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회갈색의 싸늘한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작은 체구에 비해 다부지게 보였으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청바지와 하늘색 남방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이미지와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손가락에는 아일랜드 정통문양인 켈틱 디자인이 선명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자리에 앉으실까요.”그는 정중하게 우리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늙은 사내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일렀다.그는 다소 당돌하게 느껴질 만큼 당당했고 매사에 자신감이 살아 있었다. 또 확실하게 일 처리하는 것을 생명으로 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
“알렉세이?”“…….”대답이 없었다.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쫓기듯이 주변을 둘러 본 뒤 곧바로 내게 손을 내밀며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는 목각인형처럼 뻣뻣하게 선 채 귓속말을 했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차로 갑시다. 차는 어디 있소?”따냐의 차에 오르자 그제야 세웠던 옷깃을 내리며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곳으로 가자고 요구했다.“나는 알렉세이의 심부름을 왔소, 그가 별장에서 기다리고 있어요.”그의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도 전에 고개를 창밖으로 돌린 뒤 다시 나를 보지 않았다.그가 우리를 데려
[8] 알렉세이의 별장6월17일 “따르릉.” “따르릉.”나는 전화 벨소리에 잠이 깼다. 부스스 게으르게 눈을 뜨고 몸을 돌아 뉘였다. 하지만 벨소리는 귀찮게 계속해서 울렸다. 베개로 귀를 막았지만 벨소리는 멎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잠이 설깬 탓 인지 눈알이 무거웠다.“여보세요.”“빅또르 김입니다.”“이른 새벽에 웬일이십니까?”“지난번에 내게 부탁하신 물건 구입 문제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잘 해결될 것 같습니다. 오늘 알렉세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올 테니까 그를 만나 보세요
“드레곤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나요?”“그 사람들은 다시 본적이 없어요.”“좀더 소상하게 기억해 보세요.”“그들 중 한 사내는 두터운 안경을 끼고 있었어요. 그리고 같이 온 사람들은 그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어요. 이곳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그녀는 누군가가 창밖에서 이런 말을 엿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수시로 반쯤 열린 창문을 응시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불안감을 씻어주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 닫는 시늉을 하며 주차장을 내려다 봤다. 주차장에는 늘어선 차들 사이로 어두운 그림자를 몰고 다니는 사내들이 서너 명
나는 술잔을 들며 엘레나 조에게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을 비운 뒤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자 그녀는 말없이 잔을 받아들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 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것을 무언으로 시사했다. 그녀는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조심스럽게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독물에 젖은 것처럼 보이는 초록색의 귀걸이가 흔들렸다. 커다랗게 벌어진 눈동자는 지치고 적막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녀가 갑자기 장님이 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을 했다. 얼굴에 긴장과 짓눌
그녀는 내가 깡마른 사내와 흥정을 끝냈다는 사실을 안 탓인지 유난히 내 앞을 오가며 요염을 떨었다.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몸으로 내가 앉은 테이블가까이 다가와 촛불에 빛나는 엉덩이를 몸서리치도록 요동쳤다. 날카로운 하이힐 축과 팽팽히 긴장된 허벅지,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약간의 체모와 휘감아 도는 둔부의 굴곡. 이런 것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탁한 동공에 깊숙이 감추고 나에게 다가올 것을 손짓했다.러시아인들이 운영하는 주점에서는 무희들에게 몸을 팔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또 러시아 무희들도 그것을 결코 용납하
내가 그 사내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불현듯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홀을 돌아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그는 나와 눈빛이 마주친 뒤 등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왜 밖으로 나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또 내 테이블 촛불이 눈앞에 있었던 탓에 그를 정확히 볼 수도 없었다. 중키에 동양계라는 것 정도 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삼아 그를 유심히 볼 이유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채린을 찾는데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그 자가 밖으로
속이 훤히 내보이는 실크조각에 눌린 콩알만 한 유두가 어둠 속에 돋보였다. 그녀의 살결은 바닥에서 분출되는 조명에 비쳐 갓 짜낸 우유같이 신선하게 다가섰다. 붉은색 조명을 정면으로 받은 그녀의 사타구니는 이글거리는 햇살같이 시선을 빨아들였다. 길게 뻗은 다리와 덜름하게 달려 올라간 엉덩이는 주점을 찾은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그녀는 시간을 알리는 인형같이 음악이 경쾌해지자 곧바로 음률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몸을 흔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몸은 광란에 젖어갔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은 어
그제야 깡마른 사내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흉측하게 생긴 그와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주변을 애써 둘러보았다. 그 때 안으로 들어갔던 사내가 나왔다. 그는 자리가 있다며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나는 몸이 약간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럴 때마다 아랫배에 힘을 주며 이를 굳게 다물었다. 깡마른 사내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바닥에는 핏빛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희미한 조명을 받은 벽에는 아가씨들의 사진이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그 사진들은 하나같이 반라의 모습으로 시선을 끌었다. 동양계
나는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따냐의 차로 돌아왔다.“아직 문을 열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요. 오늘 저녁에 다시 와야 할 것 같아요.”“혼자서 들어가려고요.”“혼자서라도 들어가야지요?”“총영사관에 연락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그럴 수는 없어요. 영사관에서 안다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거요. 영사관측의 입장을 잘 알지요.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울 테니까. 기자 신분인 내가 이곳에서 사라진다면 영사관도 입장이 난처해지거든요. 영사관 사람들은 내가 채린을 찾기 위해 이렇게 다니는 것조차
[7] 골든 드레곤6월16일 하바롭스크거리는 호텔에서 도심을 지나 다소 한갓진 곳에 있었다. 낡고 육중한 건물들이 도열한 거리는 이른 새벽 공기만큼이나 음산했다. 우거진 가로공원은 정리되지 않은 채 스산한 한기와 함께 거리의 숨통을 조였다. 짙푸른 색감이 거리 전체를 덧칠했고 숲 속에 도심이 묻혀 있다는 착각마저 일으켰다.따냐의 승용차가 비실대며 시동을 멈춘 곳은 낡은 아파트 옆이었다. 5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는 오랜 세월의 흔적과 아이들의 낙서에 잘 길들어 있었다. 베란다에 쳐진 난간 대는 녹슬었고, 창문마다 붙어선 유리창은 두터