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子(유자) 曰(왈) 信近於義(신근어의)면 言可復也(언가복야)며, 恭近於禮(공근어례)면 遠恥辱也(원치욕야)며 因不失其親(인불실기친)이면 亦可宗也(역가종야)니라. - (논어•학이편) - ‘유자’가 말했다. “약속이 의(義)에 가까워야 그 말이 실천 될 수 있으며, 공손함이 예(禮)에 가까우면 부끄러움과 욕됨을 멀리 할 수 있으며, 내가 의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의 친한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잃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야 말로 평생 종주(宗主)로 받들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이니라.” 위의 글에서 공자의 제자인 ‘유
『예기』에서는 부모를 섬기는 효의 기본적인 도리로서 ‘부모가 살아 계셨을 때는 정성을 다하여 봉양해 드리고, 돌아가시면 애통하게 장례를 모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엄숙하게 제사를 받들어 모셔야 한다.’라 하였다. 이처럼 처지에 따라 효의 도리 즉 방법은 다 다르지만 근본 마음은 하나다. ‘지성’(至誠) 즉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로서 효(孝)를 곱았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는 마음 즉 ‘지성’(至誠)의 마음은 모든 행실에 통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기를
자왈(子曰) 부재(父在)에 관기지(觀其志)요. 부몰(父沒)에 관기행(觀其行)이니 삼년(三年)을 무개어부지도(無改於父之道)라야 可謂孝矣(가위효의)니라. (논어•학이편)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때는 그 뜻을 살피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살아계셨을 때의 행적을 살펴서 삼년동안 아버지의 뜻과 방법을 고침이 없다면 효(孝)라 이를만하니라.” 오경의 하나인 ‘예기’에서는 효의 도리 즉 자식으로서 부모님 섬김의 도리를 제시하였다. 즉 '부모님 생존 시에는 정성으로 봉양해 드리고,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애
子貢(자공) 曰(왈) 夫子(부자)는 溫良恭儉讓(온량공검양) 以得之) 하시니…… (논어•학이편) ‘자공’이 대답했다. 선생(공자)께서는 ‘온(溫), 량(良), 검(儉), 공(恭), 양(讓)'으로써 그것을 얻으시니…… 공자의 제자 중 십철(十哲)에 드는 ‘자공’이 스승
‘군자’(君子)란 원래 계급적 개념에 따라 공(公), 경(卿), 대부(大夫), 사(士)의 귀족 사회부류사람들을 지칭했고 귀족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 즉 서인(庶人)들은 소인(小人)이라했다. 그러나 공자는 학(學)과 덕(德)을 쌓아 인격이 높은 사람을 ‘군자’라 했고 이와 반대되는 사람을 소인(小人)이라 했다. 맹자는 군자를 대장부(大丈夫)라고도 하였다 . 그 후로는 이러한 공자의 개념을 일반적인 군자의 개념으로 하여오고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할 덕목을 다각적으로 제시하였다. 지면 관계상 그
子(자) 曰(왈) 道千乘之國(도천승지국)하되 敬事而信(경사이신)하고 節用而愛人(절용이애인)하며 使民以時(사민이시)니라. (논어•학이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나라 일을 경건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며, 나라의 씀씀이를 절약하여 백성들을 사랑하며, 백성들을 부리는 데는 반드시 때를 맞추어야 하느니라.” 2500여 년 전에 하신 위의 공자의 말씀은 당시에 군자 즉 위정자(爲政者)가 되려는 제자들에게 정치지도자의 덕성을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으로 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다
曾子(증자) 曰(왈) 吾日三省吾身(오일삼성오신)하노니. 爲人謀而不忠乎(위인모이불충호)아 與朋友交而信乎(여붕우교이신호)아 傳不習乎(전불습호)이니라. (논어•학이편) ‘증자’가 말했다. “나는 매일 세 가지에 대해서 내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벗과 사귐에 있어서 신의를 다하였는가?”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은 학문을 익히지 않은 바가 없는가?” 우리도 ‘증자’처럼 그날의 하루를 보내면서 세 가지를 반성하여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첫째. ‘내
인도(仁道)는 천도(天道)로서 인도(人道)이다. 이 말을 다시 풀이하면 인(仁)의 도리 즉 인도(仁道)는 하늘의 도리 즉 천도(天道)로서 사람이 지녀야할 도리 즉 인도(人道)인 것이다. 하늘은 모든 동물 중에서 유독 인간에게만 선본성(善本性) 즉 착한 본성을 부여하였다. 호랑이나 새 같은 짐승에게는 식욕, 번식욕 같은 본능만 주었지 착한 본성이나 선, 악을 분별하는 능력은 주지 않았다. 이처럼 하늘이 인간에게만 내려준 선본성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인(仁)이라고 하는 것이 공자의 인(仁)의 사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如切如磋(여절여차) 如琢如磨(여탁여마)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간 듯’ 위의 글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한 구절로서 ‘깍은 것처럼, 쏙 빠진 것처럼’ 쪼아낸 것처럼, 빤질빤질 갈아낸 것처럼 아주 잘생긴 꽃미남의 모습을 형용하는 뜻의 글이다. 논어 ‘학이편’에 보면 이 구절을 가지고 공자의 제자인『자공』이 스승인 공자와 담론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공자의 제자인『자공』은 이시의 구절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즉 시 전체내용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기 나름대로 뜻을 취하여 학문과 수양을 이루어
博學之(박학지)하며 審問之(심문지)하며 愼思之(신사지)하며 明辨之(명변지)하며 篤行之(독행지)니라.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며, 명백히 분별하고, 독실하게 행해야 하느니라. - ( 중 용 ) - 위의 글은『중용』에 나오는 글로서 사람은 누구나 하늘의 도(道)를 따르고 행하며 살아야 한다.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성인이라면 태어나면서 하늘의 도를 알고 태어났기 때문에 따로 배우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온갖 욕심으로 인하여 하늘의 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정성을 다해 하늘의
孔子(공자) 曰(왈) 生而知之者(생이지지자)는 上也(상야)요. 學而知之者(학이지지자)는 次也(차야)요. 困而學之又其次也(곤이학지우기차야)니 困而不學(곤이불학)이면 民斯爲下矣(민사위하의)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면서 스스로 아는 자는 최상의 인간이요.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의 인간이고. 막히면 애써 배우는 자는 그 다음의 인간이다. 그러나 막히면서도 배우지 않는 자는 인간으로서 최하의 인간이 된다." (논어 • 계씨편) 독자께서는 이중에서 어떤 급에 속하는 인간일까 스스로를 평해 보시기 바
子(자) 曰(왈)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니 不亦說乎(불역열호)아 有朋(유붕)이 自遠方來(자원방래)면 不亦樂乎(불역락호)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제때에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함께 배우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학이편) 위의 글은 논어에 나오는 첫 구절로서 논어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본 구절일 것이다. 공자께서 하신 위의 말씀의 뜻을 헤아려 보면, ‘학문을 통해서 얻는 깨달음의 기쁨이 가장 크며, 또한 학우들과 함께 나누는 학문의 즐거움이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일흔 살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해도 그것이 세상의 법도를 넘지 않았다. (논어•위정편) 공자께서는 73세의 생애를 마감하기 이전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술회 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學 : 지학), 서른에 학문을 터득하여 세상에 대한
有子(유자) 曰(왈) 君子(군자)는 務本(무본)이니 本立而道生(본립이도생)하나니 (중략) ‘유자’가 말했다. “군자는 근본에 힘써야 되는 것이니 근본이 확립되면 도(道)가 생겨나니라" (중략) -논어 (학이편) - 이 말은 공자와 제일 많이 닮았다는 ‘유자’ 즉 ‘유약’이 한 말로서 ‘군자는 삶의 근본' 즉 도리를 깨우치고 행하는데 힘써야 한다. 삶의 근본 즉 '도리가 확립되면 자연히 삶의 방법이 생길 것이다.’라는 뜻이다. ‘근본’이라는 뜻의 본(本)자는 나무의 뿌리를 가리키는 글자이다. 나무에서 뿌
子貢(자공) 曰(왈) 貧而無諂(빈이무첨)하며 富而無驕何如(부이무교하여)하니잇고, 子(자) 曰(왈) 可也(가야)나 未若貧而樂(미약빈이락)하며 富而好禮者也(부이호례자야)니라. 『자공』은 말했다. “가난하지만 비굴하게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괜찮지.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子(자) 謂(위) 子貢(자공) 曰(왈) 女與回也(여여회야)로 孰愈(숙유)오 對曰(대왈) 賜也(사야)는 何敢望回(하감망회)리이꼬 回也(회야)는 聞一以知十(문일이지십)하고 賜也(사야)는 聞一以知二(문일이지이)하노이다. 子(자) 曰(왈), 弗如也(불여야)니라. 吾與女(오여여)의 弗如也(불여야)하니라.『공자』께서『자공』에게 일러 말씀하셨다.?너와『안회』누가 더 나으냐?“『자공』이 대답하였다.?제가 어찌 감히『안회』를 넘나보겠습니까?『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뿐이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
子(자) 曰(왈) 德不孤(덕불고)라 必有隣(필유린)이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은 외롭지 아니하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니라.’ (논어 • 이인편) 덕(德)이란 따뜻한 양지와 같다. 이러한 양지에는 많은 초목들이 숲을 이루며 잘 자란다. 또한 무성한 숲에는 새와 짐승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음지에는 초목들이 잘 자라지 못하고 새와 짐승들도 모여들지 않는다. 덕은 따스하므로 초목과 새와 짐승을 끌어들이고 자라게 하는 양지와 같다. 그러므로 덕이 있는 사람은 따스함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子(자) 曰(왈) 君子(군자)는 欲訥於言而敏於行(욕눌어언이민어행)이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려고 해야하 느니라.” (논어 이인편) 위의 공자의 말씀을 줄여서 말하면 ‘訥言敏行’(눌언민행) 즉 ‘말은 어눌하게 행함은 빠르게’라는 뜻이다. 우선 공자께서는 말을
子(자) 曰(왈) 見賢思齊言(견현사제언)하며 見不賢而內自省也(견불현이내자성야)니라.(논어 • 이인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진사람을 보면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으로 내 자신을 반성하여 보아라.” 이 세상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어제에 머물러 있지 않고 ‘탕왕’의 좌우명처럼 자기 자신을 날로 날로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자기 발전을 위하고 날로 새롭게 하기 위해서 공자께서는 ‘見賢思齊’(견
子(자) 曰(왈) ‘君子(군자)는 不器(불기)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그릇 같은 존재가 아니니라.’ ‘군자는 그릇 같은 존재로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君子(군자)란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지도자급 지식인을 말한다. 기(器)는 그릇이나 기물을 말하며 여기에서는 오직 한 가지 기능이나 기예를 뜻한다. 君子不器(군자불기)의 뜻은 ‘군자 즉 덕치(德治)에 참여하는 지도자급 지식인은 학덕을 쌓는 목적'이 '기(器)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즉 '밥그릇이나 국그릇, 간장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