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와 영정을 맞은 장양왕 자초의 심정은 유달랐다. 조희를 보는 순간 그녀가 조나라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밤을 보냈던 그 여인인지를 의심했다. 벌써 9년의 세월이 흘렀으므로 눈가에는 잔주름이 고였고 피부는 집나온 고양이처럼 까칠하게 변해있었다. 곱디곱던 손도 옛 같지 않았다. 그동안의 고초를 돌이켜보면 가슴이 아려왔지만 여인으로 그녀를 접하자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자초는 조금은 실망한 눈빛으로 조희를 맞았다. 하지만 그녀를 맞지 않았다면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란 점에서 감사할 뿐이었다.아홉 살이 된 영정은 기대보다 튼
당연히 태자 자초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가 장양왕이었다.자초가 왕위에 오르자 후사를 위해 왕후를 맞아야 한다는 중신들의 진언이 이어졌다. 왕후는 당연히 진나라 명문대가의 규수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심지어 일부 중신들은 서로 자신들의 집안 규수를 내세우려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자초는 단호했다. 자신이 그토록 그리던 왕위에 올랐으니 여불위와의 약속을 이행해야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과인이 오늘에 이러러 선왕들의 빛나신 업적을 이어받아 왕위에 올랐소이다. 그러므로 그에 걸맞은 왕후를 맞아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이다. 그
하지만 답답한 것은 진나라에 들어간 여불위도 마찬가지였다. 자초는 태자 신분이었으므로 매일같이 궁녀들을 접하고 있었다. 조나라에 부인과 아들을 두고 온 사실조차 망각하고 그들과 화려한 밤을 보내기 일쑤였다. 게다가 궁녀들과의 사이에서 또 다른 자식이 태어남에 따라 영정과 아내 조희는 여불위가 일깨울 때만 그리워 할뿐 평상시에는 잊고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욱이 조희를 태자비로 옹립해야 한다는 여불위의 주장도 걸림돌이 많았다. 자신의 애첩이었다는 것을 알 사람들은 알고 있는 마당에 그녀를 태자비로 삼는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조희는 한편으로 장래에 자신이 진나라의 태자비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슴에 문신처럼 새기고 또 새겼다. 여불위의 약속을 믿고 있었으며 남편인 자초가 분명히 태자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 확신이 현실이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그렇게 보낸 세월이 칠년이었다. 그동안 아들 조정은 잘 자라 씩씩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제법 어엿한 모습이 누가보다 탐이 날 정도였다. 게다가 시국도 변하여 옛 같지 않았다. 진나라에 대한 적대감도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조금은 살만했다. 다만 질긴 기다림이 고단할
조희는 손으로 떨고 있던 아이의 귓불을 만지며 부드럽게 위로하고 있었다. 아이의 가슴이 불을 지른 듯 콩닥거렸다. 하지만 그 아이도 열댓 살이 된지라 알만큼은 아는 처지였다. 다만 경험이 미천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얘야. 요즈음 삭신이 쑤셔 밤잠을 제대로 못 자느니라. 오늘 밤만이라도 네가 주물러다오.” 그제야 사내아이가 숨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조희는 미리 마련한 자리에 반듯하게 누워 사내아이의 손길을 기다렸다. 사내아이는 조희의 몸으로 다가 앉으며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얇은 천으로 알몸을 겨우 숨긴
그러던 어느 봄날이었다. 완연한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와 수를 놓고 있던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몸이 스멀거려 방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희는 양지바른 뜰로 나와 새싹이 돋은 마당을 오가며 상춘을 즐겼다. 물오른 나뭇가지 마다 파릇한 기운이 하루가 다르게 감돌았다. 때로 새들이 날아와 그런 조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랑을 나누다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조희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 달리 뒤틀리고 휘돌았다. 잠시도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살을 꼬집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어 힘껏 조여
한편 남편 자초와 여불위가 진나라로 떠나자 조희는 어린 영정을 데리고 급히 몸을 피했다. 그들 역시 조왕이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보냈으므로 산속으로 피신하는 몸이 되었다. 물론 여불위가 피신처를 사전에 만들어 놓았던 탓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촌각을 다투는 긴장감 속에 도피행각을 벌였다. 그곳에서 조희는 아들 영정의 이름을 자신의 성을 따서 조정이라고 바꾸었다. 자초의 성을 사용할 경우 아들에게 화가 미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조희는 그렇게 몸을 숨기고 살다 세상이 잠잠해지자 자신의 친정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시
날이 밝기가 무섭게 조괄은 굳데 닫혔던 성문을 활짝 열었다. 곧이어 진격 고동소리가 들렸고 말을 탄 장수들이 손을 놓고 있던 성 밖 진나라 진영으로 내달렸다. 조나라 병사들도 사기가 충천한 모습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아직 잠이 들깬 적병들의 목을 베며 앞으로 나아갔다.조괄의 말대로 전승은 그들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조나라 병사들이 진격해 나가자 진나라 병사들은 퇴각하기 일쑤였다. 여기 저기서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3년 동안 두려움에 떨었던 진나라 병사들의 실체가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의구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소문은 말을 달리듯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런 소문을 들은 조나라 대신들은 무릎을 쳤다. 그렇지 않아도 효성왕이 조염파를 유달리 신임하는데 시기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대신들은 입을 모아 조괄을 전장에 내보내도록 적극 추천했다. “저자 거리에 이런 소문이 나돌고 있음은 백성들의 뜻이 그렇다는 것이옵나이다. 따라서 조염파를 물리시고 조괄을 전장에 보내심이 가할 줄 아뢰옵나이다.”신하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조괄 역시 대신들의 주장에 동의했다.“대왕마마. 소신을 전장에 보내만 주신다면 단참에 진나라 장수 백기의
그해 정월이었다. 서북고원을 휩쓸고 내달린 거친 바람이 한단을 뒤덮었다. 며칠 동안 광풍이 몰아치고 하늘에서 마른 낙뢰가 떨어졌다. 좀처럼 겨울에 벼락이 떨어지는 일이 없었으므로 조나라의 수도 한단 사람들은 무슨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큰 전란이 있거나 혹은 국가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이라고 주절거렸다. 민심이 풀 끓듯 들끓었다. 하지만 며칠 밤 며칠 새벽을 뒤흔든 벼락과 광풍은 자초의 집에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멎었다. 자초는 튼실하게 생긴 사내아이를 품에 안고 크게 기뻐했다. 툭
“그렇게는 아니 되오. 팔자가 내버려 두질 않는구려. 그대는 진나라의 태자비가 되고 장차 왕후가 될 몸이오. 내 그리 되도록 만들겠다지 않았소. 그러니 내 말만 듣도록 하시오. 그리고 오늘 받은 씨앗은 소중히 간직토록 하시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일은 죽는 그날까지 그대와 나만 아는 일이오. 누구도 알아서는 아니 되는 일이요. 알겠소?” 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훌쩍거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장차 진나라의 태자비가 되고 왕후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는 기대감이 실렸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를 의심하면서도 다른 한편 고대하는
주안상이 문밖에 와 있다는 하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태산이 무너질 만큼 힘차게 칼질을 했다. 한차례 태풍이 지나가면 얼마지 않아 또 다른 태풍이 몰려왔다. 주안상을 받아 놓고 목이 타면 술로 그것을 적셨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차례. 영문을 모르는 애첩 조희는 연신 암고양이 울음을 토하며 사내의 가슴에 매달렸다. 태풍에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온몸이 녹아내리고 그것도 모자라 어느 순간에는 용로에 들어간 것처럼 아무것도 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녀를 기다리는 여불위는 안달이 나있었다. 계략은 맞아 들고 있었지만 자신의 애첩을 자초에게 내준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다고 양쪽을 다 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왕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것에는 이론이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애첩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큰 재화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었다. ‘더 큰 일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여불위는 속으로 다짐하며 타오르는 아쉬움을 삭였다.조희가 젖은 머리를 닦으며 침실로 들어오자 여불위는 목마름에 지친 사내처럼 곧바로 그녀를 안고 이
여불위는 그길로 애첩 조희의 집을 찾았다. 벌써 어둠이 포근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은 조희가 화사한 눈웃음을 치며 여불위를 방으로 맞았다. 그녀는 천하의 절색이었다. 자신이 거상으로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가는 곳마다 애첩을 두고 있지만 조희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마음이 가장 많이 가는 것도 조희였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어디하나 나무랄 곳이 없었다. 좁은 어깨선을 따라 아래로 흐르는 선과 잘록한 허리, 가는 팔, 매끄러운 피부, 화사한 웃음. 눈을 감아도 선연하게 만져지는 것이 그녀의 모
여불위는 잠시 생각에 젖었다. 누굴 의미하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과 동행한 계집들을 돌이켜 보았다.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혹시?”여불위가 자초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물었다.“그렇소이다.”자초는 대뜸 대답했다. 여불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문치적거리다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애첩 조희였다. 조희는 조나라의 귀족출신으로 노래와 춤을 잘하였으므로 가장 아끼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어떤 첩들과 달리 매일같이 그녀의 품속에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애첩을 달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자초는 크게 술상을 마련토록 하고 여불위와 마주앉아 밤이 늦도록 술을 마셨다. 취기가 넉넉하게 감돌았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이제 태자비마마를 친어머니로 모시게 되었으니 다음 역시 대인의 몫이외다.”“그럼요. 여부가 있겠소이까. 소인이 왕손 나리를 태자에 책봉되도록 하겠나이다. 특별히 태자비마마께 그 일을 부탁드려 놓았사옵니다.” “흐흐 벌써 그렇게 까지 해두셨단 말이지요. 그럼 태자비마마께 인사를 올려야 겠소이다.”“제가 진나라로 돌아가는 즉시 문안을 올리겠소이다. 그리고 왕손 나으리의
허파꽈리가 활짝 열릴 때까지 힘차게 걸음을 내질렀다. 산은 가파르고 험했으므로 여느 날과 달랐다. 부인은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고지를 향해 노를 휘저었다. 온몸에 있는 땀구멍이 일시에 열리는 듯 열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몇 천도의 용광로가 쏟아진 느낌이었다. 온몸이 녹아 내렸다. 심장은 물론이고 머리카락 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녹아내린 감이었다. 그제야 속이 시원했다.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던 가슴이 일순간에 뚫리는 기분이었다. 답답하게 둘러쳐져 있던 휘장이 거친 바람을 받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대군도 겨우 살아온
“잠시만 기다리옵소서.” 그제야 화양부인은 돌아 앉아 자신의 천의 같은 저고리를 허공에 벗어 던졌다. 이어 몸을 가리고 있던 새하얀 명주치마도 걷어내고 다소곳이 돌아앉았다. 양손으로 가슴을 가친 채였다. “소첩 부끄럽사옵니다. 다른 곳을 보시옵소서.”안국군은 그런 화양부인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고개를 돌리고 황촛불에 흔들리는 방문을 너머다 보았다.화양부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얇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참으로 맑은 속살이 달빛에 빛났다. 안국군은 그녀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기까지의 기다림이 여삼추 같았
“대군께서 양자를 삼아주시겠나이까?”“그럼요. 부인께서 기뻐하신다면 내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그럼 소첩이 원하는 왕손을 양자로 삼아주신다는 말씀이옵니까?”“그렇다마다요. 그 일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누구라도 눈여겨 둔 왕손이 있다면 양자로 들여 드리겠소이다.”화양부인은 눈물을 감추고 안국군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이 눈에 보였다. 부인은 안국군의 품속을 파고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실 조나라에 볼모로 가있는 자초왕손이 그리도 대군과 소첩을 사모하고 있다하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주신
좁은 어깨를 자잘하게 떨며 울음소리가 겨우 방문 밖으로 새어날 정도로 슬피 울었다. 여린 아녀자의 애끊는 심정이 녹아 있는 울음이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듯 하면 다시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밤의 분위기와 사뭇 어울리며 애절함이 뼈에 사무쳤다.안국군은 느린 걸음으로 화양부인을 찾고 있었다. 오늘 만큼은 조용한 기분으로 그녀를 맞고 싶었다. 아랫것을 물리고 조심스럽게 화양부인의 처소에 다가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처소에서 애간장을 녹이는 그녀의 울음이 참으로 슬피 새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안국군은 그 소리를 듣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