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를 신뢰합니까? 신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란 질문에 ‘하나님, 예수님, 창조주, 부모, 친구, 저는 저를 믿습니다’ 등 다양하게 말을 합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종교를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신뢰’가 무엇일까요? ‘신뢰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참으로 슬프게도 저는 ‘신뢰’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뢰’가 있다고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으니까요. 절박한 상황에서 ‘너는 누구를 신뢰하니?’라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하면서 아찔했던 순간이 지금도 소름끼치게 부끄러움으로 다가옵니다.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다. 아픔은 관계 속에서 시작되며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할 대상이 없을 때, 위로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아파도 더 아파할 수가 없게 된다. 스스로 아픔을 억압하거나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감각을 둔화시킨다. 오랜 시간 감각을 둔화시켰다면 아파할 대목에서 오히려 더 아무렇지 않는 듯 자기를 방어, 보호하게 된다. 우리의 감정은 태어날 때부터 엄마로부터 생겨나며 관계 속에서 구체화된다. 관계 속에서 아픔을 자주 경험한 사람들은 사람을 기피하게 된다. 이런 경우 흔히 ‘대인기피, 대인공포’ 라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아 모난 부분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사회적 관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부딪힘은 깨져가면서 터득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프다, 아프다’ 소리가 납니다. 우리는 태어난 장소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릅니다. 문화적인 요소, 사회적인 요소, 개인적인 요소 등에 따라 형성된 성격, 인품이 있다. 한 가정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인격체가 나옵니다. 자신이 경험한 바에 따라서 신념, 사고방식, 생활 양식의 차이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
살면서 고난은 어김없이 다가옵니다. 어쩌면 고난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때는 ‘고난이 축복’임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던 날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는 게 이제는 습(習)이 되었습니다.어느 날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빈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살았던 날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면 안된다는 비합리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양심적으로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삶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선입견과 편견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도 자신이 경험한대로 말을 하고 기억한다. 사실 우리가 보고 경험한 것은 전체가 아닌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체로 인식한다. 싸우는 두 사람을 바라볼 때도 좀 더 친한 사람 편에 서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털끝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는 채 믿어버리는 경우가 있다.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듣고자 준비가 돼 있는지를 점검해야 그 사람과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의 삶을 듣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기
나는 한 때 입이 마르도록 하는 말이었다. ‘나는 착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고 싶어.’ 그 말에 대한 책임으로 ‘좋은 사람’임을 강조하며 살았던 날들이 창피하고 민망해지면서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져보았다. 과연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좋은 사람’은 경우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뚜렷하게 보여지는 것은 ‘좋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는 엄청난 비합리적인 신념이 나를 휘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변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선생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아파서 기댔는데 더 아파’ 이 말이 가슴에 ‘훅’ 하고 들어왔다. 서로 멋쩍은 웃음을 웃으면서도 아픈 말이었다. 나는 무의식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그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흔히 말하는 ‘무의식의 불러드림’, 또 다른 표현으로는 ‘무의식이 고통도 사건도 만들어낸다.’ 라고 말하고 싶다.무의식 세계가 의식의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나 또한 집착이 심했을 때 나의 모습에서도 무의식의 무서운 세계를 보았다. 어느 날 같은 동료 선생님이 ‘자신을 착하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충분히 ‘관계를 위한 관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그만큼이다. 경계를 잘 지키는 인간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관계라고 한다.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가장 많이 받는 피드백 중의 하나가 ‘너처럼 인간관계를 하닌까 너만 힘든거야’... ‘경계선이 없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내가 아는 것은 솔직하지 않으면, 진실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10년이 되어도 깨지게 되어있다. 나처럼 잘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지만 묵인하고 싶어서 내 마음을 보지 않으려고 하고 지속하려고 했던 인간관계들을 생각해보면, 결국
한 어항 안에서 성질이 사나운 물고기와 조금 덜 사나운 물고기와 바닥청소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성질이 덜 사나운 물고기와 다른 물고기를 함께 살았는데, 결국 한 마리의 물고기만 남고 다 죽었다. 다른 어항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그래서 결국 살아남은 두 마리의 물고기를 한 어항에 살게 했다.역시나 물고기의 세계도 강자가 지배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덩치가 큰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를 계속 공격하니 다른 물고기는 여과기 뒤로 숨어 살게 되었다. 먹이를 줄 때도 먹지 못하게 공
교류심리학자 에릭 번(Eric Berne)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쓴 각본대로 살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것을 ‘인생각본’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확고한 어떤 결정을 가지고 있으려는 것으로 6세 이전에 부모를 포함한 의미 있는 주위사람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각본에는 금지령(injunction), 허용(permission)과 같은 부모의 양육태도에 따라 어린 시절에 자신에 대한 어떤 결단 즉 초기결단(early decision)을 내리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어떤 생활 자세를 가지도록 하는데 큰
우리는 자신 안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불안을 느끼며 산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를 싫어하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무엇을 잘못 하였나’, ‘나만 외톨이 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맞는 선택일까’, ……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이 엄습해 온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특히 학생들은 ‘내가 자는 시간에 점수가 뒤쳐지는 것은 아닌가’, ‘삼수 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을까’, ‘잠을 자도 되나’,…… 특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새벽 시간대일수록 불안은 더 고조되는 경우가 있다.나 혼자만이 불안을
그의 어린 시절과 삶의 일부분을 그의 언어로 담아본다. [‘네가 남자였다면 우리 집은 3남 3녀였을텐데.’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말이다. 나는 전남 해남 ‘용동’이란 마을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형제들의 생년월일은 누구하나 제대로 된 사람이 없고, 모두 출생보다 2년이 늦게 신고 되어있다. 4살 되던 해, 광주로 이사 왔으나 넉넉지 않는 살림 탓에 어머니는 막노동을 하셨고 아버지는 군대에 계셨을 때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과 함께 즐거웠던 기억보다는 바로 위의 연년생 언니와 둘이서 놀았던 기억이 많다. 다른 형
그는 애쓰며 수고했던 삶을 되돌아보면서, 상담사의 길을 오기까지 여러 가지의 직업군으로 삶을 걸어왔습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보다는 감사함이 많아서 무조건 성실하게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상담사가 되면서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게 되었고, 그 때서야 자신을 돌보지 못함을 눈물로써 용서를 구했습니다. “정녕 주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먹고 살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들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주님께 사랑받는 사람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주께로부터 복을 받기 때문이다.“ (시편 127:2)교수님으로부터 그는
질투심과 시기심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공통된 부분도 있지만 둘은 분명하게 구별이 됩니다. 질투심은 어느 정도 정신의 성숙이 진행된 상태에서 질투할 구체적 대상에 대해 갖는 심리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자기 것을 타인에게 뺏길까봐에 대한 두려움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질투심은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질투하는 사람, 질투하는 대상, 이 두 사람을 빼앗기지 않을려는 대상입니다. 질투에는 정도차이가 있습니다. 가벼운 질투는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나도 그들이 넘 부럽다’, ‘나도 그들처럼 대박났으면’ …… 부러
상담자는 ‘상담을 하는 사람’이라 하고, 내담자는 ‘상담을 받는 사람’이라 칭합니다. 상담은 도움을 받는 사람, 도움을 주는 사람, 도움을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간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이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 내담자와 전문적 훈련을 통해 수련기간을 마친 사람인 상담자, 두 사람의 상담관계라는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담이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과의 대면관계에서 생활 속에서의 주 호소 문제해결과 사고·행동 및 감정 측면의 인간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학습과정이라고
우리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리허설도 없이 바로 현장으로 투입이 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은 늘 ‘공사중’입니다. 공사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완성품은 여지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또 다른 공사 현장에서 자신을 보곤 합니다.심리학자 칼 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리가 아프다고 목을 밸 수 없는 것과 마친가지로 섀도(그림자)를 억압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을 내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지고 있는 열등, 수치스러움,
우리는 사랑을 빙자해서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얻습니다. 그것을 ‘자애(自愛)’라고 합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너)은 누구입니까? 당신(너)은 또 다른 ‘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자녀, 친구, 가족에게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을 해줍니다. 사실 자신이 받고 싶다는 말도
심리학자 칼 융은 40세를 전 후로 하여 행동과 의식의 탈바꿈이 발생되는 결정적 전환기로 보았습니다. 중년기는 사춘기 때와 마찬가지로, 삶에 대해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여 잠재되어 있던 자아를 깨워서 자아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하지만 중년여성은 아들, 딸이 결혼한 후에 이에 대한 상실감으로 삶에 대한 회의를 하게 되고, 상실감이 소외감으로 또 다시 소외감이 상실감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함으로써 우울증을 앓게 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로는 그동안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에 외상적 경험이 히스테리를 만들었다고 보았다. 이때 외상은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아이의 자아가 과도한 긴장을 누그러뜨려서 견딜만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무의식적 감정을 의미한다. 외상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그 공격이 남긴 심리적 흔적이라 할 수 있다.자신이 받은 외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신 안에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자가 치유 능력’이라 한다. 또한 우리는 충분히 창조적이며 생산적이며 충만한 삶을 살게 하는 자기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자기를 보존하는 것은 인간의
‘저는 자기애가 없는 걸까요?’ 울상인 얼굴로 물어온다. 과연 자기애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자기애는 건강한 것이고 누구나 자기애를 가지고 있다.여기서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 대상에게 자기만의 과대욕구에 대한 기대가 좌절하였을 때 마치 자기애가 없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코헛은 ‘과대자기’라고 표현한다. 이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공감적 반응을 받지 못하였을 때 자기와 대상이 타인에 대한 인정욕구가 과도해지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자기가 적고 약하게 되며 반대로 자기가 부풀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