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롭스크에 갔다는 따냐가 왜 여기에 있겠습니까.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닐까요?”야로슬라브는 내가 그녀를 보았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글쎄요. 일단 핑크빛 스카프를 쓴 사람을 찾아봅시다.”나는 홀 중앙 로비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때 야로스라브가 등 뒤에서 내 옷깃을 당겼다. 그는 말없이 턱 끝으로 중앙 계단을 가리켰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중앙계단에는 중년의 부인들과 노동자풍의 사내들 그리고 아이들이 한 덩어리가 된 채 계단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를 쳐다봤다.“방금 핑크빛 스카프
“별다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집사람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어서.......”나는 말꼬리를 감추었다. 그녀가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 처음 보는 나에게 기대 이상으로 친절을 베풀었고 그런 친절이 도리어 나에게 경계심을 유발시켰다.“그러세요. 김 선생님일은 정말 안됐습니다. 하지만 잘 해결될 겁니다. 저희 대학에서도 김 선생님을 찾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거든요. 특히 총장님께서 염려하고 계시기 때문에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겁니다.”그녀는 얇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꼬리를 매끄럽게 이끌어
말이 없었다.“여보세요. 여보세요?”전화가 끊겼다. 나는 그녀가 수화기를 놓쳤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계속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았다.“여보세요 따냐?”나는 수화기를 잡고 목청을 돋우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공허함만이 귓전에 맴돌았다. 전화기를 두들겨 봤지만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수화기를 침대위에 내동댕이쳤다. 허탈감이 빈 가슴 속으로 휘몰아 쳤다. 둔중한 몽둥이에 뒤통수를 있는 힘을 다해 얻어맞은 것처럼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그 때 야로슬라브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전화를 받고 호들갑을 떠는 내 모습에
“어떻게?”따냐가 박 인석을 알고 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저는 그 사람을 장 기자님이 아시기 이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할 말이 없었다.“박 인석씨를 알게 된 것은 김일성대학에 유학을 가서부터였습니다.”“뭐요? 김일성대학?”“예, 그곳에서 그를 알게 됐고 3년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곳으로 돌아왔지요. 한동안 그 사람과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가 나홋카에 나와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돌아온 뒤 1 년쯤 뒤였습니다.”“........”“그는 북조선의
나는 전화벨의 시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수화기를 들었다. 야로슬라브가 보이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나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여보세요?”“........”말이 없었다. 나는 연신 수화기 속을 향해 외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쌔근덕거리는 콧바람 소리만 전선을 타고 들려왔다. 그것은 전선에 묻어있던 전파의 찌꺼기들과 어울려 잡음을 내며 수화기에 고였다.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수화기는 들려 있었다.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여보시오. 할 말이 없으면 끊읍시다.”나는 전화를 끊을 생각에 수화기
“박 부장, 박 부장이 맞아요. 나를 만나자고 했던 그 박 부장이오.”호흡이 짧아졌다.“........”“박 부장이 확실합니다.”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나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이 사람이 박 인석 맞아?”그는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리고는 흰 휘장으로 그의 얼굴을 가렸다.오로지 무거운 침묵만이 영안실을 누르고 있었다.‘박 부장이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채린을 찾을 수 있을까. 그가 내게 한 말이 모두 거짓일까......’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병원을 나와 나 선배의 차에 올랐다. 그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사체는 알아보기도 힘들만큼 난도질되어 있었다. 얼굴 부분에만 십여 군데의 자상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피 묻은 두 팔은 동아줄에 걸린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목에는 예리한 칼날이 파고 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칼자국은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깊이 파인 채 입을 벌렸다. 그것은 흡혈귀의 입처럼 공기 중을 떠돌아다니는 영혼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나는 더 이상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 선배가 나를 끌어 당겼다.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사체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나 선배는 내게 자리를 물려주며 꼼꼼하게 살펴보라는 눈
나는 그곳이 영안실이란 것을 직감했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더욱 나를 움츠리게 한 것은 음산한 불빛이었다. 그 불빛은 죽은 자의 영혼처럼 나지막한 지하실에 헌근하게 고여 있었다. 삶과 죽음의 영혼이 뒤섞여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음산한 기분 언저리로 비어져 나온 감정이 죽은 이들의 영혼과 뒤섞여 한판 놀이판을 벌이려는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죽은 자에 대한 연민보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희열이었다. 나는 취재차 영안실에 들어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감정을 느껴왔다. 내장이 썩는 냄새를 역겹게 맡으면서도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즉시 줄 잡힌 비로드 치마 같은 커튼을 열어 젖혔다 .창밖에는 새벽바다가 짙게 깔린 운무에 눌려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운무는 솜사탕같이 감미로운 손길로 해변의 파도를 농락했다. 그럴 때마다 파도는 헐떡거리다 곧이어 미친 듯이 달아났다.이중으로 된 창문 너머로 싸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냉수로 간단히 샤워를 했다. 싸늘한 냉기가 온몸에 달라붙어 근육을 긴장시켰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시가 밤새 조여 온 한기에 후르르 몸을 떨었다.이곳은 도시 전체가 중앙난방식으로 보온이 이루어지고 있
“페레스트로이카. 좋지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 개가 러시아 개에게 물었답니다.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달라고. 그랬더니 러시아개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아십니까?”“글쎄요.”“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글쎄. 그들은 매우 오랫동안 쇠사슬로 나를 묶어놓았단다. 이젠 나도 내가 원할 때 짖을 수가 있게 됐단다. 하지만 그들은 내 저녁 밥그릇을 더욱 멀리 옮겨다 놓았지 뭐니 라고 말입니다. 고르바쵸프의 개혁은 스탈린 시대부터 방향이 잘못 잡힌 것을 수정한 것에 불과하지요. 본래의 혁명정신으로 복귀한다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한
그는 눈을 내리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예, 한 달에 1백 달러를 받으며 러시아 문화사를 강의했죠. 1917년 시월혁명을 중심으로 한 문화사를 강의했는데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가 무너진 뒤에는 할 일을 잃게 됐죠.”“........”“그래서 자본주의 상술을 배울 욕심에 이 길로 뛰어들었죠.”“이런 일을 하면서 어떻게?”“가장 빠른 방법이죠. 어떤 사회나 혼란기에 노다지가 굴러다니는 법이거든요. 시기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죠. 사회적 혼란기가 지나가면 급성장이란 사실 불가능하죠. 그래서 이일을 시작했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