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막 안은 보잘것없는 작은 공간을 가운데 두고 나무판자와 얇은 거적, 그리고 풀 무더기 등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폐 따차가 확실했다. 한 평 남짓한 가운데 공간에는 희미한 기름불이 시커먼 꼬리를 날리며 까무락 거렸고 그럴 때마다 우리의 그림자가 괴물같이 일렁거렸다. 가재도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한 모퉁이에 일그러진 양은솥과 약간의 깡통, 그리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흉한 몰골로 버티고 앉은 양동이가 고작이었다. 옷을 걸어 둘 만한 곳도 또 이부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흉하게 내려앉은 각목들과 하늘이 간간이 올려다 보이는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은 일행이 산 능선에 다다를 즈음에야 겨우 약간씩 벗겨지며 구름 속에 숨어 있던 희미한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새어들었다. 내가 그들을 따라 40분 정도를 올랐을 때 내리막길이 나타나며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들이 머리위로 쏟아졌다. 어린 시절 들마루에 누워 올려다보았던 그 하늘이었다.“아직 많이 가야 합니까?”나는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다왔시요, 힘드시디요. 그럴 거야요. 우리도 한 번씩 오르내리기가 수월치 않으니 끼니.”앞서가던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른
“말끝마다 위대한 영도자를 찾던 그가 북조선 체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그곳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북조선 체제가 폐쇄성을 벗어나지 않는 한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그가 짧은 시간에 그렇게 변한 이유가 뭘까요?”“사실 짧은 시간에 변한 것은 아닙니다. 오랜 기간 이곳 생활을 통해 변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겁니다. 갑자기 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송환을 앞뒀기 때문일 겁니다.”“송환?”“그는
나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 오후 3시가 지난 시각에야 몸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물론 영사관 직원에게 제시간에 출국이 어렵다는 말을 전했다. 다녀와야 할 곳이 있다고만 했다.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된다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녀는 수차 내게 빨리 움직여 줄 것을 주문했다. 결국 따냐가 자신을 인질로 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권총을 다시 챙긴 뒤 따냐를 따라 나섰다. 따냐가 나를 데려간 곳은 호텔에서 5시간 이상 떨어진 숲속의 어둠이었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승용차의 헤드라이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만날 사람도 또 만날 이유도 없었다. 도리어 이런 말을 내뱉고 있는 따냐가 말없이 이 방을 나가 주었으면 차라리 좋을 성싶었다.“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끝나지 않았다니요. 채린이 떠나갔는데 아직 무엇이 더 남았다는 말입니까? 내게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순간적으로 목이 잠겼다.“돌아가세요. 더 이상 할 말도 없습니다. 당신과는 …….”나는 의자에 더욱 깊이 몸을 묻고 눈을 내리 깔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장 기자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시기 힘들겠지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게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 선배가 왔거나 아침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야로슬라브가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똑” “똑” “똑”나는 귀찮았지만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그곳에는 뜻 밖에도 따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는 순간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보랏빛 스카프를 쓰고 미색 버버리 코트를 정갈하게 걸쳤으며 허리는 잘록하게 묶고 있었다. 얼굴은 고된 노동의 끝만큼이나 수척했다. 세상살이를 포기한 사람처럼
[16] 탈북자6월 30일 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파라다이스 호텔 앞에 잔디공원의 흰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잿빛 날씨가 을씨년스러워 옷깃을 세웠다.바다에서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이 멍든 하늘을 산산조각 낸 뒤 땅위에 흩뿌렸다. 그럴 때 마다 잔디공원을 뒤덮고 있던 무성한 풀들이 몸서리치며 짠바람을 피하느라 아우성을 질렀다.이제 지구의 모든 생명이 종말을 고하고 태양은 사라져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제4세계를 기획한 신이 온통 지구의 모든 것을 자신의 마지막 정열로 불살라 버린 뒤 다시는 이 땅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지 않
‘채린아!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됐나 봐. 그토록 사랑하고 그렇게 그리워했던 당신인데. 이제 여기서 헤어져야 하나 봐.채린아. 당신을 고향동산에 포근히 잠들게 할까도 생각했어. 또 아들과 함께 손잡고 셋이서 오르던 계룡산 자락에 뿌려줄까도 생각했어. 산새들과 산토끼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제비꽃의 향기를 맡으며 눈감을 수 있도록 할까도 생각했어.하지만 당신이 꿈에도 그리던 대지. 그 하늘아래 당신을 뿌리기로 했어. 못다 이룬 푸른 꿈을 저 생에서라도 이루도록 말이야. 채린아. 오늘 당신을 놓아주는 것은 내게서 멀리하자는
심호흡을 여러 번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작은 칸에 서명을 했다.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걸이가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점이 나를 얽어매고 있었다. 나는 최면에 이끌린 사람처럼 멍청하게 그의 의도에 따랐다. 이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기 위해 팔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빅또르 김이 내 팔목을 굳게 잡고 강한 힘으로 권총을 낚아챘다.“말리지 마세오.”“안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신을 차려야지요.”“괴롭습니다. 돌려주세요. 제발…….”나는 애원했지만 그는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경찰이 보기 전에 권총을 잽싸게 자신의
박 인석의 부검모습이 떠올랐다. 목주위에 0.5센티미터의 색흔 소견이 보인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동일했다. 또 목 졸려 살해되고 난 다음 난자된 것도 같았다. 동일범의 소행이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검안의는 내게 볼펜을 넘겨주며 손가락으로 빈칸을 가리켰다. 사체가 채린이라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주문이었다.그들은 장기 미재사건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과 한국인 실종사건에 더 이상 매달릴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의도적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검안서는 사체가 채린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명시하고 있었다. 검안
빅또르 김은 나를 힘껏 부둥켜안고 놓아 주려질 않았다. 숨이 턱턱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채린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되뇌었다.빅또르 김이 나를 붙잡고 있는 동안 경찰과 영사관 직원 그리고 야로슬라브, 검안의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풀숲을 헤치며 도로에서 30미터쯤 떨어진 구렁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은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들리지 않는 소리로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 중 한 사내는 나뭇가지를 꺾어 풀섶을 툭툭 치며 구
스푸트니크 농장지대는 그렇게 비포장도로를 따라 1시간가량 들어간 뒤에야 낡은 따차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울창한 숲과 훤하게 뚫린 잡초 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콘크리트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허물다만 붉은 벽돌집과 잔잔한 들풀들이 뒤엉켜 음산한 기분을 연출 했다.야로슬라브가 차를 멈춘 곳은 포플러와 자작나무가 우거진 농장지대의 가장자리였다. 길옆으로 낡은 시골 초등학교 교실 같은 목조건물이 두어 채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나무기둥을 다릿발 삼아 길게 누워 있었다. 콜타르가 발린 벽체에 앙증맞게 붙은 흰색 창틀이 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