멀리서부터 깨지기 시작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