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었다. 빅또르 김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그 역시 빈손이었다. 원점으로 돌아갔다. 나는 주소록을 뒤져 나홋카에 있는 박 인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나홋카의 분위기도 알아볼 겸, 또 채린에 대한 소식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하지만 박 부장은 자리에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출장이 의외로 길어져 다음 주쯤에야 온다는 것이 그곳 여직원의 설명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알리에크는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유달리 큰 배가 볼품없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나는 알렉세이에게 전화를 걸
[11] 깨진 커피 잔6월24일 블라디보스토크 호텔에서 눈을 뜬 것은 낮 12시가 조금 지나서였다.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병이 텅텅거리는 소리를 내며 머릿속을 굴러 다녔다. 뒷골이 당겨왔다. 피로가 가시지 않아 몸이 무거웠다.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들이켰다. 하지만 취기가 가시지 않았다.알리에크는 그 때까지 맞은편 침대에서 코를 골며 곤하게 자고 있었다. 따냐는 보이지 않았다.나는 침대 난간에 걸터앉아 까칠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어디로 데려갔을까. 미스터 쟝은 왜 채린을 데려갔을까. 알리에크의 말
채린이 머물렀던 아파트는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문을 열고 관리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방안이 어수선했다. 간단한 가재도구들이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고 옷가지들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대부분 그의 옷가지들이었다. 다급하게 빠져나간 흔적이 발자국같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주방에는 한국산 컵라면과 과자봉지, 일회용 주사기 등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아파트는 방 두 칸과 주방이 전부였다. 안방쯤으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자 러시아산 특유의 메케한 향수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벽에는 여자들의 요염한 나체 사진이 너절하게
덮어두었던 낡은 신문을 들추어 보기도 했고,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책자를 들추기도 했다. 잠시만이라도 자신을 더 귀찮게 군다면 관리실의 문을 안으로 걸어 잠글 기세였다. “그렇다면 미스터 쟝의 방을 잠시만 보면 안 되겠습니까?“그것은 곤란하지. 주인이 없는 집을 어떻게 보여 주누”그는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심상찮다는 생각이 스쳤다. 쟝이 관리인을 매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10불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관리인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며 연신 나를 아래위로 훑어 봤다. 자신에게
그는 손을 떨며 주소를 쓴 뒤 손가락을 움켜쥐고 탁자에 엎드렸다.나는 주소를 집어 들고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그는 거친 숨을 토하며 탁자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 몸에서는 눅눅한 땀 냄새가 번져왔다.나는 룸 쪽으로 몸을 돌리는척하다 이내 돌아서며 권총의 손잡이로 그의 후두부를 힘껏 후려 갈겼다.그는 비명도 토하지 못하고 문어같이 그 자리에 허물어지며 탁자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선홍빛으로 물든 흰 탁자보가 함께 미끄러져 그의 얼굴을 덮었다.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루스 카야 이즈바를 나왔다. 알리에크는 벤치에 앉아있다 내가
나는 권총을 들이댄 쿠션을 입에 다시 물렸다. 눈물이 지르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제야 그는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쿠션을 입에 문 상태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채린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면 더 큰 고통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에게 눈빛으로 말했다.그는 손가락을 움켜쥔 채 더욱 심하게 떨었다.나는 그에게 다시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라고 말했다.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재빨리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옆에 놓인 재떨이가 자잘하게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렸다. 탁자보가 어느
그는 또 내가 이곳에 올 줄 알았으며 그런 사실은 이곳 조직원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라고 협박조로 말했다. 도리어 내가 조직원들에게 적발된다면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는 손톱으로 탁자를 긁으며 자신이 빠져나갈 좁은 틈을 시종 찾고 있었다. 나는 규칙적으로 탁자를 긁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내려다 봤다. 손목에 새겨진 까만 독거미 문신이 곰실거렸다.“쥐새끼 같은 놈.”순간 나는 그의 관자놀이를 겨누고 있던 권총의 손잡이 끝부분으로 사내의 왼쪽 새끼손가락 끝마디를 내리 찍었다.그러자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조용히 물었다.“어디 있나.”“........”그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되물었다.“이 사람 어디 있나. 살고 싶으면 입을 열어.”“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긴장을 늦췄다. 내 마음이 갈수록 조급해지는 것과는 달리 그는 도리어 느긋해지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던 몸도 이제는 안정을 되찾았고 바이올린 줄같이 팽팽하게 긴장됐던 얼굴에는 여유가 감돌았다.나는 낮게 달린 전등으로 그의 얼굴을 비췄다.그의 눈빛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는 채린의 사진을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내실로 통하는 복도를 유심히 관찰한 뒤 화장실 쪽으로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사내가 내 앞에 불쑥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바람처럼 다가왔다.나는 숨을 죽이고 첫 번째 룸 뒤에 숨어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사내는 화장실 속에서 물수건을 빠는 모양이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질척거렸다. 그는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지 콧노래와 휘파람을 섞어 부르곤 했다. 알아들을 수 없으리만큼 흥얼거리는 그 소리 때문에 쉽게 그가 있는 화장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그는 여전히 흥얼거리며 화장실을 나왔다.
내 볼을 만졌다. 하지만 까칠한 수염만 만져졌다. 그녀는 없었다.루스 카야 이즈바가 열린 것은 오후 6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내가 지루함에 지쳐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딴전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도 나는 한 중년 부인의 뒤뚱거리는 걸음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가 체중을 이기지 못해 부었고 부푼 허리를 치마끈으로 동여맨 탓에 답답함을 느낄 만큼 몸통이 조인모습 이었다. 내가 그녀를 유독 주의 깊게 지켜 본 것은 그녀의 묵직한 가슴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의 그것들 가운데 가장
일방통행으로 통하는 도로와 도시공원 사이, 비슷한 크기의 문들이 벌집같이 조밀하게 붙어있는 회색빛 건물의 중간쯤이었다. 그곳은 낡고 잘 달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문간에는 “루스 카야 이즈바” “술과 음악 그리고 여자, 사랑이 속삭이는 곳”이라고 쓰인 간판이 아담하고 좁은 출입문 위에 붙어 있었다. 문 양편에는 먼지가 낀 창문이 나있었고 한쪽 창문 곁에 속옷만 걸친 무희의 색 바랜 사진이 붙어 있었다.그곳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여느 술집과 달리 겉보기엔 무슨 사무실같이 보였다. 낡은 무희의 사진이 나붙지 않았다면 이곳이 술집이 아니라
우수리스크에서 행한 나의 행동이 이곳 현지 중국계 마피아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이고 또 모독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들은 나에게 보복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충고했다.그의 충고가운데 나를 더욱 불안하게 한 것은 그런 보복이 채린에게 미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중국계는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며 그런 보복이 이루어 지지 않을 경우 채린에게 앙갚음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기분이 몹시 언짢았다.사실 나는 그동안 내 행동이 채린에게 어떻게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아내를 찾으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