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판도라 상자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여러 개일 수 있다. 판도라 상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가 없는 삶’을 살아왔을 확률이 높다.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반박할 수 있다. 판도라 상자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다. 어쩌면 진짜 진실일 수도 있다. 그 진실을 알기를 원치 않는 것이 대부분의 바램 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비밀을 누가 만들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판도라 상자가 의뢰로 많다. 예를 들면, 사랑했던 사람과 악연처럼 이별을 하고 가슴앓이를
어느 날 속상한 마음에 언니와 통화를 했다. 언니의 예화는 이렇다. “사우나를 다니는 멤버가 있는데, 그 중 한 언니가 매일 손주자랑만 하더라. 다른 사람들은 손주가 없는데 말이야. 이때 어떤 생각이 드니? 아이들만 키우고 있는 주부가 결혼 안한 친구를 만나서 애들 얘기만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말이라는 게 참 쉬우면서도 어려워. 상대방까지 생각하면서 내뱉어야 하니까. 나도 말실수를 했던 것은 아닌데 상대방이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말 수습하느라 애먹었어. 그 때 느꼈어. 언행을 더 조심해야겠다고”. 인간은 자기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람이지.” 라고들 말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들끼리도 “쟤가 나랑 안 놀아준대.”, “쟤랑은 안 놀아.” 등의 말을 많이 한다. 거의 대부분 ‘사람관계’가 가장 힘들었다고들 말한다. 그 ‘사람’, ‘사람’이 무엇으로 힘들게 하는 것일까? 한자로는 사람 인(人),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며 살아가라는 의미란다. ‘열 길 물속을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다. 인간이 가진 속성을 숙지하지 않을 때는 상처투성이가 될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어, 인간의
인간은 삶과 동시에 그 어떤 것에 대한 결과를 끊임없이 기다리며 결과 통보서를 받는다. 구인(求人)과 구직(求職), 한정된 물건을 사는 것과 반품 처리하는 것, 대학교 입학원서 지원에 대한 합격과 불합격, 자격증 시험에 합격과 불합격, 진급시험에 따른 합격과 불합격, 1차에서 5차까지 면접과정에서의 합격과 불합격, 결혼할 대상을 부모에게 인사드리는 과정에서의 마찰, 20대 대통령 선거, 지방선거, 군대 입영통지서 등 크게 부각되는 것부터 소소한 것까지 많다. 그 많고 많은 다양한 선택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우리가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치지 않는 한 바로 일어나서 흙을 털고 가던 길을 간다. 그 과정에서 ‘내가 왜 재수 없게 넘어졌지?’, ‘누가 여기에 돌을 갖다놔서 넘어지게 한 거야?’ 라는 원망의 마음이나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넘어지는 장소와 어떠한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때론 자기비하가 심한 사람일 경우에는 ‘나는 뭘 해도 재수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넘어지면 바로 일어나서 가던 길을 간다. 넘어진 사실조차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즉 어떤 사람(또는 장소)과 친밀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온전히 이해와 격려, 지지를 받고 있다고 느꼈을 때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감소된다.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느 날은 충분히 해소가 되었다가도 어느 날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 풀어내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한테 자신의 억울함이 덜 해소되거나 이해가 되었다가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보았을 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짐을 덜고자 자신의 경험을 나열한다. 이런 경우 뒷담화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비열한 느낌까지도 받을 정도로 자신의
코로나19를 접한 지 삼년 째 접어든다. 학생들은 비대면 수업으로 많은 날들이 진행되었고,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친구를 만나서 적응하고 관계 맺음을 배우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던 친구들과의 만남이 더 익숙하고 새 학년이 되어도 새 친구에 대한 설렘보다는 기본 생활 습관이 깨져있는 현실에서 학교 적응과 학습에 대한 진도의 차이, 자신의 학습 능력에 따른 진로문제로 큰 고심을 하고 있다. 현실이 두려워 게임으로 회피해 버리는 학생들, 휴대폰을 손에서 떼어놓지 않고 생활하는 학생들, 그런 사회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매
드라마 ‘악마 판사’에서 ‘힘 있는 놈들은 반성 안 해, 힘없는 놈들만 반성 해’ 란 대사를 듣자마자, 머리를 한 때 ‘꽝’ 맞는 느낌이었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은 ‘그래, 모든 인간이 똑같지 않아. 모든 인간에게 측은지심이 있는 것도 아니야. 용서도 반성도 후회도 열정도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나 갖는 마음은 아니야’ 그랬다. ‘나와 똑같다’라는 생각이 자신을 분열적으로 혹은 부분적은 미치게 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많은 부분을 잊고 있었고 자기만의 생각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서로 인사를 한다. 몇 년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라고. 복 짓지 않고 복을 많이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것보다도 ‘~받으세요.’처럼 ‘받음’에 익숙해져서 주는 것이 낯설고 어색한 행위로 묻혀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꼭 ‘받음’에 익숙하다고도 볼 수 없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안에서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까. 흔히들 넘치도록 나누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만큼 받고 싶어서라고 말을 하고 한다. 심리학적으로도 똑같은 해석을 한다.
아름다운 언어는 자신도 모르게 몽클함으로 눈물이 나는 언어다. 즉 살얼음판 같았던 마음을 한순간 녹아버리게 하는 마력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언어가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부모에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절친한 친구에게서 듣고 싶은 언어들이 있다. “사랑해.”, “네가 있어서 참 행복해.”, “너만이 유일한 행복이야.”, “네가 아니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 고마워.”, “당신은 영원한 나의 동반자에요.”, “난 네가 외로운 줄 몰랐어. 정말 미안해.” 등 마음을 울리는,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언어들은 많다.
‘직장생활’이란 단어 앞에 ‘슬기로운’ 단어를 덧붙여본다. ‘슬기로운 직장생활’이 희망고문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슬기롭다’는 어떤 일을 잘 판단하고, 잘 해결해 내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존중하면서 자신 돌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느낌까지도 전달한다. ‘슬기로운 직장생활’은 최근에 본 ‘슬기로운 의사생활’드라마에서 모방을 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 슬기로운 문화생활, 슬기로운 산촌생활, 슬기로운 외식생활 등 다양하다. 우리에게 ‘직장’이란 곳이 무엇일까? 집이나 가족과 같은 것일 수도
사람들은 자기식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해를 한다. 즉 그 사람의 일부분만을 보고 평가하고 판단하는데 급급하다. 그런 과정에서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풀거나 해소되지 않는 채로 덮어 버리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었어?”,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가 있지?”, “저렇게 잔인한 사람은 두 번 죽여도 마땅해요.” 등의 가슴 아픈 발언을 한다. 영화‘그린마일’에서 존 커피를 전기의사에 앉아서 사형당할 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을 때, 존은 “
우리는 ‘존중’이란 단어를 흔하게 자주 접한다. 그렇다보니 마치 자신이 ‘존중’을 잘 알고 실천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그러나 ‘존중’은 그렇게 쉬운 단어가 아니다.‘존중’은 ‘그 자체 그대로의 인정’이다. 그 속에는 믿음과 책임이 들어있다. 자녀가 부모를 존중하는 것도 부모로써의 역할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를 존중하는 태도는 자녀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감을 지도록 밑바탕을 만들어 주는 완충제역할을 한다.자신의 기질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한다
폭력에는 신체적 폭력, 언어적 폭력, 정신적 폭력, 그리고 비언어적 폭력, 간접적 폭력 등 다양하다. '태움'은 폭력의 일종이다. 또한 그 폭력을 묵인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떤 직장에서는 자신이 바보가 되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에서는 그렇게 있어야 한다. 생계문제라고 말하기엔 타당할 만큼의 이유가 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다. 설령 직장 내에서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타박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거칠고 억양이 쎈 말투, 그 속에는 ‘인격’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고 분이 풀릴 때까지 쏟아지는 부정의 감정들
매일 눈을 뜨면 자기 고백을 블로그에 작성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오늘은 ‘나의 부족함이구나’ 자신에게 미안함이 올라왔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맞이한다는 중요한 사실이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값지다. 오랜만에 새벽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성당엘 갔다. 신부님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반성의 마음이 밀려왔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마치면서 울컥했다. 울컥하는 이 마음 안에서 ‘나의 부족함이구나.’ 이 단어만이 맴도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는 부족함을 알았더라도 낯 뜨겁게 느낀 적은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낯 뜨거울 정도의 화끈함이 올
불안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불안이 전혀 없는 사람보다 어느 정도의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이 현실을 더 잘 대처하는 경향이 많다. ‘어느 정도’를 넘어선 과도한 불안은 질병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란 얼마만큼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각 개인이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즉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다. 불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대부분의 일상을 차지한다면 그것은 과한 불안이다.불안은 그 원인을 알 수 있다면 제거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 자신을 탐색하거나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
문득 분식집에서 혼자 라면과 공기밥을 주문해 놓고 배를 채우기 위한 밥을 먹고 있는 내가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어떤 하루를 보낼까?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간다면 나는 어떤 마음의 자세로 하루를 맞이할까? 나에게 물었다.과거에는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지를 경험하고 난 뒤로 그런 생각을 버렸다. 상대방 마음이 같을 경우에는 그것만큼 행복하고 황홀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 마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 백신 접종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경우에 백신 접종 초창기 멤버로 맞아야 했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1차는 2021년 4월에 ‘아스트라제네카’로, 2차는 7월에 ‘화이자’로 교차접종을 했다. 1차 접종을 하고 나서 5일 동안은 밤마다 앓았다. 아침에 먹은 약기운으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감기몸살처럼 끙끙 앓으면서 또 약을 복용했다. 2차 ‘화이자’를 맞고 나서는 팔의 붓기와 열감으로 5일을 고생했다. 그래도 1차 때보다는 약을 먹지 않았고 참을 만했으니 훨씬 괜찮았다. 그
신용을 나타내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성실성, 책임감, 전문성 등이다. 더 세부적으로는 약속, 여기서 ‘약속’은 시간, 숙제, 공동작업등 기간 내에 잘 해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더불어 돈을 빌리고 갚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신뢰, 그리고 소통 가운데 공감정도에 따른 신뢰가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뭔지 모를 찝찝함이 있을 경우, 그런 감정이 상당히 주관적이라 할지라도 빈번해지면 신용은 낮아진다. 즉 자신의 이야기를 주로 하되 타인의 이야기에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직감으로 느껴지는 ‘그것’이
나이 50살이 넘어서 남들 앞에서 운다는 것이 참 창피했다. 그것도 어린아이처럼 억울함 때문에 ‘이 나이에 울다니’ 머릿속이 복잡한 날이 있었다. 자신을 달래고 달랬다. “이 나이가 어때서, 억울하면 울어서라도 말을 해야지.” 여러 차례 반복하니 창피함도 없어지고 시원한 느낌까지 들었던 적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신을 위해 울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다. 힘든 게 당연하고, 아픈 게 당연한 듯 삶을 산다. 어렸을 때부터 참는 것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길들려졌다는, 익숙해졌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