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 신발 등만 수선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삶)도 수선이 가능합니다. 단 수선하고 싶은지, 아니면 버리고 싶은지 결정은 본인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때론 선택하는 것이 고통을 동반하더라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가치부여는 다양한 차이를 가져옵니다.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아픔이나 상처들로 인하여 자신을 억압하였거나 통제하다보면 감정의 쏠림, 즉 치우침으로 스스로 늪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관대해져야 자신의 삶을 자유자재로 수선할 수 있게 됩니다.이런 말들은 일상에서 자주
‘수습기간’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야 할 과정이다. 직장인에게도, 자영업을 하는 사람에게도,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들과 유치원생, 초등학생을 포함한 모든 학생들에게도 겪어야 할 코스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즉 ‘수습기간’을 ‘적응기간’이라고 표현하면 이해가 더 쉽겠다. 더 고급 진 단어로는 ‘인턴사원’으로도 불린다.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수습기간’은 ‘적응기간’으로 이해하면 좋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업의 흐름을 인지할 시간으로 이해하면 된다.
부모의 보호 안에서, 자녀의 양육이 포근하고 따뜻했더라도(부모의 입장에서) 이기적인 자녀는 분명 존재한다. 이 말의 의미는 부모가 인격적으로 자녀를 대하고 충분한 영역에서 의존하도록 펼쳐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녀의 인격과는 무관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했다면 자녀를 존중했던 것이 과한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즉 오히려 자녀의 이기심을 더해주는 ‘독’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항상 좋은 것이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한없이 부족하고, 불평 불만스럽고 뭐라도 잘못되면
운전을 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있다. ‘속도를 줄이면 사람이 보입니다. 속도를 낮추면 사고가 줄어듭니다.’라는 글이다. 이 문구는 버스에도 붙어있고, 길가 곳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말을 심리학적을 재해석을 해보면,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자신도, 타인도 눈에 들어온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마음의 여유가 ‘있고 없음’에 따라 자신의 통제능력이 저하되기도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차의 ‘속도량’이 외부적이라면, 마음의 ‘여유 있음’은 내부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외부와 내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속도를 줄이면서
내기 바둑에서 졌을 때 자신이 졌던 상황에서 한 숨만 푹푹 쉬고 있다면 더 이상의 자기 발전은 없다.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졌던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이나 실수, 자신도 모르게 놓쳤던 부분을 곱씹는다. 곱씹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다음에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까에 대한 방책은 곱씹고 또 곱씹는 것이다. 이 방법을 공부, 일, 시험, 연애, 결혼, 사업, 도박, 관계 등 모든 것에 접목해 보면 어느 정도 내가 해야 할 몫이 보이게 된다. 그러다보면 어렵고 복잡했던 삶도 그리 복잡하지 않을 수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제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세요?” 조금 황당하면서 당황스러운 질문에 “어떤 사람처럼 보이고 싶으세요?” 라고 되묻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여 지는지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여 지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많이 애썼을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취업이나 시험면접을 보기 위해서, 맞선을 보는 자리에서,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등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점점 살아지면서 삶의 중요한 부분이 조금씩 바뀌었을 뿐, 여
이런 말을 떠올린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소수 몇 명에게 해당되는 말인가에 대해 현실적으로 찾아보게 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 더 심화되면서 ‘사람에는 귀천이 없고, 직업에는 귀천이 있다.’라는 말로 변형되었지만, ‘사람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도 의심스럽다. 이 말 또한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말일뿐이다. 이것을 ‘자기 위안’이라고 한다.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별개로 분류가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은 자신의 마음가짐을 ‘욕구에서 바램이나 욕심으로 변질시키지 말라’는 의미다. 사람의 마음은 연약해서 자주 흔들린다. 또한 ‘욕심’은 그 마음의 흐름을 자신의 고집과 아집으로 흐르게 하는 마약 같은 성질을 지녔다. ‘고집과 아집’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어느 정도의 고집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즉 ‘고집’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굳건하게 지키며 삶을 살아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신념이 되기도 한다. 이 때 신념이 ‘무조건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자체로 인정
용서를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괴롭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잘못도 모르는 사람이 뉘우치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미안함도, 죄송함도 모르면서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란 말이 몸에 베어버린 사람도 있다. 이것이 자기회피적인 삶의 태도에서 발생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잘못을 한 적도 없는 데,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픈 사람의 문제인 것인가? 잘못 한 적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문제인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 그 사람을 용서한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사람에게 ‘용서’라는
2020년 1월에 아버지께서 폐암진단을 받고 조직검사에 실패하고 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한 지가 1년이 되었다. 아버지가 한 달 사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다. 기력도 없고 계속 누워만 계신다. 빈번하게 멍 때리기와 깜빡깜빡하신 인지능력의 저하, 우울한 언어사용과 표정도 아버지 표현대로 ‘죽을 맛’이다. 식사를 하시면서도 힘이 드는지 긴 숨만 내쉰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아빠가 올해 못 넘기겠어." 라고 울상인 표정을 짓고서는 "나는 귀도 안 들리고 어떻게 사냐?"고 한탄을 하신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공감을
곱게 다듬어진 언어를 사용하고 공감되는 눈빛을 보내고 있지만 자신을 드려다 볼 수 없는, 보지 않는, 보지 못한 심리상담사를 만날 때가 종종 있다. 또 다른 현장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볼 때는 ‘헉’ 소리만 난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심리상담을?’, 또는 ‘온도가 없는 심리상담사’라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해준다. 그 사람과 같은 현장 속에 있을 때 내 모습을 자꾸 보게 된다. ‘나는 어떤 심리상담사인가?’, ‘나는 상담현장과 다른 현장에서 어떤 사람일까?’, ‘내가 다른 상담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시절인연이 있음을 더 절실하게 알게 된다. 그것을 ‘유효기간’이라고 표현해본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음식, 물건들에 유통기한이 있듯이 사람과의 관계에도 그렇다. 이것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만나는 그 순간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에게 충실해지는 방법이다. ‘정성을 다하라’는 의미는 비위를 맞추고 자신을 속이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만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의미로써의 ‘정성’이다.누구나 겉으로는 상냥하고 친절할 수 있
어느 날 묵상 중에 ‘아’ 하고 떠오른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 마땅하고 옳은 일은 오직 ‘감사함’이다. 또한 자비를 베푸는 행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자비 베풂을 받는 자’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찰라’의 깨달음이니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이 불평하고 시기하고 탐욕스러운 이유는 마땅하고 당연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낫다고 생각하거나 자신보다 더 못된 사람이 잘 사는 꼴이 배가 아프다.’ 등의 ‘못마땅하다’는
자녀 또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힘들어요.’ 하면 바로 채워주고, 또 ‘힘들어요.’ 하면 또 바로 채워주는 이러한 보호가 과연 그 당사자들의 삶에 있어서 효과적인가? 더 간단히 말해서 좋은 영양분인가? 아니면 좋지 않는 영양분인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스스로 힘듦을 경험하고, 극복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영역의 폭은 넓어진다. 이 또한 사람마다 긍정사고와 부정사고에서의 차이는 크다.항상 열심히만 살아온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혼자 일궈내야 했던 사람에게는 그런 삶이 숨 막힌다는
‘나에게만 이라도 좋게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너를 존중한다. 내 앞에서는 노력하는 모습처럼 이야기하고 뒤에서는 전혀 다른 행동(다른 사람에 대한 집착, 의심, 괴롭힘 등)으로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라고 솔직한 감정을 말하게 되면 ‘마치 내가 야단맞고 있나?’, ‘내가 공감 받고 있는 게 맞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피해의식, 의존성이 높은 사람이 갖는 사고 패턴이다.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정상적인 행동의 패턴(의처증, 의부증 등)이 아니면 서로를 위해서 만남을 멈춰야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문득 또 다른 깨달음이 왔다. 깨달음은 나의 부족함과 미숙함으로 민망스런 일을 당했거나 중요한 시점을 놓쳐버린 자신에 대한 한탄의 마음이 복합적으로 들어있다.‘어떠한 행동이 습관이 되면 그 행동을 마음먹지 않는 때에도 그렇게 행동을 하게 된다’라는 의미를 지녔다. 편하다고 생각하는 가족 안에서의 가족을 대하는 태도나 ‘가족’ 공동체 안에서의 책임성 부분에 대해서도 이 속담을 빗나가지 않는다. 즉 의존성이 높은 사람,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사람, 무슨 일이든 대충대충 살려고 하
‘제가 자주 욱해요.’, ‘남편이 감정이 욱해요.’, ‘부모님이 감정이 기복이 심해요.’ 등 주변에서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다고 흔히들 그렇게들 말을 한다. 인간을 ‘감정의 동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양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감정 속에는 ‘욱’하는 성질도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감사함이 충만한 사람은 ‘부모님은 늘 자상하시고 온화하신 분이었어요.’, ‘저는 매사에 감사해요.’, ‘저희 부부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감사하게 받아드려요.’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흔치 않다. ‘흔치 않다’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연약할까? 누가 봐도 좋은 사람, 늘 배려하고 베푸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또한 어느 누구한테 기대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것은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표현이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도 연약함은 있었다. 자신에게 취약한 부분은 ‘부탁’ 하는 것이었다. 부탁을 했고, 상대방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충분히 들어줄 수 있다고 했다. 부탁을 한 사람의 기대였을까? 부탁의 결과물을 본 순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건으로 두 사람의 관계
어릴 때부터 ‘네가 힘들면 다른 사람을 도우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리고 ‘네가 도와주고 싶은 만큼만 도와주는 거야.’ ‘엄마는 다른 사람들보다 네가 더 소중하단다.’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이 아닌 진심과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면 아이는 밖에서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되고, 집에서는 갑작스런 짜증 또한 줄어들게 된다.흔히, 아이들에게 양보를 가르치고, 미덕을 배우도록 가르칠 때가 은연 중 많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과유불급’ 일 경우는 탈이 나게 되어 있다. 자신 안의 내면의 상처로 인하여 자녀에게 착한 아이를 강요하거나, 자신도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해를 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똑같은 행동을 할까? 그렇지 않다. 개인마다 기질적 요인과 성격에 따른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병을 앓는 것도 체질적 요인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계속 아닌 것을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선택이고 무엇 때문일까? 끊어내지 못하는 사랑과 증오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불안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과 양심의 갈등에서 오는 것이 자신에겐 죄책감으로 온다. 즉 양가감정을 자주 느낀다면 불안과 죄책감의 강도는 높아진다. 이럴 경우 자신이 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