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알렉세이의 별장6월17일 “따르릉.” “따르릉.”나는 전화 벨소리에 잠이 깼다. 부스스 게으르게 눈을 뜨고 몸을 돌아 뉘였다. 하지만 벨소리는 귀찮게 계속해서 울렸다. 베개로 귀를 막았지만 벨소리는 멎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잠이 설깬 탓 인지 눈알이 무거웠다.“여보세요.”“빅또르 김입니다.”“이른 새벽에 웬일이십니까?”“지난번에 내게 부탁하신 물건 구입 문제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잘 해결될 것 같습니다. 오늘 알렉세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올 테니까 그를 만나 보세요
“드레곤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나요?”“그 사람들은 다시 본적이 없어요.”“좀더 소상하게 기억해 보세요.”“그들 중 한 사내는 두터운 안경을 끼고 있었어요. 그리고 같이 온 사람들은 그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어요. 이곳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그녀는 누군가가 창밖에서 이런 말을 엿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수시로 반쯤 열린 창문을 응시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불안감을 씻어주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 닫는 시늉을 하며 주차장을 내려다 봤다. 주차장에는 늘어선 차들 사이로 어두운 그림자를 몰고 다니는 사내들이 서너 명
나는 술잔을 들며 엘레나 조에게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을 비운 뒤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자 그녀는 말없이 잔을 받아들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 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것을 무언으로 시사했다. 그녀는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조심스럽게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독물에 젖은 것처럼 보이는 초록색의 귀걸이가 흔들렸다. 커다랗게 벌어진 눈동자는 지치고 적막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녀가 갑자기 장님이 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을 했다. 얼굴에 긴장과 짓눌
그녀는 내가 깡마른 사내와 흥정을 끝냈다는 사실을 안 탓인지 유난히 내 앞을 오가며 요염을 떨었다.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몸으로 내가 앉은 테이블가까이 다가와 촛불에 빛나는 엉덩이를 몸서리치도록 요동쳤다. 날카로운 하이힐 축과 팽팽히 긴장된 허벅지,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약간의 체모와 휘감아 도는 둔부의 굴곡. 이런 것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탁한 동공에 깊숙이 감추고 나에게 다가올 것을 손짓했다.러시아인들이 운영하는 주점에서는 무희들에게 몸을 팔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또 러시아 무희들도 그것을 결코 용납하
내가 그 사내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불현듯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홀을 돌아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그는 나와 눈빛이 마주친 뒤 등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왜 밖으로 나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또 내 테이블 촛불이 눈앞에 있었던 탓에 그를 정확히 볼 수도 없었다. 중키에 동양계라는 것 정도 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삼아 그를 유심히 볼 이유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채린을 찾는데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그 자가 밖으로
속이 훤히 내보이는 실크조각에 눌린 콩알만 한 유두가 어둠 속에 돋보였다. 그녀의 살결은 바닥에서 분출되는 조명에 비쳐 갓 짜낸 우유같이 신선하게 다가섰다. 붉은색 조명을 정면으로 받은 그녀의 사타구니는 이글거리는 햇살같이 시선을 빨아들였다. 길게 뻗은 다리와 덜름하게 달려 올라간 엉덩이는 주점을 찾은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그녀는 시간을 알리는 인형같이 음악이 경쾌해지자 곧바로 음률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몸을 흔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몸은 광란에 젖어갔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은 어
그제야 깡마른 사내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흉측하게 생긴 그와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주변을 애써 둘러보았다. 그 때 안으로 들어갔던 사내가 나왔다. 그는 자리가 있다며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나는 몸이 약간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럴 때마다 아랫배에 힘을 주며 이를 굳게 다물었다. 깡마른 사내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바닥에는 핏빛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희미한 조명을 받은 벽에는 아가씨들의 사진이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그 사진들은 하나같이 반라의 모습으로 시선을 끌었다. 동양계
나는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따냐의 차로 돌아왔다.“아직 문을 열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요. 오늘 저녁에 다시 와야 할 것 같아요.”“혼자서 들어가려고요.”“혼자서라도 들어가야지요?”“총영사관에 연락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그럴 수는 없어요. 영사관에서 안다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거요. 영사관측의 입장을 잘 알지요.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울 테니까. 기자 신분인 내가 이곳에서 사라진다면 영사관도 입장이 난처해지거든요. 영사관 사람들은 내가 채린을 찾기 위해 이렇게 다니는 것조차
[7] 골든 드레곤6월16일 하바롭스크거리는 호텔에서 도심을 지나 다소 한갓진 곳에 있었다. 낡고 육중한 건물들이 도열한 거리는 이른 새벽 공기만큼이나 음산했다. 우거진 가로공원은 정리되지 않은 채 스산한 한기와 함께 거리의 숨통을 조였다. 짙푸른 색감이 거리 전체를 덧칠했고 숲 속에 도심이 묻혀 있다는 착각마저 일으켰다.따냐의 승용차가 비실대며 시동을 멈춘 곳은 낡은 아파트 옆이었다. 5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는 오랜 세월의 흔적과 아이들의 낙서에 잘 길들어 있었다. 베란다에 쳐진 난간 대는 녹슬었고, 창문마다 붙어선 유리창은 두터
그들은 골목집에서 나를 엿봤거나, 아니면 노파의 고자질을 듣고 나를 털려고 이곳에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매춘부들에게 뒷돈 집어 주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내가 호사스런 사업가이거나, 혹은 이곳 실정을 전혀 모른 채 홍등가를 찾은 관광객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정작 내게서 별다른 소득이 없자 그들은 몹시 불쾌해 하는 기색이었다.칼을 들이댄 사내가 내 코앞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대고 나를 빤히 내려다 봤다. 큰 눈알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짙게 뻗은 콧수염과 콧등에 붙어있는 사마귀가 더욱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나와 눈빛을 마주대하는 것조차 귀찮은 기색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얇은 겉옷을 벗어젖히고 알몸으로 바퀴벌레처럼 담요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값싼 눈빛으로 나를 유혹했다.나는 문득 그녀의 행동에 헛구역질을 느끼며 속으로 “골든 드레곤”과“하바롭스크거리”를 되새김질했다. “고마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불결한 공간, 어두운 조명, 머리가 지끈거리는 비릿한 냄새, 이 모든 것이 몸에 흠뻑 배인 것 같았다.밖으로 나온 나는 가쁘게 호흡을 토했다. 폐 속에 고스란히 고여
그녀는 딴전을 펴며 더 이상 말문을 열지 않았다. 담배 연기만 뽀얗게 내뿜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내 물음에 무관심 한 것처럼 창밖을 넘어다봤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뒷주머니의 지갑을 뒤져 5불짜리 지폐를 그녀의 손에다 쥐어 주었다. 그러자 얼굴에 화색이 돌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헤프게 파헤쳐진 옷을 여미고 침대 난간에 걸터앉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납치된 한국 여자가 이곳에 끌려 왔다거나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그런 얘기를 들은 적은 없어. 하지만 요즈음 중국계들이
“서울.”“아! 서울 코리아?”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서울 코리아는 잘 알지, 내 친구도 그곳에 갔어.”“무엇 하러?”“돈 벌로…….코리아는 대단한 나라더라고. 땅은 작지만 우리보다 훨씬 잘 살잖아. 내 친구도 그곳 부산에 갔거든.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그래?”“그런데 왜 이곳에 왔어?”그녀는 내 눈치를 살핀 뒤 곧바로 말꼬리를 돌렸다. “글쎄…….”“사업차 왔나 봐? 간혹 그곳 사람들이 이곳에 온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직접만나 보기는 처음이내. 무슨 사업을 하는데.”나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설명
나는 복도 중간쯤에 난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은 눅눅하고 비릿한 냄새로 절어 있었다. 그 냄새는 소금에 곰삭은 고등어의 냄새와 흡사했다. 침대에 깔린 낡고 때에 찌든 모포가 어슴푸레 보였다.그 방에는 노란 머리칼의 매춘부가 멋쩍게 서서 히죽거렸다. 그녀는 껌을 씹고 있었는데 핏기 없는 얼굴에 립스틱이 짙게 발린 입술이 유난히 또렷했다. 가까스로 가릴만한 엷은 천 조각을 몸에 걸치고 빨간 매니큐어가 발린 손톱을 물고 있었다. 나이는 스무 살이 채 될 것 같지 않았지만 얼굴색은 이미 황혼기를 접어 든 중년의 모습이었다.
어스름한 창문 너머로는 낡은 침대와 화장기 짙은 아가씨들이 들여다보였다. 마피아들이 홍등가를 장악한 채 공안당국자들과 짜고 아가씨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노파는 포주였으며 그는 홍등가를 찾은 사내들에게 아가씨를 소개하는 일을 했다. 노파는 내게 자신이 이곳의 주인처럼 거만하게 행세 했지만 나는 이 노파가 마피아들의 심부름꾼에 불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노파는 나를 데리고 통로 중간쯤에 있는 방으로 갔다. 나는 앞서가던 노파의 등을 두드려 세웠다. 그리고는 5불짜리 지폐를 그
밤늦도록 주점을 돌아다녔으므로 뻑뻑한 피로가 발목을 조였다.그 때 골목 안쪽에서 나무문이 빠끔히 열리며 불빛이 새어 나왔다. 두 사내가 용수철처럼 밖으로 튕겨져 나온 뒤 곧바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며 연신 나를 힐끗힐끗 돌아보았다. 어둠속에 선 나를 단속 반원쯤으로 본 모양이었다.나는 곧바로 그 사내들이 튀어 나온 집을 향해 다가갔다. 그 집은 하수구를 통나무로 대충 덮어 문과 연결을 시킨 집이었다. 하수구 썩는 냄새가 지독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길게 호흡을 하고 문을 두어 번
나는 급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공허한 신호음이 들린 뒤 생소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순하게 느낄 만한 그런 목소리였다.“박 인석씨 계십니까?”“박 부장님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시는데요. 실례지만 누구십니까?”“한국에서 온 장 민이라는 사람입니다. 어디 가셨습니까?”“박 부장님은 회의 관계로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장 중이십니다.”“언제 쯤 오십니까?”“이번 출장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15일 정도는 걸릴 것 같다고…….”“예, 혹 연락이 오면 한국에서 온 장 기자에게 전화 왔다고 전해 주세요. 전
나는 객실 창문 아래 놓인 싱글소파에 앉았다.따냐가 개인적인 일로 아침 일찍 올 수 없다는 전화를 걸어왔다.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켰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주소록을 뒤졌다. 정확히 4년 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내게 유달리 친절을 베푼 박 인석의 전화번호를 낡은 메모지 갈피 속에서 찾았다.그는 당시 한국 기업의 현지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홋카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내가 이곳 취재를 끝내고 귀국한 뒤에도 계속 연락을 해왔다. 물론 나는 바쁘다는 것을 핑계 삼아 자주 편지를 하거나 전
호텔 수속을 끝내고 배당 받은 방은 6045호실. 6층의 끝 방이었다. 추락할 것 같은 불안감이 소름 끼치게 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루하게 오른 뒤에야 6층 로비가 나타났다. 그곳은 공중전화가 걸려있는 작은 로비를 중심으로 길게 드러누워 있는 복도가 양쪽으로 뻗어 있었다. 바닥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벽체에는 두터운 베니어판이 칙칙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복도 중간쯤에 매달린 전등은 꺼진 상태였다. 복도는 어둠이 살포시 깔린 골목길을 연상 시켰다. 복도 끝에 붙은 창문은 빗물이 스친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나는 객실 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