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린아!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됐나 봐. 그토록 사랑하고 그렇게 그리워했던 당신인데. 이제 여기서 헤어져야 하나 봐.채린아. 당신을 고향동산에 포근히 잠들게 할까도 생각했어. 또 아들과 함께 손잡고 셋이서 오르던 계룡산 자락에 뿌려줄까도 생각했어. 산새들과 산토끼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제비꽃의 향기를 맡으며 눈감을 수 있도록 할까도 생각했어.하지만 당신이 꿈에도 그리던 대지. 그 하늘아래 당신을 뿌리기로 했어. 못다 이룬 푸른 꿈을 저 생에서라도 이루도록 말이야. 채린아. 오늘 당신을 놓아주는 것은 내게서 멀리하자는
심호흡을 여러 번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작은 칸에 서명을 했다.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걸이가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점이 나를 얽어매고 있었다. 나는 최면에 이끌린 사람처럼 멍청하게 그의 의도에 따랐다. 이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기 위해 팔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빅또르 김이 내 팔목을 굳게 잡고 강한 힘으로 권총을 낚아챘다.“말리지 마세오.”“안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신을 차려야지요.”“괴롭습니다. 돌려주세요. 제발…….”나는 애원했지만 그는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경찰이 보기 전에 권총을 잽싸게 자신의
박 인석의 부검모습이 떠올랐다. 목주위에 0.5센티미터의 색흔 소견이 보인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동일했다. 또 목 졸려 살해되고 난 다음 난자된 것도 같았다. 동일범의 소행이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검안의는 내게 볼펜을 넘겨주며 손가락으로 빈칸을 가리켰다. 사체가 채린이라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주문이었다.그들은 장기 미재사건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과 한국인 실종사건에 더 이상 매달릴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의도적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검안서는 사체가 채린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명시하고 있었다. 검안
빅또르 김은 나를 힘껏 부둥켜안고 놓아 주려질 않았다. 숨이 턱턱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채린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되뇌었다.빅또르 김이 나를 붙잡고 있는 동안 경찰과 영사관 직원 그리고 야로슬라브, 검안의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풀숲을 헤치며 도로에서 30미터쯤 떨어진 구렁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은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들리지 않는 소리로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 중 한 사내는 나뭇가지를 꺾어 풀섶을 툭툭 치며 구
스푸트니크 농장지대는 그렇게 비포장도로를 따라 1시간가량 들어간 뒤에야 낡은 따차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울창한 숲과 훤하게 뚫린 잡초 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콘크리트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허물다만 붉은 벽돌집과 잔잔한 들풀들이 뒤엉켜 음산한 기분을 연출 했다.야로슬라브가 차를 멈춘 곳은 포플러와 자작나무가 우거진 농장지대의 가장자리였다. 길옆으로 낡은 시골 초등학교 교실 같은 목조건물이 두어 채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나무기둥을 다릿발 삼아 길게 누워 있었다. 콜타르가 발린 벽체에 앙증맞게 붙은 흰색 창틀이 돋
[15] 토막난 변사체6월 29일 새벽에 호텔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시계가 새벽 5시를 가리킬 때였다. 채린의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겨우 눈을 붙였을 때쯤이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전날 저녁을 같이했던 빅또르 김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다급했다.“장 기자님. 지금 당장 스푸트니크 농장지대로 나와야겠습니다. 그리로 가는 길이 외길이니까 나도 지금 그곳으로 가겠습니다.”“밑도 끝도 없이 스푸트니크 농장지대라니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불길한 예감이 가시처럼 다가섰다.“그것은 묻지 마시고 알렉세이가
“북한에 친중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음모가 숨어있다는 얘기야. 북한 내부의 권력체계가 붕괴되면 소란스런 틈을 이용하여 국경선에 배치된 병력을 대거 북한 내부에 침투시킬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어.”“그래서요?”“물론 대외적으로는 북한 고위층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형식을 빌겠지. 그렇지 않다면 구호조건을 내세우거나. 아무튼 중국은 북한 내부에 들어가 권력 핵심부를 장악하고 자연스럽게 친중 정부를 수립한다는 계산이지.”“북한 내부의 반항이 있다면?”“그러면 기존의 권력 핵심을 제거하고 북한 내 친중세력인 연안파를 옹립할 수도 있다는 얘
“박을 제거하면 학교란 공허한 공작 조직명만 남게 되고 극비무기는 북한으로 유입되지. 미 CIA가 김 선생 실종시기와 때를 같이해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야.”“알렉세이는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다지 군사 무기 판매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그는 단순한 마피아의 보스가 아니야. 그가 군사지식이 풍부하고 정보 분석력이 남다른 것은 극동군을 뗄 수 없는 관계로 엮고 있어. 그러면서도 그는 CIA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네. 우리와도 무기거래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야
“저 녀석은 훈련도중 다리를 다쳐 절룩거립니다만 모두들 러시아가 자랑하는 특수부대 출신들이랍니다. 정예의 용사들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저주의 사자들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대단한 친구들입니다. 맨 손으로도 사람의 내장을 도려낼 정도로 훈련을 받은 아이들이지요. 작은 칼 하나만 쥐어 주면 사람을 형체도 없이 산산이 부수어 버리는 괴력의 사내들이지요. 저들이 이 별장을 경호하고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요. 저들이 내 주변에 있는 이상 나는 건제할 겁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조용 말을 뇌까렸다.나는 속으로 ‘러시아 특수부
“그런데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무기라니요?”그는 말을 멈추고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본의 아니게 너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렇다면 핵?”“.........”하지만 나는 여기서 말꼬리를 놓칠 수가 없었다.“핵무기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깁니까?”그는 딸기주스로 목을 축이며 말이 없었다.“아니면 핵 원료. 플루토늄 같은?”그는 봉합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더 이상 깊은 얘기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달라는 눈치였다.“제 아내의 실종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정확히는 알
“러시아가 현재 처해있는 경제난을 극복하고, 군사무기와 일반생필품 생산을 복합적으로 이루고 있는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기를 보다 많이 팔아야 할 형편이지요. 창피스러운 일이지만 러시아는 지금 배를 곯고 있답니다. 얼마 전에는 태평양 함대 소속 수병들이 집단으로 쓰러졌는데 그 원인이 웃지 못 할 얘기지만 영양실조였답니다. 대폭적인 예산삭감 때문이지요.”나 선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극동함대의 주함정으로 활동했던 민스크 항공모함이 한국에 고철로 팔려가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할 일이지요.”나 역시 어느새 그의 주장
알렉세이의 말이 또 한 차례 좌중의 분위기를 압도한 것은 무기판매에 대한 얘기가 비화같이 쏟아져 나왔을 때였다. “소련붕괴이후 러시아 경제가 공황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은 군수산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체제에서 무기를 양산했고 생산된 무기를 현물 결재방식이나 혹은 무상으로 종주국 위치에서 동맹국들에게 지원했었지요. 대신에 동맹국들로부터는 생활필수품을 받아 왔지요.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연방체제가 무너지면서 이런 거래방식이 사라지게 됐습니다. 따라서 러시아는 동맹국들에게 현물로 결재하던 무기를 이제 세계 각국
알렉세이는 구소련체제를 동경하지도 그렇다고 오늘의 러시아를 바람직한 국가상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는 그 나름의 이상 국가상을 수립한 사람처럼 오늘의 러시아를 예리하게 진단했다.“2차 대전 후 상당기간 소련은 구미 선진국들을 능가하는 경제적인 성장으로 체제안정과 국력신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획 경제체제는 곧이어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지요. 첨단 산업사회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고삐를 놓쳐 전반적인 침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역시 이런 국면을 만드는데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
[14] 농장에서6월28일 알렉세이가 우리를 초청한 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별장 인근의 농장이었다. 그곳에서는 가까이 작은 호수가 보였고 주변에 자작나무와 포플러, 버드나무가 흐드러지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알렉세이는 이른 아침부터 관리인을 시켜 길게 자란 잔디를 말끔히 정리해 두었다. 잔디밭 한가운데는 새하얀 탁자보가 뒤덮인 식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갓 구어 기름을 뺀 통닭과 소금을 뿌려 구운 돼지고기, 약간의 빵, 그리고 간장에 절인 달걀이 법랑식기에 담겨있었다. 그 옆으로 훈제 연어구이와 철갑상어 알, 새우조림, 사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급히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따냐는 아무데도 없었다. 낮선 중년 부인만이 다른 방문 앞에 서서 열쇠를 찾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곳에서 따냐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낡은 계단을 내려섰다. 벌써 밖에는 어둠이 조용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루의 긴 여로에 지친 햇살이 땅거미와 함께 대지에 둥지를 틀었다. 어둠의 싹들이 구석구석에서 돋아나고 있었다. 늙은 나무의 난마와 같이 얽힌 뿌리들이 흙 속으로 파고들듯이 어둠은 그렇게 뿌리를 낯선 땅에 내리고
내가 복도를 말없이 거닐고 있을 때 따냐의 집과 인접한 곳의 문이 열렸다. 그 속에서는 앞가슴이 풍만한 여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내다 봤다. 헝클어진 머리와 윤기 없는 피부, 싸구려 화장품 색깔이 배인 얼굴이 성큼 눈앞에 다가섰다.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마치 누군가가 화약을 문지른 듯 까만 점들이 흩뿌려져 있었다.“따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없군요.”“실례지만 누구신데요?”“따냐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며칠간 못 봐서......”“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여기 다녀가신 분이군요.”그녀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하바롭스크에 갔다는 따냐가 왜 여기에 있겠습니까.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닐까요?”야로슬라브는 내가 그녀를 보았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글쎄요. 일단 핑크빛 스카프를 쓴 사람을 찾아봅시다.”나는 홀 중앙 로비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때 야로스라브가 등 뒤에서 내 옷깃을 당겼다. 그는 말없이 턱 끝으로 중앙 계단을 가리켰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중앙계단에는 중년의 부인들과 노동자풍의 사내들 그리고 아이들이 한 덩어리가 된 채 계단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를 쳐다봤다.“방금 핑크빛 스카프
“별다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집사람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어서.......”나는 말꼬리를 감추었다. 그녀가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 처음 보는 나에게 기대 이상으로 친절을 베풀었고 그런 친절이 도리어 나에게 경계심을 유발시켰다.“그러세요. 김 선생님일은 정말 안됐습니다. 하지만 잘 해결될 겁니다. 저희 대학에서도 김 선생님을 찾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거든요. 특히 총장님께서 염려하고 계시기 때문에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겁니다.”그녀는 얇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꼬리를 매끄럽게 이끌어
“따냐가 어디에 있다고요?”“모릅니다. 전화가 도중에 끊겼어요. 그녀를 직접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도와주세요.”“어떻게 ?”“글쎄요. 아무튼 도와주세요. 극동대 교수. 따냐. 나이 29세. 알 만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라도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봐 주세요. 나는 형님만 믿을게요.”나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야로슬라브를 앞세우고 곧장 극동대로 향했다. 극동대는 도심을 가로지른 언덕 위에 삐죽이 돋아나 있었다. 1백년의 세월을 버티어온 대학답지 않게 모든 건물들이 현대식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적갈색이나 백색의 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