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 좋지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 개가 러시아 개에게 물었답니다.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달라고. 그랬더니 러시아개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아십니까?”“글쎄요.”“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글쎄. 그들은 매우 오랫동안 쇠사슬로 나를 묶어놓았단다. 이젠 나도 내가 원할 때 짖을 수가 있게 됐단다. 하지만 그들은 내 저녁 밥그릇을 더욱 멀리 옮겨다 놓았지 뭐니 라고 말입니다. 고르바쵸프의 개혁은 스탈린 시대부터 방향이 잘못 잡힌 것을 수정한 것에 불과하지요. 본래의 혁명정신으로 복귀한다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한
그는 눈을 내리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예, 한 달에 1백 달러를 받으며 러시아 문화사를 강의했죠. 1917년 시월혁명을 중심으로 한 문화사를 강의했는데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가 무너진 뒤에는 할 일을 잃게 됐죠.”“........”“그래서 자본주의 상술을 배울 욕심에 이 길로 뛰어들었죠.”“이런 일을 하면서 어떻게?”“가장 빠른 방법이죠. 어떤 사회나 혼란기에 노다지가 굴러다니는 법이거든요. 시기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죠. 사회적 혼란기가 지나가면 급성장이란 사실 불가능하죠. 그래서 이일을 시작했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채린이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됐을 가능성이 크답니다.” “예? 북조선측에 …….”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충분히 그녀를 관찰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는 순간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때까지 얼굴에 감돌았던 연분홍빛 아지랑이가 싹 가셔버렸다. 목소리마저 파르르 떨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팽팽히 당겨져 실핏줄이 들여다보이는 뺨에서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진실로 채린의 납치 가능성을 믿고 있었으며 또 슬퍼하고 있었다. 연신 훌쩍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나를 보지 못
“우리가 파악하고 있기로는 북한 공작원이야. 묘향산이란 암호명으로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자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놈일세. 물론 추정이지만, 잔인한 놈으로 첩보 계에서는 알려진 놈이야.” 나는 천장이 노랗게 퇴색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더욱 깊이 소파에 묻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던 궁금증도 사라져 버렸다. 실타래같이 뒤엉긴 머릿속에서는 ‘공작원’이란 단어와 ‘납치’ ‘미스터 쟝’ ‘박’같은 단어들만이 나뒹굴었다. 내가 다시정신을 차리고 나 선배의 말을 또록또록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져다
“.......”“북한 측이 노골적으로 이런 공문을 보내온 것을 보면 김 선생도 이런 차원에서 납치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야.”“그렇다면 북한 측에 의해......”“면목이 없네. 그럴 가능성이 가장 많다는 것이지.”나는 긴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후두부를 둔탁한 물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몽롱한 넋이 아른거렸다. 나 선배는 내가 받은 충격을 스스로 흡수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침착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게 던진 충격이 종이위에 떨어진 물방울같이 스며든 뒤
나는 계속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세르게이에게 보복 가능성을 듣고 난 뒤부터 솔직히 나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잠자리에 들면 종종 천 길 낭떠러지를 헤매듯 침대를 기어 다니다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이곤 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신 뒤에야 잠을 청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채린을 찾아 나선 것이 도리어 그들을 자극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에 괴로워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채린을 찾아나서는 일을 도중에 그만두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것은 나약한 생각이라고 치부하기보다 채린을 사경으로 몰아넣을 수 없다는 절박한
전화를 끊었다. 빅또르 김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그 역시 빈손이었다. 원점으로 돌아갔다. 나는 주소록을 뒤져 나홋카에 있는 박 인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나홋카의 분위기도 알아볼 겸, 또 채린에 대한 소식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하지만 박 부장은 자리에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출장이 의외로 길어져 다음 주쯤에야 온다는 것이 그곳 여직원의 설명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알리에크는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유달리 큰 배가 볼품없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나는 알렉세이에게 전화를 걸
[11] 깨진 커피 잔6월24일 블라디보스토크 호텔에서 눈을 뜬 것은 낮 12시가 조금 지나서였다.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병이 텅텅거리는 소리를 내며 머릿속을 굴러 다녔다. 뒷골이 당겨왔다. 피로가 가시지 않아 몸이 무거웠다.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들이켰다. 하지만 취기가 가시지 않았다.알리에크는 그 때까지 맞은편 침대에서 코를 골며 곤하게 자고 있었다. 따냐는 보이지 않았다.나는 침대 난간에 걸터앉아 까칠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어디로 데려갔을까. 미스터 쟝은 왜 채린을 데려갔을까. 알리에크의 말
덮어두었던 낡은 신문을 들추어 보기도 했고,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책자를 들추기도 했다. 잠시만이라도 자신을 더 귀찮게 군다면 관리실의 문을 안으로 걸어 잠글 기세였다. “그렇다면 미스터 쟝의 방을 잠시만 보면 안 되겠습니까?“그것은 곤란하지. 주인이 없는 집을 어떻게 보여 주누”그는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심상찮다는 생각이 스쳤다. 쟝이 관리인을 매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10불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관리인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며 연신 나를 아래위로 훑어 봤다. 자신에게
그는 손을 떨며 주소를 쓴 뒤 손가락을 움켜쥐고 탁자에 엎드렸다.나는 주소를 집어 들고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그는 거친 숨을 토하며 탁자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 몸에서는 눅눅한 땀 냄새가 번져왔다.나는 룸 쪽으로 몸을 돌리는척하다 이내 돌아서며 권총의 손잡이로 그의 후두부를 힘껏 후려 갈겼다.그는 비명도 토하지 못하고 문어같이 그 자리에 허물어지며 탁자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선홍빛으로 물든 흰 탁자보가 함께 미끄러져 그의 얼굴을 덮었다.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루스 카야 이즈바를 나왔다. 알리에크는 벤치에 앉아있다 내가
그는 또 내가 이곳에 올 줄 알았으며 그런 사실은 이곳 조직원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라고 협박조로 말했다. 도리어 내가 조직원들에게 적발된다면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는 손톱으로 탁자를 긁으며 자신이 빠져나갈 좁은 틈을 시종 찾고 있었다. 나는 규칙적으로 탁자를 긁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내려다 봤다. 손목에 새겨진 까만 독거미 문신이 곰실거렸다.“쥐새끼 같은 놈.”순간 나는 그의 관자놀이를 겨누고 있던 권총의 손잡이 끝부분으로 사내의 왼쪽 새끼손가락 끝마디를 내리 찍었다.그러자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