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태국의 면적은 51만4,000㎢으로 남한의 약5배이고, 인구는 6,500만 명이다. 그만큼 우리보다 광활한 땅에서 살고 있는 국민의 81%가 타이족이고, 화교가 13.1%, 말레이족이 2.9%인 다민족 국가이지만, 화교들이 경제활동을 장악하고 있다. 종교는 불교가 95%이고, 나머지가 이슬람이다.태국의 옛 이름은 시암(Siam: 1856∼1939)이고. 수도 방콕은 태국어로 끄룽 텝(Krung Thep)이라 하는데, 타이어 Thai란 "자유"를 의미하고, 크룽텝은 ‘천사의 도시’라는 의미라고 한다. 태국은 19세기 유럽 제국
파타야 산호섬 1980년대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이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관광한 나라가 동남아의 태국이다. 심지어 ‘한국인 중 제주도는 가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방콕은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인기였던 태국은 최근 급격하게 떠오르는 베트남 다낭에 인기를 빼앗겼지만, 저렴한 물가와 안전한 치안에 여전히 인기가 있는 여행지이다. 태국여행을 떠난 관광객들은 방콕에서 남쪽으로 약145㎞ 떨어진 파타야(Pattaya)가 필수 관광코스인데, 파타야란 태국어로 우기의 시작을 알리는 ‘바람’이란 의미라고 한다. 파타야는 베트
베트남 호이안(2)호이안의 구시가지의 중심인 광조회관 앞은 구시가지를 편안하게 앉아서 돌아볼 수 있는 씨클로 투어 시작 장소이다. 광조회관에서 전면은 투본강이 바라보이는 큰 도로인데, 이 도로 양편에 씨클로를 가지런히 대기하고 있어서 광조회관 앞은 수많은 씨클로와 인력거꾼들로 항상 붐빈다. 햇빛 가리개가 달린 유모차와 비슷한 씨클로는 북경의 씨클로나 하노이의 전통시가지를 둘러보는 씨클로보다 더 허술하고 조잡한데, 1인용으로서 기사가 뒤에서 페달을 돌리며 구시가지 골목을 따라 한 바퀴 도는데 약20~25분가량 걸린다. 요금은 20만동
중국 후한(後漢)의 지배를 받던 베트남인들은 192년 투본강(sông Thu Bồn: 秋盆河) 하구인 후에(Hue: 順化)에 참파왕국(Champa: 192~1832)을 세웠다. 중국에서는 참파왕국을 임읍(林邑: Lin-yi)이라고 불렀으며, 참파왕국은 4세기 중엽에는 오늘날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후난 왕국(Funan: phnom, 扶南)까지 병합하는 등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16세기 중엽 신항로 개척에 나선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 상인들은 당시 동남아에서 가장 융성하던 참파왕국의 람압포(Lâ
손짜 반도의 미케 해변에서 해안선 끄트머리인 해발 693m의 산중턱에 불교사원 영응사(靈應寺)가 있다. 영응사는 베트남어로 링엄사(Ling Ying Temple)라고 하는데, 월남전이 끝난 뒤인 2003년에 건립되었다. 월남전 때 공산정권을 피해서 탈출하던 배가 난파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 시신들을 수습하던 사람들은 망인의 돈이며 금붙이 등 소지품을 모두 챙겨갔다고 한다. 그러자 밤마다 귀신이 나타나서 이들을 괴롭히자 망인들의 넋을 기리고자 이곳에 사찰을 짓게 되었다고 하는데, 건립비용은 한화로 400억 가량이라고 했다. 공
최근 베트남의 다낭(沱灢 베트남어: Đà Nẵng)이 동남아 최고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남북으로 길게 약1,650km나 되는 베트남에서 하노이 남쪽 763km, 호찌민에서 북쪽 947km 지점에 있는 도시 다낭은 192년 말레이계인 참족의 도읍지였다. 다낭은 참어(Cham語)로 ‘Da Nak’라고 부른 것이 기원인데, 그것은 "큰 강의 입구"라는 뜻이다.오늘날 다낭은 수도 하노이, 호찌민(사이공), 하이퐁 다음 인구 100만 명의 베트남 4대 도시인데, 남쪽 약30km 떨어진 호이안(會安; 파이포)과 북쪽 약108km 떨어진
하노이 바딘광장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는 1000년 이상 역대 왕조의 수도였다. BC 257년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홍방 왕조가 건국되었지만, 베트남은 BC 111년경 중국 전한(前漢)에 복속된 이래 10세기까지 간헐적인 독립운동을 제외하고 약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당은 이곳을 안남(安南)이라고 부르고, 안남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968년 딘보린(丁部領; 정보령)이 하노이에서 베트남 왕국을 수립한 후 하노이는 이조(李朝)→ 진조(陳朝)→ 여조(黎朝) 등 역대 베트남 왕조의 수도였다. 1635년 원조(阮朝; 응
해외여행 초기에는 북경을 다녀와도 중국을 다녀왔다고 하고, 파리나 로마를 다녀온 뒤에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다녀왔다고 말하지만,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3~4일 가량 서울을 방문해서 몇 군데 관광을 하고 돌아가서 한국을 여행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얼마나 좁은 편견인지 알게 된다. 그래서 가령 외국여행을 가더라도 그 나라의 도시를 여행했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인데, 요즘은 잘 알려지지 않는 시골이나 풍물을 찾아 떠나는 여행객들도 많아졌다. 베트남도 남북이 약1,650km, 동서 최대 550km, 최소 340km나 되는 330,000km²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던 우리에게 외국여행은 외교관이나 일부 상류층 자녀의 유학 등 아주 특별한 경우에 그쳤으나, 1960년대 이래 꾸준한 경제성장 결과 소득수준이 향상되면서 일반인에게 여행이 가능해졌다. 특히 정권에 대한 정통성이 빈약했던 신군부가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기 위하여 1980년 칼라 TV방송을 시작으로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를 출범시키는 등 이른바 3S정책을 폈는데, 그 일환으로 1989년부터 해외여행을 전면 자율화한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고작 동남아와 사이판, 괌 등 일본인들이 이미
이탈리아는 로마를 중심으로 해서 남부와 북부로 나누는데, 나폴리․소렌토 등 남부는 주로 농업지대이고, 피렌체, 밀라노(Milano), 피사 등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이것은 로마가 오랫동안 유럽의 정치․경제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오는 동안 북부는 유럽 각지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해서 일찍부터 교통로와 숙박업이 발달한 영향이다. 특히 로마와 밀라노 중간에 있는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로서 중세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고, 프랑스 국경과 가까운 밀라노는 상공업이 발달헤서 주민들의 생활수준에도 큰 차이가 있다. 북부지역 주민들은
산타루치아 역에서 산마르코 광장으로 가는 대운하 사이에는 리알토 다리는 1100년 경 안토니오 다 폰테가 설계로 약12,000개의 나무 말뚝을 박은 뒤 그 위에 아치형으로 지은 폭 28m 리알토 다리로서 대운하 위에 세워진 최초의 다리였다. 리알토 다리는 1854년까지도 대운하 사이의 유일한 다리로서 그 아래로 거대한 무역선들이 거뜬히 통행할 정도로 크고 웅대한데, 무역선들이 통행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교각 중심이 높이 치솟은 아치형이 특징이다. 다리는 섬 사이를 오가는 중요한 통행로이자 귀금속과 가죽제품을 파는 아케이드가 조성된 번
이탈리아에서 중세유적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Venezia)다. 그중 우리가 베니스(Venice)라고 알고 있는 베네치아는 로마, 피렌체와 달리 이탈리아 본토에서 약4㎞ 떨어진 아드리아 해(Adriatic Sea)의 리알토(Rialto) 섬을 중심으로 116개의 섬들이 409개의 다리로 옹기종기 연결하여 형성한 독특한 해상도시다.베네치아에서 수상버스나 곤돌라를 타고 베니스 운하를 한 바퀴 둘러보면, 굵은 나무 말목들을 바다위에 촘촘히 박은 그 위에 섬의 흙을 얹어서 대지를 만들고 집을 지으며 살아
시뇨리아 광장에서 우피치미술관으로 통하는 골목에는 르네상스의 단초를 열었던 불멸의 고전 신곡(神曲)을 저술한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생가가 있다. 단테 생가는 건물의 전경조차 사진촬영을 할 수 없을 만큼 비좁은 골목에 있는데, 오래 전에 없어졌던 생가를 1865년 피렌체시가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복원 후 미술작품 갤러리로 사용하다가 1965년 단테 탄신 700주년을 맞아 리모델링한 것이다. 그렇지만, 단테의 이름만 빌린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비좁은 공간의 층계를 올라가면 7개의 방에 걸
피렌체 시내를 흐르는 아르노 강(Arno River) 위에는 10개의 다리가 있지만, 그중 가장 오래된 다리가 베키오 다리(Vecchio Bridge)다. 베키오란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메디치가의 베키오 궁전과 마찬가지로 ‘가장 오래된’다리란 의미로서 아르노 강에서 강폭이 가장 좁은 이곳에는 로마시대부터 나무다리를 설치해서 시민들이 통행하도록 했으나, 홍수로 다리가 자주 유실되자 1345년 두오모 성당과 종탑을 설계했던 지오토의 제자 타데오 가디가 착공하여 1350년에 대리석으로 건설한 것이다(베키오궁전에 관하여는 2018.05.0
시뇨리아 광장에서 베키오 궁의 오른쪽으로 ㄷ귿자 모양의 4층 대리석 건물이 우피치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이다. 우피치란 피렌체에서 메디치가의 지위를 확고히 한 코지모 1세(Cosimo 1: 1519~1574)가 피렌체의 모든 행정관청과 메디치가의 은행 등을 자신의 관저인 베키오 궁전 옆에 집중배치 하도록 하는 이른바 ‘메디치 타운’을 조성한 결과 ‘밀집한 건물(offices)’이라는 라틴어이다. 코시모 1세의 우피치 구상을 실행한 건축가는 미켈란젤로의 제자이자 당시 최고의 건축가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피렌체의 중심은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이지만, 피렌체에서 가장 높고 화려한 건물은 두오모 성당(Firenze Duomo)이다. 두오모 성당은 1292년 아르놀프 캄비오의 설계로 시작 시작하여 1334년 지오토(Giotto di Bondone: 1267~1337)가 맡아서 짓다가 죽은 뒤, 프란체스코 탈렌티와 라포 기니가 완성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했던 피렌체는 도시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하여 1436년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에게 더욱
유럽은 그리스․로마의 전통에 따라서 광장문화라고 할 만큼 도시마다 광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피렌체 여행은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에서 시작한다. 시뇨리아란 본래 중세 이탈리아에서 지배권이 세습되는 독재자의 참주정치(僭主政治)를 의미하지만, 피렌체에서는 소수의 지배자들이 공동으로 통치하던 공화정부를 의미한다.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광장의 하나인 시뇨리아 광장은 일찍부터 토스카나 지방을 지배하던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 앞에 있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가장 중심은 베키오 궁전이고,
로마에서 서북쪽으로 약230㎞ 떨어진 피렌체(Firenze)는 700년 동안 피렌체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1861년 이탈리아 통일이후 1871년 로마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이탈리아의 임시수도였다. BC 59년경 실질적으로 로마 제정을 시작한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 BC 100~ BC 44)가 아르노 강변에 건설한 이곳을 플로렌티아(Florentia)라고 불렀는데, 플로렌티아는 라틴어로 “꽃”을 의미한다. 피렌체를 꽃이라고 명명한 것은 지형상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조성된 도시의 모습이 아름다운 꽃 같다고 해서 붙여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중해와 접한 나폴리(Napoli; 영어명 Naples)는 호주 시드니,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와 함께 ‘세계 3대 미항(美港)’중 하나로 꼽히는 항구로서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의 주도(州都)이자 인구 190만 명으로 이탈리아 제2의 도시이다.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190㎞ 떨어진 나폴리는 BC 10세기경 그리스인들이 지중해를 건너와 개척한 도시로서 나폴리란 지명도 그리스어로 ‘새로운 도시(Nea Polis)’라는 뜻이라고 한다.1세기 경 로마제국에 정복된 나폴리는 폼페이․소렌토․ 카프리 섬 등과 함께
지중해(Mediterranean Sea)는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의 3대륙 사이에 있는 거대한 바다다. 따뜻하고 포근한 지중해의 작은 섬 크레타에서 고대 그리스문명이 시작했고, 오랫동안 문명의 꽃을 피우던 그리스는 지중해의 대제국 로마에 바통을 넘겼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국가들은 대서양을 무대로 살다가 1505년 스페인 항해사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 1521)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해서 7년을 머물다가 귀국한 뒤 이듬해 다시 항해에 나서 태평양을 거쳐 15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