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피해 몸을 숨긴 곳은 노점상들이 즐비한 시장골목이었다. 그곳에는 시장사람들이 허리높이의 회색빛 판자 위에 딸기와 야채, 거센 불에 구어 낸 빵, 음료수 등 식료품을 올려놓고 팔리기를 기다렸다. 잡동사니며 세간들이 거리에 너절하게 널려 있었다. 하얀 보자기를 뒤집어 쓴 노파와 체중을 거북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뚱보 아주머니. 중년의 노동자, 때가 꼬질꼬질 한 시장 아이들, 흥정에 지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다.나는 몇 발자국을 더 달리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따라가며 담배꽁초를 주워들었다. 말보르 담배였다. 필터에는 눅눅한 침과 질겅질겅 씹힌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채린의 침대 밑에서 발견했던 그 담배꽁초 그대로였다. 그자였다. 채린을 어디론 가로 데려 갔을지도 모를 놈.나는 그가 달아나는 쪽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뒤쫓기 시작했다.30여 미터쯤 앞서가는 그를 잡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금방 손끝에 잡힐 것 같았다. 나는 다리에 힘을 더하며 그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는 내가 뒤쫓는 것을 힐끗 돌아본 뒤 건물의 구석진 곳으로 휙 돌았다. 나는 그를 놓칠세라 이를 앙다물고
그 때였다. 내 앞 10여 미터쯤 떨어진 아파트 모퉁이에서 매끈하게 생긴 동양계 사내가 불쑥 튀어 나왔다. 얼굴선이 단조로운 외모로 보아 일본인 같았다. 색이 적당하게 바랜 청재킷과 청바지를 입고, 몸은 호리호리하게 보였으며 눈썹은 먹물을 바른 것처럼 짙게 돋아 있었다. 나이는 25세 정도로 보였다. 그는 담배를 비스듬히 꼬나물고 걸어왔다. 생긴 것과는 달리 불량기가 몸에서 풍겼다. 그는 나를 보는 순간 움찔 놀라는 기색이었다. 새까맣게 박힌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바지 주머니 속에 꽂혀 있던 손이 순
나는 권총의 자물쇠를 잠갔다.권총을 지닌 후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속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기를 간절히 고대했다. 권총에 촘촘히 박힌 실탄을 다시 뽑아 낼 까도 생각했지만 홍등가에서 격은 일이 떠올라 장전한 채로 서너 차례 자물쇠를 확인하고서야 옆구리에 총을 찼다.나는 따냐에게 차이나타운에서 50 미터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 옆에 차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는 혼자 차이나타운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연신 옆구리에 찬 총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자기 최면을 통해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들고 싶다는 절박한
그러나 줄곧 그런 즐거운 생각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어느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섬광처럼 스치면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곤 했다. 그런 생각들은 대체로 채린이 나를 보고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리지나 않을까. 또 그녀가 의도적으로 나를 피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들이었다.채린은 내게는 가장 친한 친구이며, 연인이고, 애인이었다. 7년여의 삶을 그녀와 나누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떨쳐 본 적이 없었다. 도리어 그런 생각은 돌이끼 낀 부도같이 갈수록 빛깔을 더하며 우리 사이를 끈끈하게 묶었다.그런데 그런 아름다움이 오늘에 와서 흔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러면서도 내가 빅또르 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 아닐까를 의심했다. 채린을 보았다는 그 말이 도리어 믿기지 않았다.“뭐라고요?”“김 선생님을 우수리스크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답니다.”나는 그제야 흐트러졌던 생각들이 제자리를 잡아감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흐트러졌던 병사들의 대열이 일순간에 기수의 신호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우수리스크에 있는 주점에서 김 선생님과 비슷한 사람을 아이들이 봤답니다. 1주일 전쯤. 그러니까 지난 8일 저녁에 아이들이 우연히 중국계들이 경영하는 ‘바’
알렉세이는 그제야 2층 계단으로 오른 뒤 10여 분이 지난 뒤에 내려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권총과 실탄 5발이 들려 있었다. 그가 들고 나온 권총은 살상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제 토카레프 38구경 다연발 권총이었다.그는 권총을 내게 넘겨주기 전에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다.그것은 먼저 총기를 가지고 다니다 경찰이나 정보요원 등에게 적발되면 그 즉시 철창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총기를 지니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하며 혹 그것을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된다 해도 자신에게 총
“못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그것은 빅또르 김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보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찾아오지 마시고 모든 것을 빅또르 김과 상의를 하세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도 그에게 얘기를 해놓을 테니까. 왜냐하면 나를 만나봐야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 세상이 평안치 못하기 때문이요. 중국계 아이들이 블라디보스토크 한복판에서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지 않소.”그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지며 자신이 뱉은 말에 스스로 동요되는 듯 더욱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그자들은 정신을 좀먹는 마약거래를 일삼고 있소.
그는 회갈색의 싸늘한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작은 체구에 비해 다부지게 보였으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청바지와 하늘색 남방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이미지와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손가락에는 아일랜드 정통문양인 켈틱 디자인이 선명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자리에 앉으실까요.”그는 정중하게 우리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늙은 사내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일렀다.그는 다소 당돌하게 느껴질 만큼 당당했고 매사에 자신감이 살아 있었다. 또 확실하게 일 처리하는 것을 생명으로 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
“알렉세이?”“…….”대답이 없었다.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쫓기듯이 주변을 둘러 본 뒤 곧바로 내게 손을 내밀며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는 목각인형처럼 뻣뻣하게 선 채 귓속말을 했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차로 갑시다. 차는 어디 있소?”따냐의 차에 오르자 그제야 세웠던 옷깃을 내리며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곳으로 가자고 요구했다.“나는 알렉세이의 심부름을 왔소, 그가 별장에서 기다리고 있어요.”그의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도 전에 고개를 창밖으로 돌린 뒤 다시 나를 보지 않았다.그가 우리를 데려
[8] 알렉세이의 별장6월17일 “따르릉.” “따르릉.”나는 전화 벨소리에 잠이 깼다. 부스스 게으르게 눈을 뜨고 몸을 돌아 뉘였다. 하지만 벨소리는 귀찮게 계속해서 울렸다. 베개로 귀를 막았지만 벨소리는 멎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잠이 설깬 탓 인지 눈알이 무거웠다.“여보세요.”“빅또르 김입니다.”“이른 새벽에 웬일이십니까?”“지난번에 내게 부탁하신 물건 구입 문제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잘 해결될 것 같습니다. 오늘 알렉세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올 테니까 그를 만나 보세요
“드레곤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나요?”“그 사람들은 다시 본적이 없어요.”“좀더 소상하게 기억해 보세요.”“그들 중 한 사내는 두터운 안경을 끼고 있었어요. 그리고 같이 온 사람들은 그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어요. 이곳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그녀는 누군가가 창밖에서 이런 말을 엿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수시로 반쯤 열린 창문을 응시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불안감을 씻어주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 닫는 시늉을 하며 주차장을 내려다 봤다. 주차장에는 늘어선 차들 사이로 어두운 그림자를 몰고 다니는 사내들이 서너 명
나는 술잔을 들며 엘레나 조에게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을 비운 뒤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자 그녀는 말없이 잔을 받아들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 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것을 무언으로 시사했다. 그녀는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조심스럽게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독물에 젖은 것처럼 보이는 초록색의 귀걸이가 흔들렸다. 커다랗게 벌어진 눈동자는 지치고 적막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녀가 갑자기 장님이 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을 했다. 얼굴에 긴장과 짓눌
그녀는 내가 깡마른 사내와 흥정을 끝냈다는 사실을 안 탓인지 유난히 내 앞을 오가며 요염을 떨었다.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몸으로 내가 앉은 테이블가까이 다가와 촛불에 빛나는 엉덩이를 몸서리치도록 요동쳤다. 날카로운 하이힐 축과 팽팽히 긴장된 허벅지,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약간의 체모와 휘감아 도는 둔부의 굴곡. 이런 것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탁한 동공에 깊숙이 감추고 나에게 다가올 것을 손짓했다.러시아인들이 운영하는 주점에서는 무희들에게 몸을 팔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또 러시아 무희들도 그것을 결코 용납하
내가 그 사내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불현듯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홀을 돌아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그는 나와 눈빛이 마주친 뒤 등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왜 밖으로 나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또 내 테이블 촛불이 눈앞에 있었던 탓에 그를 정확히 볼 수도 없었다. 중키에 동양계라는 것 정도 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삼아 그를 유심히 볼 이유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채린을 찾는데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그 자가 밖으로
속이 훤히 내보이는 실크조각에 눌린 콩알만 한 유두가 어둠 속에 돋보였다. 그녀의 살결은 바닥에서 분출되는 조명에 비쳐 갓 짜낸 우유같이 신선하게 다가섰다. 붉은색 조명을 정면으로 받은 그녀의 사타구니는 이글거리는 햇살같이 시선을 빨아들였다. 길게 뻗은 다리와 덜름하게 달려 올라간 엉덩이는 주점을 찾은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그녀는 시간을 알리는 인형같이 음악이 경쾌해지자 곧바로 음률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몸을 흔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몸은 광란에 젖어갔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은 어
그제야 깡마른 사내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흉측하게 생긴 그와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주변을 애써 둘러보았다. 그 때 안으로 들어갔던 사내가 나왔다. 그는 자리가 있다며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나는 몸이 약간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럴 때마다 아랫배에 힘을 주며 이를 굳게 다물었다. 깡마른 사내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바닥에는 핏빛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희미한 조명을 받은 벽에는 아가씨들의 사진이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그 사진들은 하나같이 반라의 모습으로 시선을 끌었다. 동양계
나는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따냐의 차로 돌아왔다.“아직 문을 열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요. 오늘 저녁에 다시 와야 할 것 같아요.”“혼자서 들어가려고요.”“혼자서라도 들어가야지요?”“총영사관에 연락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그럴 수는 없어요. 영사관에서 안다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거요. 영사관측의 입장을 잘 알지요.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울 테니까. 기자 신분인 내가 이곳에서 사라진다면 영사관도 입장이 난처해지거든요. 영사관 사람들은 내가 채린을 찾기 위해 이렇게 다니는 것조차
[7] 골든 드레곤6월16일 하바롭스크거리는 호텔에서 도심을 지나 다소 한갓진 곳에 있었다. 낡고 육중한 건물들이 도열한 거리는 이른 새벽 공기만큼이나 음산했다. 우거진 가로공원은 정리되지 않은 채 스산한 한기와 함께 거리의 숨통을 조였다. 짙푸른 색감이 거리 전체를 덧칠했고 숲 속에 도심이 묻혀 있다는 착각마저 일으켰다.따냐의 승용차가 비실대며 시동을 멈춘 곳은 낡은 아파트 옆이었다. 5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는 오랜 세월의 흔적과 아이들의 낙서에 잘 길들어 있었다. 베란다에 쳐진 난간 대는 녹슬었고, 창문마다 붙어선 유리창은 두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